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 요즘 제 삶의 화두는 ‘존중’인 것 같아요. 특히 가까운 사람과의 대화에서 그런 고민이 더 자주 생겨요. 상대는 솔직하게 의견을 말한다고 하지만, 그 말이 누군가에겐 민감하고 상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이를테면, 무심코 던진 말이 저에겐 혐오 발언으로 들리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런 언행을 지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존중인지 포기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어요. 재은도 정치학과 사회학을 전공하셨으니까 아실 것 같은데, 이런 공부를 계속 하다 보면… 뭐랄까…
재은/ 날카로워지죠.
겨자/맞아요. 그래서 더 흥분하게 됐던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당장 고쳐!!’ 하고요. 그런데 지난 판돌 회의에서 “안전 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문제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특히, 징타(판돌)가 말한 “더러운 안전함”이라는 표현이 인상 깊었어요.
하자는 청소년에게 안전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모두가 좋은 말만 하는 ‘깨끗한 안전함’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때로는 상처도 받고 면역력을 키우는 공간이 진짜 안정감을 줄 수 있다는 말이었죠.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떤 말은 꼭 조심하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하고, 하자의 약속 역시 그런 고민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재은은 오디세이학교라는 안전공간을 만들고 계시잖아요. 이런 긴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또 실제 현장에서 청소년과 함께할 때는 그 균형을 어떻게 맞추고 계신가요? 궁극적으로는, ‘안전함’이란 어떤 감각일까요?
재은/ 제가 할 수 있는 건 사실 많지 않아요. 하지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보려는 태도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교사로서 누군가가 편견에 기반한, 혹은 올바르지 않은 발언을 했을 때, 그 말이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주 예민하고 명료하게 짚어야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하나의 존재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문화는 꼭 필요하다고 느껴요. 거기서 늘 어렵죠. 그 사람을 존재로 대하는 것과, 그 존재가 내뱉는 말이나 태도가 이 공간을 안전하지 않게 만들었을 때.그런데 그것 자체가 교육인 것 같아요. 교육의 목적이 결국 한 사람의 변화를 도모하는 거라면, ‘그건 틀렸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변하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그걸 설계해 나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더 어렵고 고민되는 것 같아요.
겨자/ 정답이 있다기보다는 그때그때 고민하며 길을 만들어 가신다는 말씀이네요.
재은/ 네. 사람은 늘 다르고, 오디세이에는 매년 다른 죽돌들이 오니까요.
오디세이학교 죽돌들
겨자/ 재은은 청소년을 대하시니까 이런 부분이 더 조심스러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인 대 성인이면 어느 정도 직설적으로 이야기해도 되는데, 상대가 청소년이면 더 많은 이해와 섬세함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재은/ 맞아요. 역할 상 ’교사 대 학생’으로 만났을 때, 어떤 말이 누군가에겐 굉장히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릴지가 늘 과제예요. 교실에서는 그런 상황이 정말 다양하게 나타나요. 예를 들어, 교실에 성소수자 학생이 있는데 다른 학생이 너무 자연스럽게 성별 이분법에 기대어 말할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 저는, “꼭 ‘남자친구’, ‘여자친구’라고 말해야 할까? 그냥 ‘애인’이라고 하면 안 될까?” 이런 식으로 그 학생이 쓰는 언어를 흔드는 질문부터 던져요.우리 안에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걸, 그 질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려는 거죠.
겨자/ 질문을 통해서 그런 틀을 깨뜨리는 시도를 하시는군요.
재은/ 네. 그러고 싶은데 잘 안돼요. (웃음)
오디세이학교 죽돌들
겨자/ 원래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재은/ 저 스스로도 대안학교를 나와서, 일반적인 경로에서 벗어나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교육이라는 분야를 궁금해하긴 했어요. 교사가 되고 싶은 건 전혀 아니었는데, 교육 프로그램 설계에 큰 관심을 보였었죠. 그런데 오디세이에서 길잡이 교사가 되었습니다… (웃음)
겨자/ 하자에서 햇수로 6년 정도 일하셨잖아요. 어떠세요?
재은/ 매년 다르다는 게 좀 힘들었어요. 만나는 사람에 따라 나오는 저의 모습도 다르고, 모이는 사람들의 에너지와 합도 다르고… 그래서 재미있기도 해요. 무엇보다 이들의 17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게 좋아요.
겨자/ 뭔가 낭만적이다…
재은/ 그러면서 제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느낌도 들어요.
겨자/ 우와. 어떤 점에서요? 궁금해요.
재은/ 교사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질문을 받는 사람이기도 하거든요. 때로는 회피하고 외면하는 질문들도 있는데, 저한테 팍 박혀서 결국에는 성찰하게 되는 질문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아, 나도 자본주의적 습성에 많이 물들어 있구나.’
‘나도 모르게 성차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네.’
‘교사의 중립을 말하면서 나 역시 학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구나.’
계속 부딪히게 되죠. 그런데 그 질문들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죽돌들한테도 답을 건넬 수 있더라고요. 그렇게 한 해 한 해 거듭하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겨자/ 스스로도 질문을 통해 틀을 깨뜨리시는 거네요.
재은/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겨자/ 그럼 재은이 생각하시기에, 오디세이학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재은/ 두 가지일 것 같은데요. 하나는 ‘동료 시민’이 되는 것이에요. 지하철에서 장애인이 탑승을 요구하는 시위에 침을 뱉고 지나가는 무례함은 없었으면 좋겠다. 세월호 집회 옆에서 짜장면을 먹는 몰상식한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거죠. 다른 하나는 ‘내가 나로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것이에요. “부모님이 원하니까”, “대학을 가야 하니까”, “이 나이엔 이걸 해야 하니까” 등등. 외부의 요구에서 벗어나서 시야를 넓히고 자기만의 속도를 찾아가는 것. 자기 안의 수많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위에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 그게 제가 수업을 하며 가장 기대하는 부분이에요.
겨자/ 혹시 재은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나로 살아가게 됐다’고 느꼈던 순간이요. 보통 그런 경험을 하고 그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하시는 것 같아서요.
재은/ … 너무 중요한 질문이에요. 저는 고등학교 때 기숙사 생활을 했거든요. 늘 친구들의 영향을 받게 되다 보니 저를 갉아먹는 느낌이 있었어요. ‘대학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고민도 오랫동안 했고요. 그때 가장 큰 행운은 좋은 선생님을 만났던 거예요. 그분이 윤리 수업을 하면서 주로 질문을 하셨는데, 적절한 때에 적절한 질문을 해주셨거든요. 덕분에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뭐지?’ 스스로 묻는 시간을 갖고,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지금의 저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겨자/ 살면서 느끼는 건데,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 같아요. 안 한다기보다는 외면하는 거겠죠. ‘내가 나로 산다’는 건 정해진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굉장히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하니까요.
재은/ 저의 경우에는 사회학이라는 전공의 영향이 컸어요. 사회학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 구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배우잖아요. 개인의 합이 곧 사회가 아닌 거죠. 여러 학자들이 역사적으로 짚어낸 맥락들을 보면서 "지금 이 사회 안에서 나는 어떤 영향을 받고, 나는 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어요.
대학 시절에는 또 그런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어요. 단순히 유명한 학자들의 이론을 배우는 게 아니라, 내 삶에는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대해 친구들과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었거든요. 대학생 때는 졸업하면 뭐 해 먹고 살지 고민하잖아요. 그런데 그 질문은 결국 얼마를 벌어야 하나로 연결되죠. 돈을 많이 번다는 건 자본주의 사회가 부추기는 욕망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서로 질문했어요. 그럼 진짜 나한테, 우리한테 필요한 게 뭐지?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잘 해내는 게 중요하겠다. 이런 얘기들을 나누는 동료들이 있었죠. 그리고 그 친구들과 여전히 같이 얘기하고, 또 같은 영역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게 저한테는 너무 큰 축복이고 행운이에요.
겨자/ 진짜 든든하시겠다. 부러워요. 왜냐하면 저는 정치외교학과인데도 친구들 간에 그런 대화가 흔치 않아서… 좀 외로웠어요. (ㅠㅠ^^) 그래서 저는 하자에 와서 너무 좋았거든요. 인턴들도 그렇고, 판돌분들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셨거나 하고 계시니까, 제가 막 물어보고 다닐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재은/ 사람이 다음을 연결해 주기도 하니까, 좋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많이 가세요.
겨자/ 요즘 그걸 많이 느껴요. 제가 관심 있는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상당수 하자를 거쳐 가셨거나 어떻게든 연결고리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다들 이렇게 연결돼 있구나 싶었어요. 이것도 어떻게 보면 재은이 만들고자 하는 판의 일부겠죠. 재은은 스스로 어떤 판을 만들고 싶으신가요?
재은/ 제가 만드는 판이 결국엔 우정의 장소가 되면 좋겠어요. 제 인생의 마디마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결정들도 결국 우정에서 비롯된 거였으니까요. 꼭 또래 친구만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모든 우정을 말하는 거예요. 방금 겨자가 ’든든하시겠어요’라고 얘기해줬잖아요. 그게 결국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함께 서 있는 판을 만드는 것, 또 우리가 같은 판에 서 있다는 걸 알게 해주는 것. 그게 제 목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