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내가 16살 때의 일이었다. 유튜브에서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노래에 반한 그 순간 말이다.
노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7살 오디세이 학교에 들어가 냅다 밴드 프로젝트에 들어가 노래를 하고 또 다음 해에 공간 민들레에 들어가 또 밴드 프로젝트를 하고 다음 해도 또 밴드 프로젝트를 했다. 3년 동안 내 노래가 아닌 다른 이의 노래를 불렀다.
물론 간간이 작곡을 하긴 했으나 맘에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2022년, 18살에는 뉴트랙 4기에 한 2주 정도 발 담그고 있었다. 그때의 어린 나는 나의 발전보다 관계가 더 중요한 나였기에 얼마 해보지도 않고 '재미없다, 같이 한 친구가 나갔기에'라는 이유로 하자센터를 뛰쳐나왔다.
그 이후로 2년 정도는 하자센터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도망간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성인이 된 2024년, 다시 뉴트랙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의 음악이 아니라 '내'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합주를 하고 곡을 쓸 때 나는 항상 자고, 놀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올해도 내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처음의 의지와는 다르게 점점 나는 꺾여갔던 것 같다. 2024년의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올해 다시 뉴트랙 6기에 들어온 것인데, 나는 또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제일 부럽다는 생각을 가진 친구들은 공연 때 자신의 부모님을 초청한 친구들이었다.
나는 항상 '그녀'에 대한 노래를 썼다. 그녀는 특정할 수 없지만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날 힘들게 한 누군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난 항상 그녀를 혐오했다. 혐오의 말을 부모님께 들려준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물론 나는 그딴 용기는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결국 혐오하고 있던 게 나였다는걸 깨달았다.
물론 현실에서의 '그녀'들은 나를 괴롭게 했지만 그 순간을 질질 끌고 나를 아프게 한 건 결국 나라는 것이다. 떨쳐내지 못한 나.
하지만 나는 항상 그것을 혐오의 말로 노래했다. '그녀의 말들을 여기에 모아 불태워 버리자.', '더 이상 다가오지 마 네 목을 조를 수 있으니까'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직 세계가 좁은 내가 또 미워지는 악순환을 겪었다.
내가 너무 싫고 밉지만 그걸 부모님 앞에서 노래하면 부모님은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겠는가.
그래서 나는 부모님을 초청한 그들이 너무 부러웠다.
마지막 공식 활동으로 도토의 '불꽃놀이'를 녹음하며 더 생각이 많아졌던 것 같다.
8, 9월 내 삶에 너무 집중하느라 음악에 신경 쓰지도 못했고 남의 것은 더더욱 신경 쓰지 못했다.
근데 불꽃놀이의 가사를 읽는 순간 '내가 했던 것들은 뭐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는 이 비교가 나에게 꽤 도움이 되는 비교라고 생각한다. 도토가 노래하는 것을 보며 꽤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책을 보고 이 가사를 써냈다고 했다. 그 말이, 노래가, 가사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나도 그런 노래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음악은 '나', '나의 내면'에 굉장히 집중되어 있는 느낌인데, 내 기복이 너무나도 심해서 어느 날엔 내가 내 노래에 공감하지 못할 때도 있는 것 같다.
도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음악들도 내게 많은 영향을 줬다. 그때였을까? 좋아하는 뮤지션이 쏜애플에서 한로로로 바뀐 것은.
'차라리 이대로 죽어줘'에서 '난 널 버리지 않아'로 가기까지의 엄청난 여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는 하자에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요새는 음악을 만들지도 않고, 일도 안 하고 그냥 집에서 썩고 있다. 물론 가끔 기타는 잡는데, 음악이 나오지 않는다. 책을 안 읽어서 그런 걸까? (긁적)
앞으로도 계속 SOS 없이 나는 집에서 썩어갈 것이다. 누군가에게 구해달라고, 날 좀 봐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방에서 생각 정리 좀 하고, 노래할 수 있을 때 다시 나와보고 싶다.
뉴트랙 6기는 힘들기도 많이 힘들었지만 내 음악 세계를 돌아보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순간을 선사해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