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떡 일어나 선반에서 강력 쌀가루와 설탕, 소금, 이스트를 꺼낸다. 멍하니 30분째 흰 바탕에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다가 크림빵을 만들기로 한다. 요즘 나의 사고 회로는 이런 식이다. 시간이 나면 주방으로 향하고 머릿속에선 늘 무엇을 만들지 고민하고 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온통 레시피 영상으로 도배된 지 오래다. 크림빵은 2박 3일간 수련원 스탭 알바를 하며 집에 가고 싶을 때마다 적은 위시리스트 중 하나였다. 노트북의 한글파일을 끄고, 유튜브를 킨다. ‘만들자’ 재생목록 중 미리 봐둔 쌀 크림빵 영상과 비건 파워블로그의 크림빵 레시피를 켜둔다. 오늘은 이 두 가지의 레시피를 혼합해 만들 생각이다. 저울에 스테인리스 볼을 올려 가루들을 계량한다. 가루류를 휘적휘적 섞으니 텁텁하면서도 달달한 향이 올라온다. 영상에서는 15분 동안 손반죽을 하라 했지만 벌써 헬스장에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몇 번만 반죽을 손으로 눌러 접어준다. 크림을 위해 두유와 전분, 설탕을 냄비에 넣고 저어 원하는 농도로 만들어 두고 후다닥 집을 나선다. 요리를 할 때면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
요리를 하다 시계를 보면 30분 1시간이 후딱 지나가 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접속했다가 나오는 것처럼.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이라는 일드에는 생각이 복잡하거나 불안할 때면 왕창 요리를 하는 타카하시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집에는 두 명밖에 살고 있지 않은데 자기도 모르게 4인분을 만들거나 다섯 가지 이상의 메뉴를 만든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때는 그저 주인공을 더 개성 있게 보이는 설정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타카하시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작년 9월,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는 매일 같이 요리를 했다. 요리할 의욕이 들지 않더라도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갔다. 요리할 의욕이 들지 않더라도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갔다. 무슨 요리를 할지 고민하며 냉장고에서 채소를 꺼내고, 기름에 채소가 볶아지며 나는 달큰한 향을 맡았다. 그때쯤이면 분명 배가 고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사각, 서걱, 스윽, 힘을 다르게 주어 재료들을 썰고, 압력밥솥에서 나는 구수한 밥 냄새를 맡고, 완성된 요리와 어울리는 그릇을 골랐다. 그러다 보면 둥둥 떠 있던 발이 다시 땅에 닿는 기분이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막연한 불안감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반죽이 3배나 부풀어있다.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푸욱 들어가는 게 구름빵이 실재한다면 이런 촉감일까 싶다. 카카오 파우더와 아까 만들어둔 꾸덕한 두유 크림을 넣어 섞기 시작한다. 최애 비건 빵집에서 맛보았던 궁극의 초코 크림을 떠올리며 설탕과 카카오 파우더를 계속해 추가한다. 이것저것 넣어보다가 초콜릿 칩을 넣어본다. 한입 떠 맛을 보니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초코칩이 중간중간 씹혀 달달한, 내가 찾던 완벽한 초코 크림의 맛이다. 흐흐흐 뿌듯한 마음으로 완성된 크림을 얇게 핀 반죽 위에 올린다. 만두를 빚듯 접합부를 잇다. 아! 문뜩 오븐에 생크림이 들어가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친다. 불길함에 은결이에게 전화를 걸어 묻자, 한숨 소리부터 들려온다. (이하 생략) 오븐을 170도로 25분을 맞추고, 크림을 넣지 않은 나머지 빵을 넣는다. 은결이가 아니었다면 모든 빵을 다 날릴 뻔했다. 똑딱똑딱똑딱 미니 오븐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은결이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동네 친구이다. 15년을 봤지만, 부쩍 가까워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현실적이고 계획적인, 꽤나 직설적인 은결이를 볼 때면 나와 썩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둘 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자주 밥을 같이 먹게 되었고, 음식에 관해선 아주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어느새 매일 안부를 묻고 서로의 집을 오가는 유사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다. 둘 다 집에 있다면 보통 점심쯤 전화로 무엇을 먹을지 이야기하고, 저녁쯤 함께 밥을 먹으며 하루치 안부를 나눈다. 뭐가 힘든지, 즐거운지, 웃기는지부터 어제 본 릴스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밥을 다 먹으면 조금 늘어져 있다가 때가 되면 결심한 듯 빠르게 뒷정리를 한다. 부른 배를 잡고 돌아오면 채워진 건 허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가족은 핏줄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이 쌓여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띵! 곧 다 구워졌다는 신호가 들려온다. 오븐을 열자 갓 구운 빵 냄새가 풍겨온다. 이제 마무리 작업만 남았다. 젓가락으로 빵 가운데에 구멍을 내고 이리저리 돌려 공간을 만든다. 지퍼백 안에 든 크림을 쭈욱 짜 구멍으로 주입한다. 크림이 들어가며 빵이 풍선처럼 부푸는 게 재미있다. 완성된 크림빵을 가장 간절히 기다린 사람부터 나눠준다. 살짝 짭조름하고 쫄깃한 쌀빵과 달달하고 부드러운 크림이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다섯 개의 크림빵 중 세 개는 가족들과 나눠 먹고 두 개는 은결이에게 줄까 하다가 시위하러 가는 엄마에게 싸주었다. 행진을 하다보면 쉽게 지치니 달달한 크림빵이 힘이 될 것 같았다. 다음번엔 더 넉넉히 만들어야지 결심한다.
음식을 만들며 내게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생기는 게 좋다. 마음을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것에 서투른 내게 대신할 수 있는 언어가 생긴 것만 같다. 친구가 힘들어하고 있을 때 어떤 말이 도움이 될지 몰라 입을 닫아 버리곤 했는데 이제는 따끈한 빵을 굽는다. 말없이 꼬옥 안아주는 포옹이 되기를 바라며.
글_ 워나(하자글방 죽돌)
디자인_ 물고기(하자글방 죽돌)
2023년 가을학기 하자글방 후속모임 〈은는이가〉는 구성원의 변화를 앞두고 그간의 활동을 기념하고자 진(zine)을 쓰고 엮었습니다. <닿은 마음이 쓰는 우리가>(줄여서 은는이가)라는 제목처럼, 독자의 두 손에 닿기까지 〈은는이가〉의 우정 어린 글쓰기의 여정이 담긴 진은 손수 한 땀 한 땀 제작되었습니다. 글쓰기 공동체로서 죽돌이 스스로 글감과 마감을 굴리며 만든 작지만 큰 세계입니다. ‘From. 하자글방’에서는 진에 실린 글 일부를 소개합니다.
From. 하자글방
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3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가운데 일부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