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2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중 일부를 구독자분들과 나눕니다.
11월의 글감은 저희 후속모임명인 <파프리카>에 관한 글입니다. 지난해 봄 하자글방에서 만난 저희는, 우연히 서로가 가져온 파프리카를 나누면서 모임명을 ‘파프리카’로 정하게 됐어요. 올해는 각자 바쁜 일상과 사는 곳이 다르다는 이유로 1년에 몇 번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유지되는 우리의 관계에 대한 글로 한 해를 마무리해 보고자 했습니다.
이번 글을 통해 각자의 일 년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떠올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따뜻하고 건강한 연말이 되시길 바라요!
- 하자글방 죽돌 어진
조심해 = 사랑해
** 제목은 은노래 시인의 < #_#! (조심해=사랑해) > 시에서 가져왔습니다.
정체 모를 우울이 나를 뒤덮기 시작할 때, 빠른 속도로 몸 구석구석에 독소가 쌓여가는 것이 느껴질 때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전화를 거는 일. 휴대폰 스피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몸을 꽉 조이던 우울이 느슨히 풀리는 것을 느낀다. 정신과 약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친구들은 항상 해낸다. 그러니까 친구들은 내 주치의다. 이 선생님들, 나에게 진단도 처방도 내리지 않는다. 병명이나 약 같은 걸로는 나를 낫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테다. 본인들도 아파서 그런 건가. 대신 이 이상한 선생님들은 나를 다른 시공간으로 훌쩍 데려다 놓는다. 하자센터 2층으로, 한낮의 양화한강공원으로, 망원동 와인바로, 역곡 자취방으로, 후쿠오카 이자카야로. 그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내가 그간 무엇 때문에 그렇게나 힘겨웠는지 왕왕 잊어버린다. 선생님들과 하는 일이라고는 맛있는 거 먹으며 조잘조잘 떠들다가 우하하 웃는 것밖에 없는데 이상하게 괜찮아진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하고 있는 것 같고, 아무것도 만든 것 없지만 이미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언젠가 만들어낼 것이 우리와 닮은 누군가를 낫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데 하나도 불안하지 않다. 이 기분이 영원할 것이라고 깜빡 속는 게 좋다. 하지만 전화는 언제나 그랬듯 안녕, 그래 안녕, 하고 끊길 것. 그러니 괜한 걱정은 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