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에 나는 종종 E와 통화했다. 오랜 친구인 E와는 많은 것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저 우리가 오랜 시간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그맘때쯤 나는 불명확한 대상을 향해 분노하고 있었다. E에게도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용서할 수 없어” E는 네가 무엇을 용서할 수 없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최대한 설명하려고 했지만 뭉툭하고 커다란 얘기만 늘어놓았다. 역시나 E는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네가 용서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고. 확실히 용서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감이 있다. 상대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야 가질 수 있는 권한이니까. 내가 그것을 가질 만큼,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한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이 분노는...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는 E에게 그것에 대해 더 설명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자꾸만 끝이 뭉툭해졌다.
E와의 통화 며칠 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다. 팽팽하게 당겨 잡던 줄이 툭 끊기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 3년 동안 내 안에 켜켜이 쌓인, E에게는 끝내 설명하지 못했던 이름 모를 덩어리들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과 분노는 아마 이것을 향해 몸집을 키우고 있었으리라. 그날의 계엄은 시민들이 국회로 달려가 계엄군의 국회 진입을 막은 덕분에 6시간 만에 해제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어진 겨울엔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거라고 여겼던 20세기의 유산들이 흔들렸고, 그 유산을 축대 삼아 쌓아 올리던 21세기의 가치들이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E에게 다시 전화하고 싶었다. 내가 그때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것들이 어쩌면 이거였던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소명되지 않은 의문이 하나 남아있었다. 그것들이 왜 너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황정은의 소설 <디디의 우산>은 2016년 촛불 광장이라는 근현대사적 중심부를 둘러싼 개인의 삶을 그린다. 각 소설의 주인공 D와 서수경이 어떤 삶을 살다가 광장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러니까 그들이 무엇으로부터 그곳에 왔는지. 황정은은 그 모든 작고 커다란 이야기를 단숨에 엮어 버려서, E에게 나와 그것들의 관계를 설명하려던 내 노력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만큼은 분명해진다… 지난겨울 내가 경험한 광장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소설만큼 단숨에 해내지는 못하더라도, 사실 광장은 내내 그것을 시도하는 자리였다. 발언대에 올라갈 용기가 없는 나를 대신해 우리가 어떤 세상사를 용서할 수 없어서 이곳에 왔는지 이야기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혹은, 온갖 잡스러운 이름의 깃발들을 이고 지고 나와 박자에 맞춰 흔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중국인, 개딸, 키세스, 기특한 애들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렸지만 그중에 진짜 그들의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무엇도 무엇도 아닌 채로 스스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지난겨울에 있었던 일을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 일이.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별의별 깃발들이 흔들린다. E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눈에 잘 담아두었던 광경이다. 어떤 이름으로도, 어떤 서사로도 한 번에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잠시 모였던 광장으로 E에게 뭔가를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왜인지 이미 설명된 기분이다.
글 · 사진_ 몽(하자글방 죽돌)
2023년 봄학기 하자글방 후속모임 〈파프리카〉는 앞으로의 지속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한 달간 글쓰기를 진행하였고, 그 여정을 마무리하며 모임에서 나온 글을 ‘From. 하자글방’에 기고합니다.
From. 하자글방
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3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가운데 일부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