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영화 잘 봤습니다
무사히 도착하는 영화더군요
도착하는 줄 모르게 도착한다는 점이 가장 좋았어요
출발하는 줄 모르고 출발하는 것처럼
죄다 끝나버린다는 걸 모르고
자꾸 살자고
자주 살아있자고 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저는 좋아요
유령 같아요
건망증이 심한 유령이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왕왕 잊어버리는
잊어버리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
기웃거리는
비슷하게 생긴 얼굴들을
쓰다듬는
그런 유령
우습게
가난한 얼굴들
매일 버려지는 얼굴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유령
그런데요 감독님
아
뭐 말하려고 했더라
감독님 저 생각이 안나요
생각이 안나요
그래서 우리 무슨 얘기 하고 있었죠
아 맞아요 감독님
감독님 영화 잘 봤다구요
(2025.6.1.)
ⓒ파울 클레, 건망증이 심한 천사, 1939
글_ 서로(하자글방 죽돌)
2023년 봄학기 하자글방 후속모임 〈파프리카〉는 앞으로의 지속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한 달간 글쓰기를 진행하였고, 그 여정을 마무리하며 모임에서 나온 글을 ‘From. 하자글방’에 기고합니다.
From. 하자글방 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3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가운데 일부를 나눕니다.
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3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가운데 일부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