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자유롭게 몸을 움직여 자유롭게. 그곳의 몸들은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내 몸이 한 번에 한 장소에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용케 잊지 않고 있다. 동시에 여러 장소에 있을 수도 없고, 그 어떤 장소도 점유하지 않은 채로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욕심부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숨고자 하여도 보인다는 것을 안다.
관객석에 내가 가진 몸이 정확히 얼마나의 물성을 가졌는지 모르는 내가 앉아 있다. 이 몸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르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일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며 놀랄 기회를 갖지 못하는 내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난 겨울 해가 오래전에 져버린 바다를 들여다보던 일. 같은 것이 생각난다.
해가 오래전에 져버린 바다를 보려고 갑판으로 향했다. 새벽 1시 무렵이었다. 아무도 이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갑판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만큼 아름답고 어두컴컴한 세상이 있었다. 바다와 하늘 사이의 미묘한 경계로 오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분명 어두운 밤이었지만 밝은 곳이 있었다. 그것은 그 경계였다. 그곳을 멍하니 들여다보는데 바다가 내게 어떤 말을 전해왔다. 세상에 어떤 것도 나한테 어떻게 하라고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 바다가 내게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라고 말이야.” (이 바다는 울렁여. 계속해서 변하고 변하지만, 어딘가로 도망치진 않아)하고.
• 생각이 튄다 • 생각은 나를 동시에 많은 곳으로 데려간다 •
윤서야 너는 니 안에 괜찮은 점이 하나라도 있다고 생각해? 하염없이 미루다가 산더미가 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들. 왜 그것들을 그 무엇도 제때 돌보지 못했을까. 다른 사람과 추는 많은 춤에서 나는 발을 밟자마자 나가버리기를 선택하기 일쑤였다. 마치 이 세상에 완벽한 춤이 있다는 것처럼. 이 몸이 완벽한 춤을 추기 위해 훈련된 몸인 것처럼. 나가버리고 나서는 몸을 잊고 낮게 깔려 누워있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면 몸이라는 건 나를 막는 장애물과도 같다고 느껴졌다. 이 몸이 있어서 춤을 출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졌다.
• 몸이 돌아온다 • 몸은 나를 한 곳으로 데려간다 •
그 무대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는 것을 다시 보았다. 목발질 하며 삐걱삐걱 삐걱삐걱. 쉴 새 없이 오가며 틈틈이 부딪친다. 서로를 밟고 밀치고 뛰어넘고 넘어진다. 그 몸들은 자신이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무대에 오른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도망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삐걱대며 다시 하기를 선택한다. 완벽하게 하기를 욕심부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실수를 숨기고자 하여도 보인다는 것을 안다.
관객석에 실수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내가 앉아 있다. 이 몸이 할 수 있는 실수들, 이 몸이 할 수 없는 실수들. 이 몸이여서 할 수 있는 실수들, 이 몸이여서 할 수 없는 실수들. 리스트는 무한하게 증식한다. 무한한 그것을 보고 있자니 생각보다 별 것 없어 보였다. 이 몸이 있어 이곳에 있을 수 있고, 이 몸이 있어 이 생각으로 나를 데려왔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난주에 은영이 두고 간 편지를 들여다보던 일. 같은 것이 생각난다.
은영은 얼마 전에 떠난 나를 보려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8월 무렵이었다. 베를린과 서울의 경계에서 우리는 만났다. 한쪽은 몸이 있는 곳, 그리고 다른 한쪽은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지는 못했지만, 그 경계에서 즐거운 이야기들이 뿜어져나왔다. 그러다 내가 약속을 나갔던 어느 밤, 은영은 내 방 책상에 어떤 말을 두고 떠났다. 세상에 어떤 것도 나한테 어떻게 하라고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은영이 내게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라고 말이야.” (후회할 행동을 하더라도 헛발질을 하더라도 그건 모두 인생이란 춤의 한 스텝인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모든 춤은 몸을 흔들면서 가는 것이겠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하고.
• 생각이 튄다 • 생각은 나를 동시에 많은 곳으로 데려간다 •
윤서야 너는 이 안에 그 어떤 진실도 없다고 생각해? 울렁이는 바다, 춤을 추는 인간. 그건 저 무대에도 있고 관객석에도 있어. 은영도 알고 댄서도 알고 바다도 심지어는 너도 아는 것이 있어. 그건 울렁이고 울렁이며 변한다 해도, 이 몸에서는 절대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춤은 도망칠 수 없는 이 몸을 통해서만 나온다는 사실이야.
• 몸이 돌아온다 • 몸은 나를 한 곳으로 데려간다 •
저 무대에서 사람들이 누워 숨을 쉬는 것을 다시 보았다. 길고 긴 춤에 지친 숨소리와 땀자국들이 바닥으로 스며든다. 서로의 숨을 느끼며 바닥으로 깔리는 그들의 움직임마저도 춤이 되어 내 앞에 드러난다. 누워있는 저 사람, 숨을 쉬는 저 사람도 춤을 추고 있다. 그것도 공연이 된다. 완벽한 숨, 완벽한 가라앉음, 완벽한 움직임 그런 건 여기 없다. 모두 그냥 지쳐버려 몸을 눕히고 쉬는 것이다. 그리고 지쳐버린 몸을 무대에 눕히고 쉬는 이를 보는 것은 이상하게 위안이 된다. 그것도 춤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관객석에 내가 가진 몸이 하는 모든 일이 춤일 수 있다 생각하는 내가 앉아 있다. 이 몸이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고자 하는 건 분명 춤이다. 그러나 이 몸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 역시 춤일 것이다. 이 몸에서 도망치지 않고, 이 몸이 움직이는 모양 그대로와 함께 사는 일. 그건 어떤 기분일까?
막이 내린다. 몸들은 무대를 떠난다.
글 · 사진_ 자유(하자글방 죽돌)
2024년 가을학기 하자글방 후속모임 〈둥글레차〉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함께한 시간을 간직하기 위해 차(茶)를 글감으로 진(zine) 〈오래 우린〉을 만들었습니다. 오래 우려낸 차의 맛과 오랜 우리의 이야기가 담긴 진은 둥글게 둘러앉은 자리로 독자를 초대합니다. ‘From. 하자글방’에서는 차에서 시작해 춤을 거쳐 몸으로 도착한 릴레이 글 일부를 소개합니다.
From. 하자글방
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3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가운데 일부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