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책방 책모임 “채식 한 권”에서는 <사랑할까, 먹을까>를 쓰고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찍은 황윤 감독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참가자 모집에 앞서, <사랑할까 먹을까>를 읽고 쓴 칩코의 리뷰를 나눕니다.
* 참가자 모집은 10월 1일 오픈 예정입니다. 마을책방 인스타그램 @bookcafe.haja 프로필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10월 12일 토요일, <채식 한 권>에서 황윤 감독님을 하자로 초대한다. 마을서당에서 3시부터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상영한 후, 늦은 7시까지 도서 <사랑할까, 먹을까>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잡식가족의 딜레마>는 ‘농장동물’ 대량 살처분 사태에 맞서 공장식 축산 문제를 크게 이슈화해낸 영화다. 이후 나온 책 <사랑할까, 먹을까>에는 다큐멘터리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담겼다. <사랑할까, 먹을까>가 가진 다른 동물권 책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 책은 아주 여성주의적이라는 점이다. 공장식 축산의 문제에 대해 나열하는 구호로 가득 찬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그 문제를 저자의 가정 내로 끌고 온다. ‘사랑하기’로 결정한 황윤 감독님이 ‘사랑할까, 먹을까’ 고민 중인 남편과 아이와 한 식탁에 앉으며 일어나는 딜레마들. 나 역시도 겪었지만, 내겐 아직 미제로 남은 딜레마였다.
비건이 된 이후, 나는 내가 왜 비건이 됐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적부터 비건이라고 했다. ‘얼굴이 있는 존재’는 먹기 싫다는 이유로 채식을 고집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구제역 살처분 노동에 동원되었다가 비건이 되기도 하고, 우연히 농장을 방문했다가 동물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비건이 된 이유는 좀 시시했다. 나는 피터싱어의 <동물해방> 책을 읽고 비건이 됐다. 도서관에서 운명적으로 집어들은 책도 아니고, 교수가 읽어오라고 한 책이었다. 나는 축사 근처에서 자란 적도, 농장을 방문한 적도, 집에서 ‘가축동물’을 기른 적도 없고, 제인 구달처럼 어릴 적부터 동물과 노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도, 황윤 감독 같은 모부 밑에서 자란 아이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내가 비건이 된 이유를 듣고 나면 영 심심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생각해도 내 삶의 방식을 모조리 바꿔야 하는 선택치고는 계기가 마뜩찮았다. 난 ‘가축동물’과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 같아 보였다. 실로 내가 책을 읽고 그들의 고통에 크게 공명했다고 하기엔, 난 정말 무통(無痛)지대에서 살았다. 마트와 정육식당엔 우리의 죄책감을 지워주는 수많은 장치들이 있고, 학교에선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은 커녕 그 존재 자체도 말해주지 않는다. 나는 ‘가축동물’과의 연결점을 모두 차단한 ‘멸균실’에서 자란 셈이었다. <사랑할까, 먹을까>에서는 공장식 축산이 한국 사회에 어떤 ‘고기 디스토피아’를 초래했는지를 말한다. 내가 서 있던 ‘멸균실’에도 육식 자본주의의 칼바람이 수차례는 다녀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학교 때, 신종플루가 유행했었다. 학교에 환자가 한 명 발생했다는 소식이 돌자, 며칠간의 휴교일이 주어졌다. 바이러스가 왜 발생하는지도 모른 채, 집에 박혀서 소젖에 시리얼을 말아먹었던 것 같다. 신종플루의 정체가 돼지독감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다. 정부는 밀집 사육으로 바이러스가 창궐한 그 와중에도, 축산공장들의 수익을 위해 신종플루라는 말로 돼지를 가렸다. 해가 거듭할수록 더워지는 여름이나, 봄마다 차던 마스크가 점점 두꺼워지는 것, 닭알에 묻은 살충제 파동, 바이러스 예방을 표방한 대량 살처분, 공장을 탈출했다가 사살당한 소, 분뇨로 인한 유독가스로 질식사한 축산 노동자 등의 이슈들은 모두 ‘고기 디스토피아’의 발현이었다. ‘가축동물’과 아무 연관도 없다고 느꼈던 내 삶은 사실 공장식 축산의 한복판에 있었다. 가해의 페달을 함께 돌리면서.
배설물에 뒤덮여 각종 항생제, 피부질환제, 호흡기치료제, 발정제 등을 투약 받으며 살아가는 동물의 삶과 본인의 삶을 연결 짓지 못하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다. 우린 다른 생명과 연결될 기회를 차단당한 채 살아간다. 그러니 비건이라고 하면 유난스런 '동물 애호가'라거나, 드라마틱한 전환 계기가 있었다고들 생각하는 것이다. 황윤 감독은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비인간동물로부터 부름을 받아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본인이 쓰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사랑할까, 먹을까>는 동물의 고통을 전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메신저’ 역할을 가정 내에서 수행하면서 생기는 딜레마가 담겨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비건이 되면 이 문제에 봉착한다.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먹지 못하게 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 모두의 삶이 연결돼 있다는 것을 전달할까.
책에서 황윤 감독은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해결했다고 했다.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하게 되진 않았지만,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게 된 것이 큰 변화라고 했다. 난 아직 잘못인 줄 알면서도 논비건들이 미울 때가 많다.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게 되더라도, 같은 선택이 아니라면 죽음 뿐’ 식이다. 그러나, 나 역시 <동물해방>을 권한 교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비건이 아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콜린 캠벨 박사는 ‘슬기로운 채식생활’ 팁을 몇 가지 제시한다. ‘내가 변화한 여정을 잊지 말 것. 나 역시 얼마 전까지 육식을 했음을 잊지 말 것’, ‘큰 변화는 작은 변화들의 총합임을 잊지 말 것’ 등의 팁이다. 논비건들을 비난하는 날 보고 비인간 동물들은 ‘너도 똑같아’라고 하지 않을까. 나도 그들의 부름에 응하는 성숙한 메신저가 되어야겠다. 노발대발 씩씩거리느라 대화 기능이 고장 난 메신저는 사양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