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2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중 일부를 구독자분들과 나눕니다.
1월의 글감은 ‘실패와 재발명’입니다. 지난 하자글방에서 저는 2023년의 키워드로 ‘실패와 재발명’을 꼽았는데요. 글방 동료들에게도 실패와 그 자리에 새롭게 돋아나는 재발명의 사건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실패부터 처절한 실패도 좋고요. 내게만 실패처럼 여겨지는 무엇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왜 그것을 실패라고 명명하게 되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왜 ‘실패’ 옆에 ‘재발명’이 따라오는지도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실패와 동고동락하는 방법으로 실패를 전유하고, 실패의 다른 이름을 발명하는 일이 제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을 때, 실패의 선택지만이 남을 때가 분명 있으니까요. 정초부터 실패라니! 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에 대해서 실컷 떠들면서 다가올 실패를 대담하게 맞이해봅시다.
- 하자글방 죽돌 사라
방을 재발명하려면
옷가지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는 나의 방. 여기저기서 굴러들어 온 책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나의 방. 제때 버리지 못한 쓰레기 봉지가 한켠에 오도카니 기대어 있는 나의 방. 더러운 방, 나의 실패를 상징하는 방. 나는 이곳을 완전히 재발명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책장에는 자주 보거나 보고 싶은 책들만 차분히 꽂아두고, 책상은 깔끔하고 편안해서 언제든 앉고 싶게 만들겠다고. 이부자리는 단정하게, 바닥은 머리카락 하나 없이 하겠다고.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나는 깨달았지. 좋은 방이란 그런 것이 아니더라. 실패한 방을 깔끔하게 재발명하겠다는 다짐은 방을 박제할 뿐이었어. 나는 그곳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고, 결국 박제된 것은 다시 허물어지기 마련이지. 그래, 나는 방을 박제할 것이 아니라 보살펴야 했던 거야. 내가 발명해야 했던 것은 완벽한 방이 아니라 방을 위한 좋은 습관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방이 아니라, 방에 얽힌 내 삶을 발명해야 했던 거야.
하지만 삶의 실패 앞에서 발명이란 말은 얼마나 순진한지. 우리에게 발명가의 대명사는 에디슨, 벨,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이잖아.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욕망할 만한 새로운 것을 꿈꿨던 사람들. 그래서 마침내, 이들이 ‘발명가’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는 것은, 구체적이고 분명한 유형의 것을 사람들 앞에 보여줬을 때가 아니었니. 마치 내가 대청소를 마치고 완전무결하게 박제된 방을 만들어 냈을 때처럼 말이야. 이런 식이라면 내 삶에서 발명가가 될 기회는 죽음 앞에서야 겨우 얻을 수 있을 뿐일 텐데.
그렇다면 환상을 조금 내려놓을 수밖에. 기실, 아이디어가 실체 있는 사물로 구현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제대로 작동하려면 보이지 않는 무수한 연결이 필요하지. 전기도 없고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 무인도에서라면 내 아이폰이 무슨 소용일까. 반나절이면 배터리가 닳아버리고 말 텐데. 오프라인으로 저장해 둔 몇 안 되는 글을 읽고, 노래를 듣다 보면 곧 향수 어린 문명의 우상 정도로 남겠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사라진 무수한 발명품이 얼마나 많겠니. 결국 발명은 언제나 유형의 실체를 만들어 내는 것을 넘어, 그것이 작동하는 세계를 조립해 내는 일이었어. 깔끔한 방이 아니라 그것이 지속 가능해지는 조건을 만들어야 하듯이.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조립된 세계를 교란시켜야 해. 다만 내 삶에 있어서의 문제는, 기존의 세계를 지키는 파수병 역시 나 자신이라는 거야. 나와 적대하는 일이지. 그리고 나와 적대하는 일은 강한 확신을 요구해. 하지만 내게는 어떤 확신도 충분히 강하지 못한걸. 때로는 내가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의 중력이 너무 강하고, 때로는 우연히 만들어지는 세계의 가능성을 그저 관찰하고 싶어서 힘을 쭉 빼곤 하지. 결국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나를 배신한다는 생각이 들고.
무지출부터 미라클모닝까지, 온갖 챌린지가 만연한 것은 그 확신의 원천을 집단에 의탁하기 위해서일 거야. 그러나 그걸 의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한 것 같아. 기존의 세계도 다른 존재들과의 연결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집단적이잖아.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의해 습관화된 삶의 특성들에 ‘나다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아닐까. 어쩌면 삶의 재발명을 방해하는 것은, 기존의 세계에 ‘나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집착하게끔 만드는 ‘나’에 대한 좁은 상상력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나는 삶의 불확정성에 ‘나다움’을 얼마나 개방할 수 있을까, 깨지고 허물어진 ‘나다움’의 조각들로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조립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