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작업장학교] "오레오레"의 저자, 호시노 토모유키와 함께 "나는 누구일까" 201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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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작업장학교에서는, 최근 [오레오레]라는 소설을 출간한 호시노 토모유키 작가와의 강연/대담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호시노 토모유키는 이 작품으로 5회 오에 겐자부로 상을 받았다고 해요. 흔히 "보이스피싱"이라고 불리는 형식의 거짓말/사기범죄가 가능한 현대사회에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추적할 수 있을지 흥미로운 전개가 작품에 나타납니다.

책 표지그림을 이시다 테츠야라는, 히키코모리를 검색하면 발견되는, 특이한 느낌을 주는 판타지장르의 화가가 그렸네요. 호시노 토모유키는 오히려 "스포츠 같은 것이 사회를 바꾸는 방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축구를 열심히 하시는데, 특히 street people에 관심이 많답니다. 10월에 멕시코에서 열리는 홈리스 월드컵에도 출전예정이고요, 관련하여 8월에는 빅이슈와 함께 한일포럼도 하고, 한일노숙인친선축구대회에도 신나게 움직이는 그런 분이시지요.

 

좌담회에 초대합니다.

시간: 2012. 7. 21 오후 6시
장소: 하자센터 본관 1층 쇼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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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셋을 잃었다 … 그들은 왜 자살했을까


[중앙일보] 입력 2012.07.14 00:00 / 수정 2012.07.14 00:07

작년 오에 겐자부로 문학상 『오레오레』 작가 호시노 도모유키








호시노 도모유키는 “지나가는 남학생들이 모두 헬멧 모양의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한국 사회도 남들과 같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끼는가”라고 물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소설 『오레오레』(은행나무)는 젊은이들의 자살이 빚어낸 절망의 보고서다. 저자인 호시노 도모유키(47·사진)는 2005년부터 3년간 일본 와세다대에서 소설 창작을 지도하던 중 학생 셋을 잃었다. 이들의 자살 이유는 분명치 않았다. 다만 “자신감이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작가는 왜 이토록 젊고 촉망받는 학생들이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골몰하며 이 소설을 썼다. 그는 이 작품으로 지난해 오에 겐자부로 문학상을 받았다.

#오레오레(俺俺)

소설은 도쿄라는 현실적 공간에서 내가 증식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주인공 히토시는 수중에 들어온 휴대전화로 ‘오레오레 사기(보이스피싱)’를 친다. 무작정 전화를 걸어 “오레, 오레(나야, 나야)”라고 한 뒤 돈을 입금하도록 만든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다히키로 사칭을 하던 히토시는 어느새 정말로 다히키가 된다. 그렇게 복제된 히토시는 2명, 4명, 8명 기하급수로 늘어난다. 도쿄는 무수한 ‘나’의 집합체가 된다.

“일본에선 남들과 똑같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인물들이 ‘맥도날드’를 자주 찾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있는 장소에서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것이 진정 평온일까요. 모두가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나’의 집합체는 점점 다른 존재를 배제시키고 지우려고 합니다.”

‘나’가 늘어날수록 화자도 늘어난다. 시점도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다시 1인칭으로 혼란스럽게 이동한다. 책을 읽다 보면 누가 히토시인지, 다히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혼란스러움은 제가 겨냥한 바입니다. 독자가 점점 나와 타인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고, 남들에게 맞춰서 점점 자기다움을 잃어가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붕괴, 그리고 부활

견고한 성처럼 보이던 ‘나’의 세계는 이내 무너진다. 서로 다른 점을 발견한 ‘나들’은 서로를 참지 못하고 죽인다. 그러니까 이는 타살이자 자살이다. 살해는 점점 무감각해지고 종국엔 서로의 인육을 먹으며 존재를 지운다. 단순한 사기사건으로 시작했던 소설은 묵시론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지금 일본사회는 자살은 물론 무차별 살해도 늘고 있어요. 인터넷에서도 살해와 맞먹는 공격이 빈번하게 이뤄집니다. 나든 남이든 죽이고 싶고, 파괴하고 싶어지는 극단적인 사회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이 절망할 때, 어떻게든 이 절망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고 전했다.

세계 어느 곳보다 자살률이 높은 우리 나라. 일본 산케이신문 기자 출신인 그는 인터뷰 내내 “한국 사회도 이와 비슷한가”라고 되물었다. 누가 “우리는 아니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까.

 



[경향신문] 한기호의 다독다독: 개인소멸을 극복하려면

2012-07-09 21:21:22

호시노 도모유키 장편소설 <오레오레>(은행나무)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레오레’는 그냥 ‘나(오레)’로는 부족하여 ‘나야 나’ ‘나, 나라니까’ ‘내가 내가’ 하며 자신의 존재를 강조하는 표현이랍니다. 작가는 이 소설로 ‘제5회 오에겐자부로상’을 받으면서 한 인터뷰에서 ‘오레오레’는 “개인이 소멸되는 시대에 겁먹은 개인들이 지르는 비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인공 ‘나’(히토시)는 언제나 맥도널드에서 혼자 점심을 해결합니다. ‘나’는 어디를 가나 동일한 인테리어로 편안하게 맞이해주는 맥도널드가 집처럼 편안합니다. 맥도널드의 빨간색과 노란색이 눈에 들어오면 조난 중에 사람이 사는 섬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나’는 맥도널드에서 옆에 앉은 사람(다이키)의 휴대전화를 자신도 모르게 들고 나왔습니다.

쓸데없는 걸 가져온 것을 후회하며 버리려는 순간 휴대전화 진동음이 울렸습니다. 액정화면에는 ‘어머니’라고 떴습니다. 처음에는 받지 않았지만 맥도널드에서 들은 ‘다이키’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연습을 한 다음에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아들인 척 거짓말을 내뱉었습니다. 돈이 급히 필요하다는 말에 전화 속의 어머니는 아무런 의심 없이 아들 ‘다이키’를 위해 돈을 보내왔습니다. 일종의 ‘보이스피싱’이 성공한 것입니다.

며칠 후 ‘다이키’의 어머니가 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나를 진짜 아들처럼 대했습니다. 당황한 나는 2년 동안 찾지 않았던 진짜 엄마 집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당신, 스토커 짓은 범죄라는 것 몰라?” 하면서 ‘나’의 행세를 하던 젊은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습니다. 그는 오늘 내가 지겹도록 봐온 바로 ‘나’였습니다.

점점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는 ‘나’는 무수한 ‘다른 나’를 만나게 됩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내가 되어 있고, 그 ‘나’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식’됩니다. 그렇게 증식되는 ‘나’는 정어리와 다름없습니다. 직접 소설 속의 표현을 읽어볼까요. “자유자재로 바다를 헤엄치는 것 같지만, 실은 나는 주위의 정어리에 맞춰서 몸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리더가 있어서 움직임을 결정하는 게 아니다. 모든 정어리가 주위를 따라 한 결과 전체적으로는 구름같이 부풀거나 줄어들거나 옆으로 흘러가거나 오로지 멀리 헤엄쳐 가거나 하는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생각은 없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면 잡아먹힌다. 그러니까 나는 주위의 정어리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열심히 움직인다. 전후좌우 위아래 어디를 봐도 같은 정어리, 정어리, 정어리. 그러는 사이 어느 정어리가 자신인지 모르게 된다. 자신이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결국 ‘나’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구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깥이든 집 안이든 전철 안에서든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나, 나, 나. 자기 자신으로 뒤덮인 곳에서 서로 상처 입히고 서로 삭제하게 됩니다.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자신을 누구보다도 잔혹하게 괴롭힙니다. 옆도 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오직 절멸을 향해 돌진합니다. 나를 삭제해버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질리지도 않고 우리끼리 서로 삭제경쟁을 벌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소셜미디어에서 무수한 친구를 만들다가도 한순간에 많은 사람을 삭제해버리기도 합니다. 상처를 입으면 자신의 방을 폐쇄해버리기도 하지요. 언제나 상대의 의중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날마다 맥도널드에서 똑같은 점심을 먹는 히토시는 혼자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자신의 껍질에 틀어박히듯이 오로지 눈앞의 먹을 것을 획득하는 데에만 몰두해온” 우리는 “앞날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을 먹어온” 것 아닌가요?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부모’에게 성공적인 삶을 강요당해왔습니다. 세간에서 말하는 성공의 이미지에 나를 맞추고 그 속에서 만족을 추구하려고만 했습니다. 그 결과는 일류대 입학과 안정된 직장. 우리는 늘 주위의 색깔에 물들 뿐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주향은 <그림 너머 그대에게>(예담)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는 아버지의 탑에 갇혀 있습니다. 돈의 탑에 갇혀 있고, 시선의 탑에 갇혀 있습니다. 갇혀 있는 우리는 탐욕의 노예고, 권력의 노예고, 시선의 노예고, 체면의 노예고, 시간의 노예고, 하다못해 다이어트의 노예입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먹고, 놀고, 편하게 자지 못합니다. 많이 벌어도 언제나 2퍼센트 부족하고, 한 목숨 살리기 위해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있지만 ‘나’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활동적 자폐가 아버지의 탑에 갇혀 있는 현대 도시인의 특징”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우리가 자폐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소설에서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먹히기 전에 우리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존재라는 걸 자각하는 것이라고 말하는군요. 이주향은 내 속의 하늘을 품어야 ‘아버지의 탑’에서 해방되어 혁명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제의 ‘경험’이 내일은 ‘쓰레기’가 되는 세상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