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른/ 망설였다기보다는…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이 사람들에게 우리의 논리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이들이 준비가 안돼 있는데 내가 설득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이게 과연 좋은 전략일까.’
그런데 새로운 무언가를 알게 됐을 때, 다시는 그 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기도 하잖아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처럼, 동굴 밖으로 나오면 훨씬 더 위험해지기도 해요. 동굴 안에 있을 때가 더 안전했을 수는 있죠. 그렇지만 동굴 밖으로 나온 이상 다시 들어갈 수는 없어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으니까요.
저는 여성주의를 알게 되고 삶이 더 힘들어지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서, 예전에는 별생각 없이 연애를 할 수 있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연애의 방식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살아도 괜찮은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고, 파트너와 협상을 해 나가게 됐어요. 가족과의 문제도 그렇고요. 삶이 피곤해지죠. 피곤해지지만, 여성주의를 모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이제 제 삶의 중요한 일부이자, 또 세상을 바라보는 일부가 됐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망설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전기흐른(흐른이 활동했던 밴드명) 공연 사진
겨자/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 있다는 말씀에 너무 공감해요. 그런데 전 오히려, 그래서 더 망설이게 됐던 것 같아요. 제 삶의 일부가 되면서, 삶의 다른 부분들과 충돌했었거든요.
저는 정치학을 전공하고 밴드 활동을 했고, 흐른도 여성학을 전공하고 인디뮤지션으로 활동하셨잖아요. (저는 그냥 취미생. 저의 밴드는 한 달 전 시작과 함께 해체했습니다. 이렇게 나란히 비교하는 것도 사실은 말이 전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이야기해 보고 싶었던 지점이… 세상에 그 무엇도 진리라고 확신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예술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정해진 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는 반면, 정치의 경우엔 답을 정해두고 서로 관철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회운동은 사실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저는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할 때 망설이게 돼요. 정치도 어쩌면 예술처럼 답이 없는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내 주장에 어떻게 확신하지? 하면서요. 나아가서 정치적인 주장도 단순히 취향 차이인가? 싶을 때도 있었어요. 흐른이 생각할 때 설득한다는 것은 뭘까요? 우리는 우리의 주장에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흐른/ 설득한다는 건 결국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시선으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의 문제인 거죠. 다만, 여기서 중요한 건 나를 상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거예요. 나의 시선만이 옳거나 타인의 시선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걸 자각하는 게 필요하다는 거죠. 저에게는 여성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한 부분이어서 저를 여성주의자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주의가 장애인 인권 운동보다 중요하다고 보지 않아요.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가치를 자기의 중심에 두는 와중에, 서로의 위치성을 존중하며 연대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면 연대하는 거죠.
그러나 상대화할 수 없는 것들도 분명히 있어요. 지구 편평설이나 나치즘도 말씀하신 “취향”으로 인정할 수는 없잖아요.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지향점이라고 한다면, 그 지향점을 향하는 위치나 방향, 지점들이 조금씩 다른 운동들은 취향으로 존중할 수 있죠. 그런데 방금 말씀드린 예시처럼 어떤 운동들은 그 지향점과 오히려 반대로 가기도 해요. 그건 폭력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봐요.
겨자/ 확실히 아닌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힘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씀이시네요.
흐른/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흐른이 대학 시절 총여학생회에서 기획했던, 가을 여성제 자료집 표지 (출처: 양성평등 아카이브 여기모아)
겨자/ (반했다…) 흐른이나 저는 이렇게 대화를 나누면 서로 딱 알잖아요. 어떤 게 지향점으로 가고, 어떤 게 역행하는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과는 그 지향점조차도 서로 다르게 보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특히 생각이 다른 사람과 현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말 큰 벽을 느껴요. 아까 연애 말씀을 하셨지만, 저도 연애를 하면서 이 벽을 많이 느꼈거든요. 그래서 그 지향점에 대한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한다면 강경하게 해야 할지, 부드럽게 해야 할지. 그 사이에 노선을 정하는 게 어려웠어요. 흐른도 이런 고민을 하신 적이 있나요?
흐른/ 그럼요. 많이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는 것 같아요. 그걸 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게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사람도 있어요. 어찌 됐든 내가 가장 중요하죠. 내가 지치지 않아야 하고, 그 친구들을 모두 데리고 가지 못한다고 해서 나를 탓할 필요도 없고. 정답은 없어요.
또 사람은 다면적이잖아요. 누군가가 페미니즘과 관련해서는 나와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좋은 사람이고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어요. 그 사람이 여성주의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해서 나쁜 사람으로 취급할 수는 없잖아요. 내가 이 사람과 계속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접점을 만들어 나가는 게 나의 인간관계와 행복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라면, 그 사람과는 그렇게 가는 거죠. 반대로 어떤 사람과는 노력해 가면서까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각자의 길을 가는 거예요. 나의 에너지는 소중하니까요.
결국 나에 따라서, 또 상대에 따라서 대화의 전략이나 관계 맺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겨자/ 그러게요. 정작 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요. 그래도 인생 선배시잖아요. (웃음) 결론이 좀 나셨나요?
흐른/ 이 분야는 결론이 없는 것 같아요. 사람과 만나다 보면 자신만의 기준이 어느 정도 생기잖아요. ‘그래. 이번 연애를 통해서 파트너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감이 잡힌 것 같아!’ 하고요. 근데 또 새로운 사람 만나잖아요? 그럼 다시 새롭게 고민하게 돼요. 사람은 다 다르니까요.
저에게 특별히 힘들었던 부분은 이 지점인 것 같아요. 저, 나름 스스로 좀 의식화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 고민 상담도 해왔는데요. 막상 그게 나의 굉장히 사적인 문제가 됐을 때는 제가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은 거예요. 되게 부족한 페미니스트 같고 헛똑똑이인 것 같고.
겨자/ 그 괴리감을 견디기가 어렵죠.
흐른/ 맞아요. 또 그런 부분에 대해서 동료 여성주의자들에게 잘 이야기하지 못했어요. 그런 얘기를 꺼냈다가 “걔랑 빨리 헤어져”, “너 페미니스트가 왜 그런 것도 제대로 못 해!” 같은 말을 들을까 봐 걱정됐거든요. 그런데 사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괜히 제가 먼저 겁먹고, 혼자서만 고민하려다 보니까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주변에 고민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나 동료를 만드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는 것도요. 혼자 끌어안고 있으면, 그게 제일 힘든 일인 것 같아요.
9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우리는 매일매일」(2021, 영희야놀자, 강유가람 감독) 포스터
겨자/ 너무 공감돼요. 혹시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케이팝 데몬 헌터스> 보셨나요?
흐른/ 네, 봤어요.
겨자/ 음악으로 악귀를 물리쳐야 하는 루미(여자 주인공)가 악귀인 진우(남자 주인공)의 사연을 알게 되면서 혼란스러워하잖아요. 악귀들도 원래 악하다기보다는 배후 세력에 어쩔 수 없이 묶여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된 거죠. 그래서 'Take Down'이라는 노래에 “네 문양을 보면 혐오가 일어나(it makes my hatred wanna grow out of my veins)”라는 가사를 망설이면서 부르다가, “그 아래 숨겨진 고통이 보여(i see your pain that lies below)”로 은연중에 고쳐 부르기도 해요. 그 과정에서 동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기도 하죠.
거기서 저는 제 모습을 봤어요. 사실 의견이 정반대라고 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구조적 문제의 피해자들이잖아요. 'Free'에서 루미와 진우가 결국 서로가 같은 상처를 공유한다는 걸 깨닫고 서로를 이해해보려고 했던 것처럼요. 그래서 모두를 설득해서 함께 나아가고 싶다가도, 현실의 문제가 시급한데 그들까지 포용하는 건 너무 많이 돌아가는 방법 같기도 하고. 또 이미 판 자체가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타협하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싶다가도, 그래도 같은 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니 마냥 외면할 수 없기도 하고… (^^ㅠㅠ) 그래서 혼란스러워 하는 와중이었는데요… 이제까지 흐른과 제가 사적 영역에서의 설득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힘의 불균형이 극명하게 존재하는 공적 영역에서 우리의 전략은 어때야 할까요?
흐른/ 그 전략도 다층적이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한 가지 방법이 아니라 여러 방법이 필요한 거죠. 예를 들어서 청소년 현장에서는 우선적으로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알려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해요. 물론 그 노력의 방식 또한 다양해야 해요. 교육을 통해서 차근차근 알려주는 포용적인 방법도 필요하고, 혐오에 기반한 폭력에 대해서는 단호한 대응도 필요하죠. 한편, 사법 체계 안에서는 처벌이 가장 효과적인 예방책일 수 있어요. 불법 촬영과 같은 심각한 범죄에 대해선 엄중한 처벌로 문제점을 인식시켜야 하니까요. 결국 사회의 영역마다, 또 담당하는 역할에 따라서 그 전략은 다층적으로 다 일어나야 해요. 낮은 수준의 설득부터 시작해서, 높은 수준의 처벌까지. 모두 있어야 하죠.
하자마을 성년식 축하 공연을 하는 흐른
겨자/ 그러네요. 돌아보니 오늘 많은 질문이 이분법적이었어요. 뭔가 기분 좋게 무너진 기분이에요. 저의 소크라테스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제 역할을 잘 고민해 볼게요. 또 돌아보니, 제가 자유롭게 이런 고민을 할 수 있게 된 건 흐른이 몇 년 앞서 이미 판을 어느 정도 만들어 놓으신 덕분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흐른은 스스로 생각하셨을 때, 어떤 판을 만들고 계신 것 같나요?
흐른/ 하자 안에서 저는 여성주의에 대해 많이 훈련받은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관점에서 주의 깊게 지켜보고, 조언하려는 노력을 늘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동료 판돌이 의도치 않게 바람직하지 않은 발언을 했을 때, 그걸 그냥 넘기기보다는 “그 말은 이런 이유로 문제적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앞으로는 조금 더 조심하면 좋겠다”고 말하는 역할을 일부러 맡죠. 또 하자가 돌아가는 방식 중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려는 책임감을 갖고 있어요. 모두가 함께 설 수 있는, 고르고 편평한 판을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