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일의 준비 끝에 3.11 당일이다. 11시 45분. 아슬아슬하게 지하철 광화문역에서 나와 벌써부터 거리에 깔린 수많은 인파를 피해 세종대왕상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6년 전, 옆 나라 일본에서 후쿠시마 제1원전이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폭발한 날이다. 여기 하자작업장학교 사람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원전사고 피해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또 앞으로 그런 재앙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매년 3월11일 한자리에 모이는데, 올해는 내가 그 자리에 왔다.
하자작업장학교에서는 신입생들과 졸업생들을 포함한 모든 학생들(또는 죽돌들)이 참여해 오늘 퍼레이드를 진행한다. 팀별로 원전, 전기괴물, 해골, 송전탑 등 방사능이 낳은 괴물(이하 방낳괴) 들을 직접 제작해서 광화문 주변 도로를 돌며 퍼포먼스를 펼칠 예정이다. 신입생인 나는 원전팀에 들어갔다. 원전팀에는 나를 포함해 니나, 자연, 하야시, 데퓌, 곰, 드레, 소라, 하루가 있었고, 이 중 대부분은 본행사에서 다른 팀의 유닛으로 참가하게 되어 나와 원전을 끌게 될 세슘맨/-우먼은 니나, 자연, 데퓌였다. 아! 그리고 원전 내부에 들어갈 마성까지.
세종대왕상 앞에서는 원전 조립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원전팀의 작업이 늦어져서 바로 전날까지도 작업했기 때문에 구루마 덮개, 원전의 눈 등 점검해야 할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구루마에 들어가서 덮개를 케이블 타이로 잇는 작업을 시작했다. 좁은 내부에 혼자 들어오니 안으로 들어오는 바깥소리가 선명해졌다. "이게 뭣이여?"하고 직설적이게 묻는 어르신도 있는가 하면 "탄핵이 아니라 탈핵?"이라며 의아해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오늘은 박근혜가 대통령에서 탄핵된 다음날이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탄핵이 아니라 탈핵
나는 오늘 세슘맨이다. 온통 검은색의 옷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피폭된 얼굴을 한 탈을 쓰고 행렬의 앞부분에서 원전을 호위하는 게 세슘맨의 임무다. 솔직히 말해서 2주 동안 들어온 설명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어떤 타이밍에 내가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마냥 신났다. 휴식시간에는 검은 후드티 위에 눈에 띄는 흰색 패치를 검은 테이프로 덮으면서 김밥을 먹었다. 먹으면서 그닥 떨린다거나 걱정이 되진 않았다. 하다보면 타이밍을 알게 될 거라고 자연이 얘기했으니까. 마냥 신났다.
얼마 후 텔레그램에 곧 반대편에 있는 무대에 올라가야 한다는 공지가 떴다. 나는 다른 죽돌들을 따라 좁은 무대 위에 올라갔고, 사람들 앞에서 다 같이 안무와 함께 '탈핵하자'를 외쳤다. 그러나 무대 아래서 지켜보던 시민들은 따라 외쳐야 할 '탈핵'과 '하자' 부분에서 약간의 망설임을 보였다. 20주째 광화문에 모여온 그들이지만, 어째선지 새로운 구호에 어색함을 보였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탄핵이 아니라 탈핵, 분노와 좌절이 아닌 행복과 평화에 낯설어하는 건 학교에 나온 지 2주가 된 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분노에 차있다. 책임감 없는 대통령과 그녀의 친구 한 명에 의해 나라가 흔들렸고 거기에 수많은 국민들이 피눈물을 흘렸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분노를 품고 박근혜, 최순실의 몰락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앞으로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노래하는 하자작업장학교 사람들에게 감동을 느꼈다. 사실 눈물이 날 지경이다.
우린 편리를 위해 너무 많은 걸 잃었다. 돈보다 생명을 소중히 하지 못해서 노란 리본을 달고 촛불을 밝힌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나는 한국에 놀러 왔다가 마음에 큰 짐을 안고 간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정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막막하기만 해서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빨리 정부가 세월호 유가족들의 짐을 덜어 주길 바라며 집회도 나가고, 서명도 해봤다. 그러다가 최근 나는 큰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우리나라 대한민국 전체가 사실은 침몰 직전의 세월호였다는 것이다. 뉴스에서 보도되고 미디어로 알려지는 것과 다르게 실상 대한민국은, 수명을 다한 핵발전소를 가동하는 미친 선장이 키를 잡고 있었다. 바로 옆 나라 일본이 그 아픔을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내가 처음으로 하게 된 행동이 바로 오늘의 퍼레이드다.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침몰하지 않게 하기 위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지구를 지켜라
퍼레이드가 곧 시작된다. 자연과 니나가 원전 뒤에서 바퀴를 굴려 줄 거고, 나와 데퓌가 앞(양옆)에서 원전을 호위하는 시늉을 하게 된다. 우리의 원전은 행렬의 앞부분에 위치했다. 바로 뒤에는 해골팀이 있었는데, 바로 전날 원전팀에서 해골팀으로 강제 이적(?)한 하야시가 큰 해골의 몸통을 지탱하는 모습이 보였다. (참고로 하마터면 내가 그걸 할 뻔했다) 출발하기 몇 분 전 자연한테 전화를 빌려 엄마와 통화를 했다. 날 보러 온다고 하셔서 행렬 앞쪽에 원전 모양을 보고 찾아오라고 말은 했는데, 과연 멀리서 보고 원전으로 알아볼지 걱정됐다.
"뿌우우우우"
에듀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사실 이분들의 연주도 여기 와서 처음 듣는데, 과연 타이밍에 맞춰서 퍼포먼스를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을 안고 원전이 출발했다. 뒤이어 해골들과 호모 사케르들도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선선히 불고 한 편으로는 차가 쌩쌩 다닌다. 우리가 도로를 전부 다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초반엔 원전이 좁은 길에서 똑바로 움직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나중이라고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해골팀의 퍼포먼스와 동선이 겹치기도 했고, '지진'이라는 이벤트를 할 때도 진짜 지진같이 원전을 흔들었어야 했는데 너무 바람에 흔들리는 허수아비 같았다. 또 중간에 장소익 감독님이 "원전도 한 번 놀자!"라고 하셔서 냅다 뛰었는데, 어디까지 갔다가 돌아와야 할지 몰라서 계속 가다가 경찰에 의해 멈춰 서는 등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우리의 원래 목적인 '지혜'를 얻는다는 점에서는 이번 퍼레이드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예상보다 주변에 시민들이 적고 자동차나 경찰들이 많았다. 가끔 큰 버스에 가려질 때 쉴 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래도 내가 기대한 퍼레이드와는 달리 휑해서 아쉬웠다.
예정되었던 루트를 다 돌고 다시 광화문 도로로 돌아왔다. 원전이 멈추고, 한쪽에서 마무리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마스크와 후드를 벗었더니 머리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즐거워서 휴대폰을 꺼내 주변에 있던 몇몇 죽돌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엄마를 발견했다. (처음부터 계속 따라오셨다고 한다) 니나와 자연은 같이 원전 끌다가 중간에 무대에 오르기 위해 먼저 갔었는데, 잠시 뒤 전광판에서 그 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더 큰 무대였다. 그곳에서 또 한 번 '탈핵하자'가 들리자 나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나비들은 자유롭게 비행했고 핵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것으로 마무리 세레모니가 끝났다. 우리의 원전은 송전탑들을 따라 세종대왕상 앞으로 도망치든 퇴장했다. 이것으로 2주 동안 준비해온 퍼레이드 본 행사가 끝났다. 막 입학한 신입생의 첫 활동으로는 정신없고 혼란스러울 수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 이번 퍼레이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3년 전과 다르게 희망적이었다. 이번 퍼레이드로 탈핵을 기대하기에는 아주 작은 행동일 수 있지만, 내게 있어서는 큰 변화인 것 같다. "우리나라가 탈핵을 하면 내 덕이야"라고 누나에게 자신감 있게 말해둔 보람이 벌써부터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