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이가 우리 집에 왔다. 콩이는 등과 귀는 검고 주둥이는 하얀 강아지다. 특히 귀여운 부분은 발. 앞의 두 발이 신발을 신은 것처럼 발목부터 발끝까지 하얗다. 콩이는 우리 집이 익숙한 듯 하얀 소파 옆에 깔아둔 핑크 쿠션 위에서 잠을 잤고 산책할 땐 늘 같은 곳에서 오줌을 쌌다. 콩이는… 정말 우리 집 강아지 같았다. 생각해 보니 우리 집 강아지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콩이는 삼촌의 강아지였다. 삼촌과 내가 같은 집 안의 사람이니 콩이도 우리 집 강아지가 아니었을까?
콩이와의 기약 없는 동거가 시작될 때면 내심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런 내가 싫었다. 콩이가 우리 집에 맡겨진다는 건 삼촌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었으니까. 삼촌이 입원함과 동시에 숙모는 삼촌을 간병해야 했다. 그러면 콩이는 자연스레 우리 집에 오게 된다. 콩이를 돌볼 사람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20대 초의 삼촌은 운동선수처럼 몸이 건장하고 무거운 것도 번쩍번쩍 들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삼촌의 모습을 몇 번이고 상상하려고 노력해 봤다. 하지만 결국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주사를 많이 맞은 탓에 떡두꺼비처럼 혹이 볼록볼록 나와 있는 삼촌의 팔과 충혈된 눈, 최애 음식이던 ‘불고기야’ 식당의 불고기를 먹고 한 뭉텅이의 약을 털어 넣는 삼촌의 모습뿐이었다. 이젠 정말 그런 것만 기억이 난다. 좋았던 기억도 분명 있었는데 그걸 떠올리면 떠나기 전 삼촌의 누런 몸이 같이 생각난다. 기억이 노란 셀로판지를 덧댄 것처럼 노래진다.
삼촌은 오래 아팠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팠으니 나는 아픈 삼촌의 모습만 아는 셈이다. 우리 가족은 늘 삼촌이 언제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말 떠날 줄은 몰랐다. 재가 된 삼촌은 고향이자 당시의 거처임과 동시에 할머니 할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밀양의 작은 땅에 뿌려졌다. 우리 오빠 평생을 아프기만 했는데. 불쌍해서 어떡해. 엄마가 많이 울었다. 정수야 아버지 엄마 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 이모들도 울었다. 당신이랑 함께해서 행복했어요. 행복하게 해 줘서 고마워요. 숙모도 울었다. 그걸 지켜보는 나도 울었다. 눈이 퉁퉁 부어서 쌍꺼풀이 사라졌다. 울면서 무슨 생각을 했더라… 정말 온갖 신한테 빌었는데 신은 나를 버렸다고, 모든 게 헛수고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글의 제목을 정하기 위해서 삼촌의 이름인 ‘정수’를 구글에 쳐봤다. 제일 위에 뜬 것은 ‘먼 곳의 수비(守備)로 떠난 병정’이었다. 그냥 이렇게 정수의 뜻을 끝으로 글을 끝낼까도 싶었다. 먼 곳으로 떠난 나의 하나뿐인 삼촌을 기억하며. 글에서만큼은 숙모를 영원히 삼촌의 아내로만 둘까도 싶었다. 근데… 그다음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근데 또… 그냥 이렇게 끝낼까 싶기도 하다. 내가 쓰기를 망설이는 이유는 뭐지? 다른 사람들 다 이런저런 가정사 있는데 나만 유난 떠는 건가 싶어서? 더 이상 그녀를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를 여전히 사랑해서? 모르겠다. 나는 그냥 콩이를 다시 보고 싶다. 그 보드라운 배를 통통 두드리고 싶을 뿐이다.
삼촌이 떠난 후 숙모는 밀양에 있던 사과밭을 정리했다. 혼자서는 밭을 관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모는 밀양에 계속 살았다. 밭과 별개로 원래 거주하던 곳이니 떠날 이유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숙모는 이모들과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카카오톡도 보지 않았다. 내가 보고 싶다고 보낸 메시지에도 답하지 않았다. 간간이 받았던 콩이 사진과 영상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숙모는 삼촌의 첫 기일에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의 얼굴을 보는 게 힘들다고 했다. 밀양 집의 문을 열어두고 나갈 테니 들어오실 거면 들어오세요. 숙모는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피했다. 가족으로 지낸 지가 30년이 넘는데 너무하네. 넷째 이모가 그랬다. 큰이모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겠냐고 엄마 아버지 정수 모신 땅에나 빨리 가보자고 했다. 모두 서둘러 걸었다.
그 땅은 정말 하나도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고작 1년이었다. 새삼 1년 만에 잡초가 이렇게 무성할 수 있구나 싶었다. 숙모가 땅을 관리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숙모의 집에서 묘지는 기껏해야 5분 거리였다. 엄마는 또 울었다. 숙모는 그 이후에도 연락을 하지도 받지도 않았다. 나도 더 이상 숙모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 한 번은 숙모가 이모들과 엄마가 있는 단체 채팅방에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고 한다. 쌈밥 사진과 함께 ‘자기야 나 밥 먹는 중.’ 그 메시지는 1분 만에 삭제됐다. 미웠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숙모가 가족이었는데 숙모는 단 한 순간도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만 같아서. 나는 삼촌도 잃고 숙모도 잃고 콩이도 잃은 것 같아서.
그런데 누군가 숙모가 그렇게까지 밉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숙모는 사과밭을 정리하기 전 삼촌과 함께 키웠던 마지막 사과를 땄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전화했다. 아가씨, 오빠 마지막 사과 사랑이랑 보람이랑 잘 먹어줘요. 상자 가득 담긴 사과가 집에 도착했다. 엄마는 한참 동안 상자를 열지 못했다. 우리는 겨우 꺼낸 사과를 씻어 식탁 위에 올려두고, 아무 말 없이 하나씩 먹었다. 씹을 때마다 눈물이 났다. 사과를 들고 한참을 울었다. 그 사과를 따던 숙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혼자 밭에 서서 마지막 열매를 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삼촌 생각을 했을까. 드디어 이 가족에게서 벗어난다는 해방감을 느꼈을까. 아니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나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그 장면을 자꾸 상상하게 된다.
꿈을 꿨다. 검은 옷을 입고 말레피센트같이 진한 화장을 한 숙모가 꿈에서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당신에게 우리 가족은 무엇이었냐고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왜인지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다가 잠에서 깼다. 여전히 콩이의 보드라운 배를 두드리고 싶다.
글 · 사진_ 여울(하자글방 후속모임, 아나바다)
부산에서 태어나 바다와 함께 자랐다. 삶이 레몬을 준다면 바닷물 한 컵을 떠다가 시고 짭짤한 레모네이드를 만든다.
강이나 바다 따위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을 여울이라 부른다.
얕기에 부서지는 일이 잦다. 그 파편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우다다 달려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 여울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물이 스쳐 간 자리에는 반드시 자국이 남는다. 부유물은 파도에 모두 쓸려나가고 모래 위에 남는 건 결국 파도의 흔적뿐이다.
덩어리진 실체는 사라지고 오직 지워지지 않는 무늬만이 남는다.
내 무늬는 어떤 모양일까? 씀으로써 무늬를 찾는다.
글감: 헛수고
2월의 글감은 ‘헛수고’입니다. 해가 바뀐지 얼마나 되었다고 초장부터 김새는 글감을 내놓는 것이 겸연쩍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실패를 위한 예행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하여 꼽아봤습니다.
됐다, 헛수고다 생각해 본 적이 모두 있으시겠지요. 여러분들은 어떨 때 내 노력이 무용하다고 느끼시나요? 더 이상 오고가도 못하는 상황일 때 억지로 수고를 밀어 붙여본 적이 있나요? 그것은 그대로 헛되었나요? 되려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나요. 각자가 정의하는 헛됨 또한 다를 것 같아요. 사회의 기준과 자신의 기준이 충돌할 때도 있겠고요. 나에겐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눈엔 쓸모없는 짓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처럼…
질문을 남발한 것은 여러분을 통해 듣고 싶기 때문이에요. 아나바다가 무용한 것, 무용해질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이 궁금해요. 늘 그렇듯 주제에서 멀리 벗어난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_진실
후속모임 〈아나바다〉
하자글방 후속모임은 정규 과정 이후에도 스스로 글감과 마감을 굴려가며 글쓰기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2025년 후속모임 〈아나바다〉는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마음을 담아 올해 모임을 열었습니다. 글방지기인 죽돌(청소년)이 제안한 글감으로, 함께 쓰고 읽는 합평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From. 하자글방
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3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가운데 일부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