누군가를 미워하는 나를 인정하는 데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내가 많은 도움을 줬다. 글방에 다니며 회복된 의외의 지점 중 하나는, 나는 동료에게 애정을 갖고 누군가의 글을 마음 쏟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점점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에 쉽게 피로를 느끼는 스스로의 모습을 두고 사회성이 없다, 안티 소셜이 되어가는 것 같다는 말을 농담 삼다가 정말로 그렇게 믿어버린 것 같다.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서 어딘가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다고. 나에겐 한 가지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능력을 영원히 잃었을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가는 이 글에서 별로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설명 대신 어느 문장을 읽은 기억을 이야기하고 싶다. 책장에 꽂아둔 산문집을 무심코 펼쳤다가 이런 내용의 문장을 마주쳤다. 일주일에 세 번쯤 형편없는 사람과 만남을 가지는 일이 영혼을 죽인다고. 허걱. 내가 지금 그런데··· 문장을 읽자마자 가슴이 헛헛해진 나머지 산문집은 더 읽지 않고 덮었다. 이제는 어떤 책이었는지조차 잊어버렸지만, 누군가를 ‘형편 없’다고 수식한 문장만큼은 종종 떠오른다. 누군가를 형편없다고 평할 수 있는 대찬 태도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단지 편협함인가? 나 같은 경우 쉽게 속단하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워 그러한 표현을 글로 남기길 망설였을 것이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건 사랑하는 것에 비하면 가치 없는 일 아닌가 싶었다. 싫어하는 마음은 박힌 돌 같으니까. 잘 짠 그물이나 정성 들여 빚은 백자가 아니라 그냥 별 볼 일 없는 이물질. 누굴 싫어하는 마음을 감당하다가 얻은 손상은 극복해야만 의미 있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반면, 어떤 때는 사랑 같은 온정적인 말들 사이에 서 있다가 땀띠가 났다고, 전부 질렸다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건 뭐지. 미움보다 사랑이 복잡한 이해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왕 하려면 사랑을 하는 게 더 좋다. 오래도록 이 이야기를 하길 망설인 이유는 이랬다. 그렇지만 덜 환영받는 마음에도 자리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원래부터 좋은 것, 나쁜 것으로 분류되는 감정은 없다. 분노가 어리석다고 말하지만, 흑점처럼 일어난 분노는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차디찬 냉소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고 하지만 잘 벼린 냉소로 드러내는 진실도 있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미움이나 사랑이나 느껴 마땅한 감정이다.
나랑 안 맞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정을 못 붙이는 걸 넘어 누군가를 싫어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어서 나는 한동안 내가 느끼는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어제 처음 친구를 사귄 사람처럼 나는 나를 앉혀두고 계속해서 설득해야 했다. 나쁜 사람이 아닌데 왜 싫어하지? 계속 얼굴 보고 시간도 보내는데, 왜 불편해지는지. 나는 내 사회성을 비난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그 사실을 인정할 줄 모른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도 그 마음 앞에서 오랫동안 헷갈렸다. 그 사람이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이라서도 아니고 피해만 끼치는 빌런이어서도 아니다.
요즘 유튜브에는 ‘나르시시스트 알아보는 법’, ‘주변에 있다면 반드시 피해야 할 타입’과 같은 제목의 영상이 심심찮게 뜬다. 정말로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겪은 갈등을 떠올리고 위안을 얻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를 스테레오 타입으로 만들고 누가 싫어할 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답을 대신 제공하는 콘텐츠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 영상들의 유행이 반갑지 않지만, 누군가를 싫어하는 감정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란 사실을 체험하고 나서 사람들도 그게 어려워서 그렇게 영상들을 찾아댔겠지, 생각했다.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좋아할 만한 사람인가, 싫어해 마땅한 사람인가. 의외로 알 수 없다. 사소한 불평불만이 많고, 뒤에서 도는 타인의 소문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마치 싫어해 마땅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를 직접 겪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때가 있다. 이러한 점이 인간관계에서 함정이 된다. 정말로 용인하면 안 되는 면까지 넘어가게 만들기도 하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우리는 누군가를 아주 복잡하게 사랑하기도 하고 아주 복잡하게 미워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확실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 좋아해야 한다고 착각했다. 그래야만 좋은 사람이고, 나는 바로 그런 좋은 사람이라는 환상에 빠져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저 사람을 싫어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속 시원했다. 이상하게도 답이 명료한 질문에 나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느끼고 다른 이유가 더 찾아다녔다. 나는 무심코 훌륭한 성직자처럼 내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이게 완전히 합리적인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무엇 때문에 헷갈렸는지 파악하기 위해 한 걸음쯤 나아간 것 같다.
내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는 건 늘 어렵다. 객관적인 시선은 필요하지만, 나에게 밀어닥친 혼란은 결국, 내면의 맥락을 잘 헤집어봐야 풀 수 있는 실타래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건 시도할 만한 일이지만, 동시에 내가 바라는 모습이 지금의 나는 아니라는 사실은 여전히 헷갈린다. 어느 성숙한 사람은 그걸 더 이상 헷갈리지 않고 살아갈까? 그런 사람이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나 자신은 언제나 내가 꾸는 꿈 같다.
나는 여전히 잘 잊는다. 삶은 가끔 살아볼 만한 것 같다가도, 다시 나빠진다. 이제는 알 것 같다가도 영영 모르게 되는 순간도 덜컥 찾아온다. 여기에서 더는 나아지지 않을까 봐 두려울 때는 외운 기도처럼 분명 지나간다는 걸, 잃어버렸다가도 되찾을 수 있다는 걸 곱씹는다. (실제로 좀 모자라더라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당연한 말을 들여다보며 깜짝 놀란다. 진부할 정도로 입바른 말들이 왜 존재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오래 들은 노랫말이 문득 새롭게 파고드는 순간처럼, 영원히 새로움을 발견하라고. 당신이 이미 아는 것들 속에서.
글 · 그림_ 운(하자글방 죽돌)
2024년 가을학기 하자글방 후속모임 〈둥글레차〉는 글방지기 죽돌(청소년)이 제안한 글감을 단서로 글쓰기와 합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글감 소개 : 하자글방
우리의 첫 만남은 2024년 8월 31일이었지요. 11월 9일 쇼하자가 있기까지 매주 세 시간씩 열심히도 달려왔네요. 둥글레차로 모이게 된 후로는 한 달에 한 번이 그렇게 애틋할 수도 없더라고요.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수놓은 추억을 되짚어보며, 우리가 썼던 문장을 읽어보며··· 올해 당차게 첫걸음을 내디딘 둥글레차의 터닝 포인트를 이렇게 맞이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들 어떻게 이번 글감에 다가가실지 궁금해요. 저는 하자글방에서 처음 썼던 ‘나는 왜 쓰는가’ 글에서 영감을 얻어볼까 싶어요. 다른 글방 분들을 만나 뵐 수 있었던 몇 번의 기회들을 떠올려보기도 할 테고요. 물론 이렇게 출발해도 도착한 곳은 예상치 못한 길일 수 있음을 모두 알고 계시겠지요? 우리는 쓰면서 헤매는 둥글레차이니까요.
그렇지만 언제든, 헤맨 만큼 내 땅이 된다는 말을 제가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둥글레차 여러분이 기억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감 소개를 마칩니다.
_다정(하자글방 죽돌)
From. 하자글방
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3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가운데 일부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