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2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중 일부를 구독자분들과 나눕니다.
1월의 글감은 ‘실패와 재발명’입니다. 지난 하자글방에서 저는 2023년의 키워드로 ‘실패와 재발명’을 꼽았는데요. 글방 동료들에게도 실패와 그 자리에 새롭게 돋아나는 재발명의 사건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실패부터 처절한 실패도 좋고요. 내게만 실패처럼 여겨지는 무엇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왜 그것을 실패라고 명명하게 되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왜 ‘실패’ 옆에 ‘재발명’이 따라오는지도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실패와 동고동락하는 방법으로 실패를 전유하고, 실패의 다른 이름을 발명하는 일이 제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을 때, 실패의 선택지만이 남을 때가 분명 있으니까요. 정초부터 실패라니! 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에 대해서 실컷 떠들면서 다가올 실패를 대담하게 맞이해봅시다.
- 하자글방 죽돌 사라
올해의 실패, 슬픔 꺼내놓기
타인과 슬픔을 나누는 데에 실패했다. 나누지 못한 슬픔이 있다. 굴러굴러 뭉쳐져 어디서부터 꺼내 보여야 할지 모르는 나의 슬픔들. 그렇다면 그 슬픔은 나누어야 하는 것일까. 친한 친구와 나눈 이야기. ‘나는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으면 슬프다? 너는 어떨 때 슬프니’, ‘……’, ‘너는 슬픔을 이야기하지 않는구나’ 나는 거기에 장난스럽게 ‘나 욕심 많아. 내 슬픔을 절대 나눌 수 없어’라고 답하였다.
나의 슬픔을 온전히 나만 누릴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고 내가 말하는 ‘어’와 네가 말하는 ‘어’는 다르겠지.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 나의 무한한 슬픔이 네게로 가면 단지 하나의 이야기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 싫다. 그렇기에 나 혼자 그 슬픔을 온전히 누리려는 것이겠지. 서로가 느끼는 슬픔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에. 어떠한 반응을 기대해야 할지조차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타인이 나에게 슬픔을 건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나는 그들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섣부른 공감이 아닌 묵묵히 들어주는 편을 택하였다. 여기에 기대. 나는 너의 슬픔을 온전히 알 수는 없겠지만, 너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은 더 알아갈 수 있을 테니.
연말에 갔던 콘서트에서, 유독 다르게 들렸던 노래가 있다. 음원은 담담하고 건조하였으나 이번 연주에서는 오케스트라의 반주와 함께 시작하여, 웅장함이 덧대어진 무대였다.
"슬픔이여 이제 안녕.
다신 나를 찾지 말아 줘.
너를 떠나 살 수 있을까
나의 가장 오랜 벗이여
나는 네가 없이는 내가 아닐 것 같아."
슬픔이여 이제 안녕(자우림, 2013)
‘여러분들의 슬픔을 저희에게 주세요, 우리는 그 슬픔을 음악으로 만들게요.’
이런 사람에게는 슬픔을 기꺼이 건네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는 나의 슬픔이 가볍게 치부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노래를 되뇌었다.
어떠한 슬픔은 단지 위로만으로 위안이 되지 않으며, 위안을 기대하지 않는 슬픔이 있다. 내가 간직해야 하며, 나만이 간직할 수 있는 그러한 것들. 나는 믿는다. 이러한 슬픔은 나를 나로 만들어 준다고. 이러한 슬픔만이 비로소 타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고. 나는 덧붙여 말해본다. ‘내 것도 내 거, 네 것도 내 거!’ 그러니까 탐내지 말라고~~
이 사진에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물을 흘린다던 친구가, 눈물을 흘렸던 순간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