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녁마다 거실에 앉아 티비를 보는 아빠의 소리다. 원체 리액션이 큰 아빠지만 그날따라 유독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물을 뜨러 주방에 나가면서 티비 속 화면을 봤다. 아빠가 보고 있던 프로그램은 바로 SBS의 <골 때리는 그녀들>. 화면을 보며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끊임없이 말을 걸던 아빠 옆에 슬그머니 앉았다. 여자들이 공을 차며 달리고 소리치고 울고 웃고 있었다. 그들이 울면 어느새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이고 그들이 웃으면 나도 함께 웃었다. 동시에 과거 짧게 스쳐간 나의 축구 경험이 떠올랐다.
무려 8년 전, 중학교 3학년이던 내게 첫 축구가 찾아왔다. 알다시피 여자들이 축구를 경험할 일은 매우 적다. 대부분의 학교 운동장이 점심시간만 되면 축구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모두 ‘남’학생들이다. 여학생들은 해봤자 공을 던져 사람 맞추는 피구나 야구도 아닌 발야구를 한다. 그마저도 체육 수업 시간에 그친다. 여학생들이 정말로 운동을 싫어하는 건지, 아니면 애초에 싫어하고 못할 거라는 편견이 만들어낸 결과인지 여자에게 제대로 공 찰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교장선생님이 ’00(학교 이름) 리그’를 만든 것이다. 종목은 축구. 피구나 발야구는 없다. 그럼 여자들은 뭘 하냐고? 똑같이 축구를 한다! 비록 3세트의 경기 중 1세트지만 오직 여자들끼리 공을 찰 기회가 생긴 것이다.
당시의 축구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다 같이 공 따라 뛰기’ 정도이다. 변명 같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본 적이 있어야지. 그렇게 숨만 찬 채 얼렁뚱땅 첫 경기를 치르고 승부욕이 타오른 우리는 매일같이 남아 연습에 임했다. 공격, 미드필더, 수비수. 본격적으로 포지션을 나누고 공을 빌려 연습에 돌입했다. 오죽하면 일요일에도 모였다. 패스가 반인 축구는 어느 운동보다도 단합이 중요했다. 당시 계절은 봄, 학기가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아직 어색함이 남아있던 우리는 땀을 흘리며 함께 성취감을 느꼈다. 자연스레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졌고 반 분위기도 좋아졌다. 그렇게 이어진 리그에서는 승부 빼고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앞머리가 날려 까진 짱구 눈썹도, 땀에 젖은 옷, 턱 끝까지 차오른 숨도 상관없었다. 그저 공만 봤다. (사실 공만 봐서는 안된다. 전체를 봐야 한다.) 처음 맛본 축구는 여태 해본 운동 중 최고였다. 남자애들이 왜 그렇게 급식을 흡입하고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00리그가 끝나자 공을 찰 일은 단 한 번도 생기지 않았다.
과거의 경험이 스쳐가며 티비 속 여자들의 심정이 더욱 와닿았다. 그리고 부러웠다. 코로나19 발생 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일체감과 단합력, 뜨거운 동지애를 느끼며 땀을 흘리고 싶었다. 느낌이 온다! 지금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그렇게 당장 공 찰 수 있는 곳을 알아봤다.
SNS와 포털 사이트에 ‘여자 축구’, ‘여자 풋살’을 검색했다.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운동할 수 있었다. 좋은 팀을 찾는 최고의 방법은 무조건 거리 순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활동하는 팀을 찾는 게 좋다. 내가 거주하는 도시에도 풋살팀과 축구팀이 하나씩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골 때리는 그녀들>덕분인지 풋살팀은 입단 문의가 폭주해 내년까지 신입회원을 받을 예정이 없다고 한다. 축구팀은 정보가 너무 적었다. 그나마 있는 블로그 포스팅이 경기도 배 시합에서 준우승을 했던 사진이었다. 실력이 어마 무시해 보였다. 끄트머리에 왕초보도 괜찮으니 도전하라는 문구가 있었지만 지레 겁을 먹고는 패스했다. 게다가 거리 두기 4단계로 인해 두 팀 모두 연습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 바로 공을 찰 수 있는 방법은 체육시설에 등록하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주변에 마땅한 곳이 없었다. 축구 학원은 많았지만 대부분 유소년이나 남성이 대상이었고 그나마 찾은 여자 축구반은 다이어트 축구라는 타이틀을 달고 축구 비슷한 유산소 운동을 하는 곳이었다.
결국 타지역까지 알아보니 여자 풋살을 전문으로 하는 프랜차이즈 체육시설이 있었다. 서울, 경기는 물론 지방에도 수 개의 팀을 보유한 말 그대로 프랜차이즈 풋살 교실이었다. 주 1회 정해진 구장에 모여 60분은 기술 등 훈련, 60분은 경기를 뛰는 커리큘럼으로 진행된다. 한 달 단위로 모집하니 부담도 없고, 무엇보다 매주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이 메리트로 다가왔다. 가장 가까운 지역이라도 대중교통으로 1시간이 넘는 거리였지만 일단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해 신청했다.
환희의 축구 도전기
드디어 첫 주가 됐다. 일요일 오전부터 풋살화와 텀블러, 땀 수건을 챙겨 집을 나섰다. 지역마다 구장이 다른데, 내가 신청한 지역은 실내 풋살장이었다.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에어컨도 있지만 실내인 만큼 크기가 무척 좁았다. 어색해하며 이것저것을 살펴보는 중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역시 모두 여자였다. 여태 크로스핏, 헬스장, 주짓수 등 많은 체육관에 다녀봤지만 이렇게 많은 수의 여자들이 모여있던 적은 없었다. 기대가 차올랐다.
현역 풋살 선수인 담당 코치님이 들어오고 간단히 몸을 풀었다. 접시 형태의 납작한 콘을 줄지어 깔고 그 사이를 지그재그, 종종걸음, 점프 등 다양한 방법으로 달렸다. 몸을 푼 후 12명 정도의 여자들이 원을 그리며 서서 공을 하나씩 잡고 제자리에서 발 안팎으로 공을 굴리며 컨트롤하는 연습을 했다. 코치님의 시범 동작을 볼 때는 엄청 간단해 보였는데 막상 하니 공이 굴러가버려 잡으러 가기 일쑤였다. 특히 두 발을 사용하는 동작은 오른발, 왼발의 순서가 너무나 헷갈렸다. 다른 분들을 보니 나와 같이 처음 온 몇몇을 제외하고는 꽤나 잘 따라 하고 있었다. 코치님은 내 마음도 모르고 계속 발을 바꾸고 동작을 변환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훈련을 쫓아가다 보니 드디어 경기 시간이 왔다.
구장이 작은 탓에 한 팀의 인원은 3~4명, 세 팀이 각 두 번씩 경기했다. 처음 본 사람들과 팀이 되어 처음 본 사람들과 겨루는 것이다. 포지션 회의나 전략 회의는 없다. 골키퍼 겸 수비수 한 명이 골대 근처를 막으면 나머지는 공격에 집중한다. 공을 가진 사람이 우리 팀이라면 옆에 기웃거리며 헤이!를 외쳐 패스를 받고 상대 팀이라면 뺏으려고 달려든다. 난 볼 컨트롤 능력은 최악이지만 러닝과 근력운동으로 다져놓은 체력으로 무조건 뛰어들어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그 덕에 정강이를 세 번이나 차이고 아주 길고 노란 멍이 생겼지만 공을 뺏었다. 비록 골을 넣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공을 뺏어온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 후로도 풋살교실의 훈련 순서는 비슷하게 진행됐다. 스트레칭 후 여러 방식의 달리기, 공 컨트롤 연습, 2인 1조로 하는 패스 연습은 매주 이뤄졌다. 주마다 달라지는 것은 기술 훈련이다. 주로 두 명이 나와 한 명이 공격, 한 명이 수비 역할을 하며 턴, 슈팅, 드리블 등 여러 기술을 연습한다. 훈련을 하며 느낀 점은 내가 공격보다는 수비를 잘한다는 것이다. 내가 공격 차례일 때는 공을 다루는 것이 미숙해 기술로 이어가기 어려웠다. 다만 수비 역할을 할 때는 상대가 기술을 시도하기 전에 뒤에서 공을 쏙 빼버렸다. 나서고 뛰어다니길 좋아하는 내 성격상 수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었는데, 예상외의 특기를 찾았다. 경기 때만 봐도 상대의 공을 뺏는 것은 잘하지 않았나! 조금 얍삽하고 약오르기는 하지만 팀에 속한다면 나름 도움이 될 능력이었다.
언제나 마지막에는 랜덤으로 짜인 팀원과 경기를 한다. 매주 오는 사람에 따라 팀도 바뀌었고 오늘의 팀이 내일의 적이 됐다. 뭔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풋살을 시작한 이유! 단합력과 뜨거운 동지애! 그것이 없었다. 경기는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인 느낌이었고 팀원은 함께 울고 웃는 동지라기보다는 같은 학원에 다니는 수강생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부담 없이 풋살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이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아쉽게 다가왔다. 그렇게 풋살 교실과는 4주간 운동을 끝으로 안녕을 고했다.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 자신감을 갖고 지역의 축구 팀 문을 두드려보겠다고 결심했다.
아직도 여자 축구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여자 축구, 여자 풋살에 관심 갖기 시작했다. 골 때리는 그녀들의 시청률은 동시간대 1위를 달리고, 풋살 팀의 입단 문의는 폭주하고, 새로운 지역에 새로운 팀이 생겨나고 있다.
김혼비의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당시 운동장을 누비던 많은 남자들이 자라서 조기 축구를 하게 되었다면 당시 운동장을 등졌던 많은 여자들은 축구와 조기 이별을 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축구를 안 한 게 아니라 기회조차 없던 것이 아닐까. 공을 차고 함께 땀 흘리는 그야말로 스포츠에 목말랐던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는 충분한 운동 경험이 필요하다. 꼭 축구가 아니라도 자신에게 맞는 방식의 운동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 더 이상 다이어트 목적이 아닌 내 몸을 위한, 유희를 위한 운동을 해야 한다. 스포츠에 있어 성별은 없다. 그저 열정과 끈기만 있을 뿐이다.
:: 글_ 환희(2021 하자 뉴스레터 객원 에디터)
이름값하며 살고 싶은 재미만능주의자 환희입니다.
욕심나는 건 뭐든 해봐야 직성이 풀립니다. 원하는 것 모두 차곡차곡 쌓아 안고 갑니다. 기록 속에 영원히 남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