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 사이를 망가트린 쪽은 나였다. 어디 멀리 떠나냐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까지 질질 끄냐고 혀를 차던 얼굴에 고구마를 던진 쪽은 나였다. 영수증을 갈기갈기 찢으며 숨겨 왔던 비밀을 굳이 말한 쪽은 나였다. 딱딱한 책상다리마저 풀리게 할 고백을 했다. 3년이 지난 고백 장면을 지금도 습관처럼 떠올린다. 내 머릿속 혈관을 핏줄 삼아 살아 있는 그 순간을 아무리 쥐어 패도 기절시키지 못한다.
성현 중학교 1학년 6반 젖은 머리를 말리지 않고 한쪽으로 넘긴 후 문을 열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고 첫날부터 지각을 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도 보였지만 모르는 얼굴이 더 많았다. 담임 선생님은 까만 너구리 같은 외모였다. 덩치는 곰 같았다. 키를 따라 올라갈수록 확장되는 무게감에 곧장 넘어질 거 같았다. 우리 반은 7학년 같았다. 눈을 굴리면 비슷한 친구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중학생이 되었지만 매일 몇 개의 핑계를 돌려 사용하며 학원을 빠졌다. 오래 본 학원 선생님들은 모른 척도 한계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매번 넘어가 주셨다. 양심에 찔리며 진행한 일은 친구들과 산책이었다. 3,000원도 없는 중학생이 설 수 있는 곳은 거리뿐이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정은 생일 선물 사기였다. 나중에는 생일이 없어도 몇 차례씩 마니토를 개최하며 걷는 이유를 만들었다. 하교 후 학원을 가지 않는 친구들이 모이면 대개 4명 정도였는데 그중 항상 자리를 지키는 멤버는 나와 기현이었다.
나와 기현이는 아무리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고 매번 같은 곳을 가도 다음을 기대했다. 매일 맥도날드를 먹어도 물리지 않았고 학원을 빠지면서 친구들 하원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갔다. 그렇게 꼬박 1학기를 보내고 2학기에는 한차례 중간고사를 치렀다. 크게 모자라 보이지 않던 내가 대쪽 망한 성적표를 내밀자, 아빠는 신발 공장을 들먹이며 나를 꾸짖었다. 아빠는 모든 과목 점수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이런 점수가 나올 수 있냐며 놀라워했다. 전교생 300명 중 180등. 기현이는 181등이었다. 전교 석차에서도 나란히 걷고 있었다.
다음날은 학원 가기 전까지만 기현이와 맥도날드에서 놀았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거리를 나돌았다. 지나다니는 커플이 얼마나 사귀었는지, 헬로타임 분식집 아주머니가 어디를 갔다 오시는 길인지, 츄러스 집이 사라진 자리에 어떤 가게가 들어올지 추측하는 놀이는 계속되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거리 상황을 목격하고 눈빛을 주고받는 일은 멈출 수 없었다.
같은 반이 되지 못해 아쉬웠던 2, 3학년 때에도 생활은 비슷했다. 급식을 다 먹은 기현이는 우리 반으로 찾아왔다. 나는 오전에 코딱지 파는 친구와 짝이 돼서 책상을 확실히 갈라야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도덕 선생님이 아리수에서 손 씻는 것을 봤다고 공유하기도 했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신기하리만큼 붙어 있는 애들이었다. 나는 당시에도 연립방정식보다 우리의 우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었다. 동네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던 기현이는 본격적으로 미대 입시를 준비하였다. 어느 면에서도 특출나지 않던 나는 학원에 빠지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우리는 산책만 하는 동네 강아지 생활을 멈추고 입시생이 되었다.
기현이가 다니는 미술학원 선생님은 나를 알고 계셨다. 뭐 하다 왔어 물으면 나와 함께 걸었다고 하거나 먹었다고 하거나 놀았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기현이는 선생님께 나와 나눠 쓴 글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생님은 자주 놀러 오는 나에게 미술 학원에 다녀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기대에 부풀어 아빠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아빠는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기현이랑 놀기만 하는 거 같은데 미술을 들먹이며 한눈을 파는 것에 크게 화를 냈다.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판단하라고 이야기했다. 방에 들어가 눈물을 훔치며 기현이에게 카톡을 했다. ‘내일 등교하기 전에 맥모닝 먹는 거 어때?’
엄마가 몰래 돈을 쥐어 미술 학원을 보내주었다. 가서 그림을 그리니 현실이 훤히 보였다. 공부와 병행하는 것이 힘들겠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대쪽 같던 고집은 금세 흐물흐물해졌다. 얼른 스터디 카페로 돌아가 수학 숙제를 하고 싶었다. 학원에 있는 기현이도 내가 알던 기현이가 아니었다. 정물을 똑같이 그려내고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는 기현이는 나와 거리에서 개 발바닥이 될 때까지 하염없이 걷는 인물이 아니었다. 아빠가 쏘아붙인 말에 수긍하며 엄마에게 돈을 돌려주었다.
나는 성적대로 경영학과를 기현이는 원하는 대로 서양화과를 입학했다. 때는 코로나 시절로 우리는 대학교에 가지 못한 채 매일 중앙역 투썸 플레이스에 갔다. 화상 강의를 듣고 블랙핑크가 된다면 데뷔 무대 때 어떤 곡을 선택할지 상의했다. 빠른 년 생으로 술집도 들어가지 못해 여전히 우리 집 옥상에서 엽기 떡볶이에 쿨피스만 맥주로 바꿔 먹었다. 얼렁뚱땅 1년을 보냈다. 기현이는 1학년을 마치고 가장 원했던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고등학교 때 다녔던 미술 학원에 다시 들어갔다. 나는 기현이와 놀다가 같이 가기도 하였다. 한량 대학생은 옆에서 그림도 그렸다. 새로운 배움을 원한다는 것을 이유로 그림 앞에 앉아 있었지만 학원에 다니느라 바빠진 기현이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결같이 학교 출석을 하지 않던 나는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월등히 많아졌고 점차 그림이 쌓였다. 얼떨결에 기현이와 같이 입시 준비도 하게 되었다. 기현이와 나란히 걷고 앉아 있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다.
서로를 응원하며 시작한 미술 입시는 우리에게 전에 없던 경험을 주었다. 기현이는 비싼 미술 학원을 다시 다니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반드시 결과를 내야 한다는 불안이 있었다. 나는 기현이가 복잡한 상황에서 벗어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미술과 먼 존재였는데 같은 학원에 다니면서부터 묘한 경쟁자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고민의 일부가 되는 듯했다. 무엇이든 말하던 우리 사이에 말하지 못할 감정이 자꾸 찾아왔다. 기현이는 알 수 없는 생각 속에서 누구도 곁에 두지 않은 채 혼자 걷고 싶어 하는 거 같았다.
최종 목표로 함께 지원했던 학교엔 둘 다 합격하지 못했다.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준비했던 기현이는 아쉬운 결과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도리어 앞으로 우리가 못할 일이 없을 거 같다며 웃기만 했다. 그가 웃을수록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욕심스럽게 그의 진짜 감정이 궁금했다. 나는 기현이가 다니던 학교에는 붙어 같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기뻐할 일이 아닌 거 같았다. 몰래 준비한 입시 합격 소식을 알렸을 때 아빠는 그 학교에 왜 가냐고 물었다. 내가 기현이를 좋아한다는 정보 없이는 매끈하게 이어지지 않는 결정의 연속이었다. 나는 ‘기현이와 같은 학교’에 합격한 기분이었다. 예민했던 입시 기간이 끝나고 돌아올 우리 관계만 기대하고 있었다. 고백도 계획하고 있었다. 커다란 마음에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미묘해진 우리 관계를 확실하게 돌려줄 방법으로 고백을 떠올린 것은 마법을 부리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인생에서 하루를 돌릴 수 있다면 손이 델 듯 뜨거운 말을 쥐고 기현이가 있는 카페로 뛰어간 날을 꼽을 것이다. 자주 가는 카페였지만 처음 오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기현이를 찾고 어색하게 앉았다. 주문을 하고 오겠다는 말부터 비장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움켜잡고는 할 말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닫았다. 기다리던 기현이는 얼음이 녹은 커피가 넘칠 때쯤 지쳐 보였다. 도망갈까 생각도 했지만 지난 과정을 다시 반복할 자신이 없었다. 도착지가 어딘지 모르는 말들을 입 밖으로 떠밀었다. 부러진 말들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나는 고백이 끝난 후 당장 연인이 되고 싶단 건 아니야 덧붙였지만 비로소 우정까지 폭발시켰다는 것을 머지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꾹꾹 눌러도 모자랄 판에 새로운 파도로 모래성을 쌓으려 했단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현이의 대답은 시간이 지나 도착했다. 느리게 적힌 편지는 빠르게 읽혔다. 우리는 다시 좋은 친구로 지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시끄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들리는 겨울방학을 지나 새 학기가 왔다. 같은 학교를 등교하였지만 학년이 다르기 때문에 만날 일이 많이 없었고 가끔 마주치더라도 기현이는 과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대하지 않았다. 동네에는 겹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친구들은 우리를 함께 부르지 않았다. 기현이와 하는 만남과 나와 하는 만남을 분리하였다.
고백하는 테이블 위 찢어졌던 영수증이 다 썩었을지 모르는 세월 동안 우리는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간혹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였던 기현이의 생일에 카톡을 보낼지 말지 고민하지만 전송하지 못했다. 거리에서 기현이의 어머니를 우연히 뵙고 인사를 건네기도 하지만 놀러 오라는 초대에 웃기만 할 뿐 갈 수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여전히 모를 수 없는 기현이의 소식을 듣고 산다. 그 이름이 울리면 당시 우리가 걷던 거리를 환상처럼 떠올린다. 내 마음이 정말 사랑이었는지, 너무 커져 버린 우정이었는지 도리어 알 수 없는 날이 되어서야 제 자리에 있는 추억들에 의자를 내어준다.
2025.03.27 하루
글 · 사진_ 하루(하자글방 죽돌)
2024년 가을학기 하자글방 후속모임〈둥글레차〉는 글방지기 죽돌(청소년)이 제안한 글감을 단서로 글쓰기와 합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글감 소개 : 헤어질 결심
이번 달 글감은 ‘헤어질 결심’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여러분께도 영영 이별하고 싶은 것,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으신가요? 저에게는 결별하고픈 마음들이 몇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과 헤어질 결심을 무한히 반복하지요. 결심만을… 떠나보내고 싶은 마음들을 마주하고 용감히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여러분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쓰는 여러분의 안녕을 빌어요.
_다정(하자글방 죽돌)
From. 하자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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