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주인공의 독백으로서, 작품의 메시지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널리 잘 알려진 이 소설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지요. 멕시코만에서 어부로 생계를 이어가는 노인이 80일 이상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어느 날 엄청나게 큰 청새치가 미끼를 물었습니다. 노인은 막강한 힘으로 저항하는 그 고기와 꼬박 이틀 동안 싸워 제압한 다음 낚시줄에 매달아 끌고 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청새치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를 맡고 상어떼들이 몰려들었고, 주인공이 그들과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그들은 청새치를 먹어치워 버립니다. 결국 노인은 앙상한 뼈만 끌고 돌아오게 되죠.
그런데 이 소설에서 ‘노인과 바다’ 못지않게 중요하게 등장하는 관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고기잡이를 도와주는 소년과 노인의 신실한 우정입니다. 노인이 너무 오랫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자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다른 배로 옮겨 타기는 하지만, 소년은 노인에 대한 관심과 지지의 끈을 놓지 않지요. 노인은 여러 날 외롭게 항해하면서도 그 소년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거듭 중얼거립니다.
노인이 초췌한 육신으로 청새치의 잔해만 끌고 돌아왔을 때, 소년은 극진한 정성으로 그를 보살펴줍니다. 노인은 소년에게 그동안 다른 배를 타고 다니면서 물고기를 잡았는지 물었고, 네 마리를 잡았다는 대답에 칭찬을 해줍니다. 이에 소년은 이제 노인과 둘이 나가서 고기를 잡자고 제안하지요. 하지만 노인은 자신의 운이 다했다면서 사양합니다. 그러자 소년은 말합니다. “운이란 게 어디 있어요. 행운은 제가 가지고 갈게요” 부모님이 뭐라고 하시지 않을까 하고 노인이 걱정하자, 소년은 다시 말합니다. “상관없어요. 전 어제 두 마리 잡았어요. 그래도 아직 배울 게 많으니까 이제부터 함께 나가요.”
소년은 다음 번 낚시를 위해 챙길 물건들을 점검하다가 노인의 손에 입은 상처가 마음에 걸려 또 한 마디를 합니다. “빨리 낫지 않으면 안돼요. 전 할아버지에게 배울 것도 많고 뭐든 다 가르쳐주셔야 하니까 빨리 나으셔야 해요. 무척 고생 많이 하셨죠?” 그러면서 음식과 약 그리고 노인이 부탁한 그동안 밀린 신문들을 가지러 나갑니다. 그 이후의 마지막 장면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소년은 문 밖으로 나와 닳아빠진 산호초 길을 걸어가면서 또 울고 있었다.(...) 길 위 판자집에서는 노인이 다시 잠들어 있었다. 여전히 엎드린 채였다.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인간이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노인의 신념은 강인한 품성에서만 우러나온 것이 아닌 듯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외면하고 돌아서는 자신의 패배를 소년은 묵묵하게 응시하면서 곁에 머물렀잖아요. 소년은 물고기 몇 마리를 잡았지만, 아무 것도 잡아오지 못한 노인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면서 손을 내밉니다. 그 겸허한 믿음과 사랑이 노인의 ‘파멸’을 ‘패배’로부터 지켜준 것 아닐까요?
성장과 풍요의 꿈이 무너지고 수많은 삶이 파멸로 치닫는 지금, [노인과 바다]는 다시 읽힙니다. 혼신을 힘을 쏟아 붓고 안간힘으로 버티었지만 앙상한 뼈다귀만 손에 넣게 된 노인처럼 생존 투쟁에서 무모하게 밀려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절실한가. 체제와 타인들이 규정하는 패배를 스스로의 운명으로 내면화하도록 압박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존귀함은 어떻게 지탱될 수 있는가. 깊은 연결을 통해 생명의 기운을 회복하고 삶의 이유와 보람을 빚어가는 만남은 어디에서 가능할까. 지속가능한 세계를 탐색하며 도전하는 지구촌 시민들은 그런 질문들에 몸과 마음을 모으고 있다고 봅니다.
지난 2년 동안 하자마을의 주민으로 일상을 보내면서 저는 그 구체적인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잔혹한 현실에 압도되지 않고 또 다른 미래로 발걸음 내딛는 용기와 힘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배움의 기쁨’으로 ‘삶의 기술’을 연마해가는 탁월함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고요. 그 배움의 열망은 제도, 나이, 국가, 전공 등 여러 가지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면서 우리의 시야와 가능성을 넓혀주어 왔습니다.
제가 하자마을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삶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기쁨의 에너지를 잃지 않는 지혜입니다. 체제에 대립각을 세우고 부조리에 항거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심성이 거칠어지고 생활이 삭막해지기 일쑤입니다. 다른 한편, 마음을 돌보고 가꾸는 작업에 충실하다 보면 비리와 폭압으로 얼룩진 상황들을 외면하기 쉽지요. 그런데 하자마을 친구들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더군요. 서밋, 추모회, 졸업식 등의 행사나 의례에서 만나는 얼굴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의연하게 맞짱뜨는 기개가 꿈틀거리면서도 서로를 아끼고 자기를 보살피는 미덕이 표정에 가득하거든요.
그 비결이 어디에 있을까. 바로 몸이 아닐까요. 손수 물건을 제작하고, 요리도 하고, 함께 음악을 연주하며 춤을 추고, 어린 아이들을 돌봐주고, 햇빛을 만지며 농사를 짓는 움직임이 우리를 생명의 근원으로 이끌어주니까요. 그 수고의 결실을 나누고 더불어 성장하는 시공간에서 새로운 존재로의 모험이 다양하게 펼쳐지니까요. 십시일반 정성으로 일궈가는 무형의 자산이 든든하기에 우리는 사소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요.
저는 지난 해 가을 얼마 동안 매우 힘든 일을 겪게 되었는데, 울고 싶을 때 하자센터 본관의 옥상에 몇 번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자라나는 작물들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거기에 깃든 손길들을 느끼며 위로 받았습니다. 작은 정원 하나가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되던지요. 그 호젓한 텃밭에서 재생의 기력을 충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올라가면 그 눈물겨운 순간이 되살아난답니다. 제 생애에 그렇듯 멋진 쉼표와 느낌표로 그려진 장소 하나를 선물해주신 하자마을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계속 이어갈 여정에 가슴 설레면서 시 한 편을 낭송해봅니다. 자기 집의 옥상에서 직접 식물들을 심어 키우며 살아가는 조병준 시인의 ‘기쁨의 정원’입니다.
중요한 건 살아서 기쁨의 정원 하나를 시작하는 일이지 씨앗은 이웃의 정원에서 훔쳐도 돼 이웃들은 눈감아줄 거야 정원을 누려본 사람들은 알고 있지 그것이 얼마나 떨리는 도둑질인지를 무엇이 씨앗들을 눈뜨게 하는지를
중요한 건 살아서 기쁨의 정원 하나를 열어두는 일이지 작은 새보다 더 빠르게 뛰는 가슴으로 숨어들어와 씨앗 조금을 훔쳐가는 이웃을 볼 때 눈길 돌려 먼 하늘을 바라봐주어야 해 잠든 씨앗을 깨워 기쁨의 정원 하나를 시작하는 길은 그것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