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면 선고 이전의 시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주의 며칠은 종로 길거리에서 쪽잠을 잤던 그 마지막 한 달은 정말로. 공예박물관 주차장에 모여 앉아 천 원에 구매한 중고 부루스타로 라면을 끓여 먹었던 것. 그때 젓가락이 한 개뿐이었던 것. 그래서 같은 젓가락을 모두의 입에 넣었다 뺐던 것. 서로의 이름을 물은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채 다닥다닥 붙어 담요 한 개를 같이 덮은 것. 그리고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얼버무리며 아침 인사를 건넸던 것. 심야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누워있던 몸에 느껴지는 종로 8차선 아스팔트 도로의 흔들림. 경적 소리. 불렀던 노래. 만들었던 결의 대회. 추었던 춤. 외쳤던 말. 그런 것들. 그런 작은 감각들만이 너무 뚜렷하게 기억나서 커다란 시간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시차를 감각하게 되어버렸다. 철야 집회가 끝나고 겨우 옷만 갈아입은 채 학교에 가서 앉는다. 교수자는 수업을 시작한다. 그것이 약속된 것이니까. 교수자는 자꾸 우리가 삐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남겨진(left)’ 것들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 것들을 말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예술이라고 한다. 그렇군요, 그런데요······. 마찬가지로 약속된 시간이 되고, 교수자는 10분 휴식을 선언한다. 10분 후면 교수자는 다시 ‘남겨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약속된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일상이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졌는데도, 어떤 일상적 믿음들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모든 일상을 의지적으로 멈춰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그 믿음이 부서졌다는 것. 10분 후에도 나는 그 수업을 들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믿었던 쓸모를 잃어버렸다.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예술과 정치를 분리하지 말라는 가장 기초적인 말을 꺼내야 했던 나와 내 친구들은 함께 밥을 먹는 밤이면 슬펐다. 그림을 그리지 못한 지 두 달이 되었어. 그렇구나. 나도 글을 전혀 쓰지 못하겠어. 그런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다음 달, 내일, 당장 몇 시간 후의 안전도 알 수 없는데. 우리가 말하던 언어는, 무엇은, 예술은 너무 느리다. 너무도 지긋지긋하다. 발붙이지 않는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모든 것은 발붙이고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그것이 지금 당장 중요한 것 같지는 않고. 이것은 관념에 대한 논리 판단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나의 위치에 대한. 그러니까 아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니까. 글을 쓸 때마다 아주 깊숙하게 발을 박아 넣어 한 발짝 디딜 때 땅이 부서지고 균열이 나는 것을 꿈꾼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럼에도 명백히 지나온 시간 속에서 무엇을 창작할 수 있을까. 나는 빵을 만들고, 밥을 만들며, 매일 먹을 도시락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글을 만들고. 붕괴되어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와, 붕괴되지 않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산과 사람과 동물과 또 내가 모르는 어떤 것들이 불에 타고 죽어가지만, 리모컨 버튼 하나 돌리면 어떤 사람은 옷을 팔고 어떤 사람은 웃고 있는, 그리고 여전히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그런 텔레비전을 들으며. 그것이 당연한 것임을 알면서도. 모든 감각들이 아주 고장 났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2025. 04.
글 · 사진_ 퍼핀(하자글방 죽돌)
2023년 봄학기 하자글방 후속모임 〈파프리카〉는 앞으로의 지속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한 달간 글쓰기를 진행하였고, 그 여정을 마무리하며 모임에서 나온 글을 ‘From. 하자글방’에 기고합니다.
From. 하자글방
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3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가운데 일부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