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대학 입시 이야기

참 쌓인 게 많았다.

지긋지긋한 대학 입시 체제 안에서 자신이 발전한다 믿으며 생활기록부를 만들어갈 때, 기묘한 우월감과 그에 따른 수치심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분을 삭이지 못해 다 푼 사설 모의고사 뒷면에 온갖 말을 적어내리곤 했다.

성적이 비슷한 친구가 지금 노트 한 페이지를 정리하는지에 따라 내 등급이 요동치는  환각에 시달렸다. 스스로 하루에도 수백 번씩 오르내리는 주가 그래프가 된 듯 했다. 정작 대학 가면 대학 서열에 대해 별 생각이 안 든다는 말은 이미 어느 정도 위치를 점한 사람들의 속 편한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착할 수 있는 권리조차 대학을 잘 간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나는 대학을 잘 가야만 했다. 결론은 그렇게 치달았다.

대학 이후의 시간들을 계속해서 바라봤다. '대학에 가면 공연 전시를 잔뜩 볼 거야' '서울에 가면 하자센터를 들러야지' '많은 곳을 가고 많은 영감을 얻을 거야'. 결국은 대학 대학 대학! 성인이 되자! 유년 시절에 묶여 있으면 절대 갈 수 없는 그 곳! 

이를 위해 스스로를 증명해내려 발버둥 치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숨 쉴 틈도 없이 부끄러웠다. 합불 발표가 난 12월 27일 오전 9시. 침대에서 일어나 결과를 확인했다. 딸깍 소리와 함께 '최초 합격' 네 글자가 노트북 화면에 떠올랐다. 복도 끝 방의 부모님께 결과를 전달했다.

다시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었다.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길고 긴 정규 교육과정 12년의 결과가 도출되었구나 싶었다. 이 고리타분한 이 세계에서 그저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아, 이렇게 살다간 정말 이대로 크고 말아

그렇게 바라던 '벗어남'이었는데 막상 대학에 발을 들이자마자 소름돋게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몸과 정신에 20여 년간 달라붙어 있던 ‘나’를 단숨에 바꾸기에 입학 전 3개월의 준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입시에서의 울분을 고스란히 담은 채 들어온 대학교 1학년은 답답하기만 했다. 많은 것을 경계하고 잔뜩 움츠린 채 살았다. 고등학교 시절의 행동 양식을 그럴 듯 하게 만들어보려는 시도들은 어딘가에 막히곤 했다.

어디에?

무언가를 지키려 했는지 몰랐다. 자존심을? 친구들이 묘사한 나라는 존재를? 지금까지 쌓아온 나 자체를?  덤덤하게 처리한 줄 알았던 감정들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더 어른스럽고 다방면으로 능숙해 보이는 또래 친구들을 보며 열등감을 느꼈다. 옷부터 시작해 사고방식, 하다 못해 취향이라고 생각했던 것까지 모두 부족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피터팬에게 네버랜드가 있다면 내게는 20년 간 몸에 쌓아온 딱딱하게 굳은 자아가 있었다. 지금까지 다져온 나와 내 세계 자체 말이다. 그래서 1학년을 끝내고 과감하게 휴학을 신청했다. 이대로 가면 2학년 때도 얼렁뚱땅 지금까지의 나를 의미 없이 재생산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를 따라 연고 없는 수원시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지인이 운영하는 산중턱 고깃집 2층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사실 상황 묘사만 봐도 알겠지만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다. 해봤자 기숙사에서 살았으니 할 줄 아는 게 있을 리가. 천장이 뚫린 화장실은 비닐로 대충 때웠고, 침대를 들일 여력이 없어 원래 널브러져 있던 소파에서 잤다. 당연한 것이라고 믿었던 꼬리표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매일 씻고 밥 먹는 생활 습관부터 생각하는 버릇, '이래왔으니 이래야 한다'는 알 수 없는 기준…. 나를 둘러싼 감각적인 세계가 서서히 무너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텅 빈 자취방을 어지럽게 채운 여러 감정들을 마주해야 했다. 불을 끄고 누웠을 때 창밖에서 나지막이 울리는 벌레 소리가 왜 괴로운지 알아야만 했다. 어렴풋이만 알던 감정들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낯설고 당황스러워 부정하고 싶었다. 부끄러운 나, 부끄러움을 덮고 싶어하는 나,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나, 그런 나를 정당화하며 부정하는 나까지 온갖 ‘나’들이 머릿속에서 엎치락 뒤치락했다.

가만있을 수 없어 매일같이 블로그 글을 쓰고 캔버스를 사서 유화 그림을 그렸다. 떠오르는 대로 시도 덧붙였다. 당연히 어려웠다. 무의식적 욕망을 훤히 내비치는 창작물들이 역했다. 어떨 때 수치스러워하는지, 어떨 때 슬퍼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가 투명하게 보였다. 잘못된 감정이라는 게 없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인정하기는 별개였다. 많이 부끄러웠지만 이를 악 물고 ‘그럼에도 사실은 사실이니까.’라는 생각으로 이런 과정을 반복했다. 

그랬더니 서서히 나 자신으로 사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해진 나라는 존재가 점차 차올랐다. 흐릿했던 세상도 눈에 선명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를 넘어 탈주할 시기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어색하지 않아지니 내가 아닌 사람들의 감정도 더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다.

올해 초 봄 어느 날, 문득 한층 따뜻해진 아침 햇살에 아메리카노만 있으면 앞으로 꽤 잘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이었으면 절대 할 수 없었을 법한 생각이었다. 이 땅 5천만 개의 내가 아닌 수많은 '나'들에 대해 생각했다.

살아생전에 절대 타인의 '나'로 살아볼 수 없다니 참 아리송했다. 평생을 하나의 나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어이없으며 타인을 이해하고 있다는 말은 얼마나 무책임한가. 한 신체에 갇혀 주어진 세포의 영향을 받으면서 1인칭 시점으로만 살 수 있다니. 이러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똑같은 '나'이기에 그 가능성을 붙잡고 함께하려 노력할 수 있겠지. 이해해보려 들 수 있겠지. 확률적으로 지금의 나는 이런 '나'로 태어난 것뿐 다른 이들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어떤 확률의 '나'일 뿐이니까 말이다. 

수많은 '나'일 수도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경의를 느끼며 이제는 진짜 네버랜드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직감한다.

네버랜드는 '유년 시절에 안착하고 있는 나' 자체였다.  대학에 갓 입학한 내가 가로막힌 것은 당시의 나에게 안주하려는 나약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마냥 아름답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회색빛의 시절, 나와 타인을 경계짓고 비교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모두가 색깔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느껴질 것을 감당하기 싫어  모든 감각을 차단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그곳에 색깔이 있다는 것을 안다. 또한 이곳에 머무는 한 다양한 진심들을 마주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곳을 떠나기로 선언한다.

초여름의 녹음 속에서 이곳을 뒤로 하며.

:: 글·그림_ 이산 (2025 하자 뉴미디어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