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감/ 맞아요. “예술대학생 네트워크”(이하 예대넷)라는 단체에 있었어요. 그 시기에 그런 일들이 모두 겹쳤어요. 원래는 다른 전공이었는데, 미술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교도 새롭게 가고… 여러 가지로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겨자/ 원래는 어떤 걸 전공하셨어요?
단감/ 불어불문학이요. 근데 그 학교는 반년 다니고 그만뒀기 때문에 기억이 없습니다…
겨자/ 갑자기 ‘난 미술 해야겠다.’ 하신 거네요? 신기하다.
단감/ 당시 전공이 너무 안 맞아서 난 뭘 해야 할까 하다가… 한창 혼자 그림 그리는 거랑 전시 보는 거 좋아해서 미술 전공을 택했죠.
겨자/ 인간 <하자>시네요. 그러고 바로 예술인 권익 증진 활동까지 하신 거잖아요.
단감/ 오히려 잘 모르니까 그렇게 한 거죠… ㅎㅎ
겨자/ 어떤 활동이었어요?
단감/ 예대넷은 처음엔 예술대학생 학생회 연합체로 시작되었고, ‘예술대학생 및 청년예술가들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는 우리가 만든다’는 미션이 있었어요. 당사자성이 강한 활동들이었죠. 답답하고 바뀌었으면 하는 문제는 많은데, 그걸 학교 안에서만 얘기하니까 문제가 축소되거나 쉬쉬하는 분위기가 있는 거예요. 이런 문제들을 학교 밖, 우리 사회 전반으로 확대해서 논의를 해보자면서 시작됐어요. 가장 크게는 교육 공공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하나의 서비스처럼 돈을 내야만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당시 코로나가 터지면서 등록금 반환 운동도 했었어요.
출처: 예술대학생 네트워크 블로그
겨자/ INFP가 이런 활동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다 나요… 원래 이런 권리 활동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단감/ 제가 활동이나 운동에 뜻이 있어서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학교에 이런 커뮤니티가 있다고 해서 들어갔다가, ’내가 평소 갈증이 있었던 부분을 언어로 정리해서 정책으로 제안하는 활동이 있구나’하는 걸 처음 알게 된 거죠. 그때부터 다른 분야의 해방 운동과 같은 사회적인 의제에 공감하게 되면서, 요즘에는 비건 식생활에도 관심을 두고 있어요. 활동을 하면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작업을 계속 이어 가야겠다’ 하는 태도가 생긴 건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겨자/ 멋지다… 단감은 참 실천적인 것 같아요.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고, 학교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목소리를 내고, 또 신념에 따라 식습관도 바꾸신 거니까. 저는 하자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실천적인 행동들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는 아닐까?’ 하고 엄청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어마어마한 구조적인 문제들이 내 눈에는 보이는데, 내가 손을 보탠다고 이걸 과연 바꿀 수 있을까? 하고요. 단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람들을 모으고, 타협하지 않았잖아요.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단감/겨자는요?
겨자/저요…?
단감/ 이런 걸 궁금해하고 질문하는 것도 같은 마음인 거잖아요.
겨자/오 이런 역질문… 전 근데 뭐 한 게 없는데… 흠. 전 아무리 생각해도 나중에 돌아봤을 때 엄청 후회할 것 같은 거예요. 몇 년 전에는 제가 세상에 신물이 나서 뉴스도 안 보고 ‘나는 그냥 야채처럼 살래…~’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지구는 계속 더워지고, 세상은 점점 피폐해지니까… 제가 변화에 기여하지 않으면 모든 게 어처피 저에게 돌아올 거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럴 바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손을 보태보자… 했습니다. 또 계란은 부서져도 바위와 달리 생명이 있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하며…^^ 허허. (그렇다고 제가 뭐라도 되는 건 아니고…끄응)
단감/멋져요.
겨자/아니에요. (그러지 말라는 손사래) 저야말로 감잔데…저는 예술과 예술인을 정말 동경해요. 논리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예술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논리는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는 반면, 예술은 부드럽고 유연하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저는 공공성에 대해 고민하면서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하자에는 단감처럼 예술을 하다가 공공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아서 저에게는 신기하게 다가왔어요. 단감이 생각했을 때, 궁극적으로 예술은 왜 필요한 걸까요?
단감/ 예전에 예대넷 있을 때 ‘K-레볼루션 툴 워크숍’이라고, 혁명의 도구를 만들어보는 기획 워크숍을 했었어요. 내가 일상에서 만들고 싶은 혁명을 단계적으로 일으켜보자 해서, 각자 깃발도 만들어보고 동료를 어떻게 모을지도 얘기했어요. 또 이런 생각을 가시화할 물리적인 혁명의 도구를 한번 만들어 보자면서 죽창 깎기도 하고 그랬어요. (웃음) 그러면서 일상에서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을 법한 것을 하거나, 내가 혼자서는 하지 않을 법한 것들을 하게 되는 거예요. 또 ‘그거 나도 생각했던 건데’ 하면서 서로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열어주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서… 그런 점에서 저는 예술이 참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K-레볼루션 툴 워크숍' 홍보물
겨자/예술이 일상과 거리를 두고 상상하게 하고, 서로 이야기하게 하는 매개가 되는 거네요.
단감/ 맞아요. 그런데 예술의 필요성 자체를 공감하는 사람의 수가 너무 적다고 느껴요. 예대넷에 있을 때도 국회에 가서 정책을 제안하는 활동들도 많이 했었는데, 항상 여러 분야 중에 문화예술 분야가 예산이 눈에 띄게 적었어요. 그만큼 우리 모두가 예술이 삶에서 정말 필요하고 가치 있는 분야라는 점에 서로 공감은 하는데,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겨자/ 그래도 변화가 오던가요?
단감/ 제가 단체에 3년 정도 있었는데요. 단체 활동 막바지에는 소진도 많이 되고, 처음에는 바뀔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잘 안되는 것 같다는 무력감도 있었어요. 그래도 변화가 조금씩 온다고 저는 생각해요. 엄청 더디고 느리긴 하지만, 변화는 조금조금씩 일어나고 있어요. 이런 활동들로 조금씩 사회적 합의라는 게 생기면서 실제 정책으로 운영되기도 하더라구요. 지금 생각 나는 건… 문화예술계 안에서 위계에 의한 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인권센터를 반드시 학교 안에 설치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지금은 법제화*됐어요. 예대넷 활동만으로 이루어진 성과는 아니겠지만, 이런 목소리들이 모여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 같아요.
*2022년 3월부터 대학 내 인권센터 설치가 의무화되었다.
겨자/ 그러다가 판돌로 컴백해서 아예 현장으로 오시게 된 거네요.
단감/ 그렇죠. 저희가 ’공중전’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요. 예대넷에서는 변화의 필요성과 의제의 중요성을 많이 다루었지만 그 내용을 더 널리 알리고, 설득하고, 목소리를 모으는데 집중하다 보니 명확한 현장이 있지는 않아서 손에 잡히는 느낌이 덜했어요. 학교를 졸업하면서는 더더욱 그랬고요. 이 변화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의제들이 너무 거대하게 느껴서 어디서부터 변화를 시작해야 하나 싶고, 당장 무언가가 실현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우리가 이걸 어떻게 현실로 실현해 볼 건가’ 하는 점들이 답답할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현장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기획도 하고 실제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 대한 궁금증은 계속 있었어요. ‘정말로 이게 도움이 될까?,’ ‘정말로 우리한테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하면서요.
그때 마침 하자에서 문화예술 진로 프로그램 기획자를 뽑고 있었어요. 저 역시 문화예술 언저리에서 진로 고민을 하고 있고 단체에서 다양한 방식의 문화예술 일자리와 진로교육의 필요성을 얘기해왔으니, 그래도 여기에서 내가 뭔가 기여할 수 있는 건 있겠다… 이런 생각을 했죠. 그렇게 판돌로 오게 되었습니다…
공유작업실 제나가 찍어준, 갤러리105 페인트 칠하던 날 죽돌들과 단감
겨자/ 일하는 게 재미있으시겠어요.
단감/ 재밌어요. 지금은 (미술) 작업을 하지 않지만, 하자에 오는 창작자들이 작업하면서 하는 고민들에 공감되거든요. 또 제 관심사 자체가 문화예술 분야다 보니까, 관련 정보 찾는 것도 재밌어하는 것 같아요. 서로 재미있는 아이디어나 전시 소식 교환하는 것도 재미있고요.
그리고 하자는 판돌에게 기획의 자율성을 많이 주는 편이에요. 스스로의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을 환영하는 곳이다 보니 일을 할 때도 ‘해라!’ 보다는 ‘너가 하자!고 하는 거 해보자’라는 느낌이랄까요. 제가 처음에 입사했을 때, 독립출판 릴레이 특강을 기획하는 일을 맡았어요. 처음 맡은 일이라 사실 좀 두렵기도 했어요. 옆에서 기획안을 같이 봐주시기는 했지만, 정말 이대로 진행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사 섭외와 강의 내용을 기획하는데 저에게 자율성을 많이 주셨어요. 물론 하자에 쌓인 여러 관계들과 네트워크, 탄탄한 프로그램 운영 사례들이 많았기 때문에 처음 맡은 일도 탈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고요. 또 판돌마다 맡은 사업이 다르다 보니 바쁜 시기에는 세세한 내용까지 모두 공유하기 어려울 때도 있고, 나의 결정에 자신이 없거나 판단이 쉽지 않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럴 때 도움을 요청하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손과 마음을 보태어 주시는… 그런 든든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일하는 멋진 여성, 단감
겨자/ 판돌들 뭔가 감동인데요… 인터뷰 제목이 <판을 만드는 사람들>인데, 단감이 이 말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판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내가 판을 바꾸겠다! 해오신 거잖아요. 단감은 지금, 혹은 앞으로 어떤 판을 만들고 계신가요?
단감/ 오늘 인터뷰를 하면서, 판을 나 혼자 만들고 있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든 것 같아요. 공유작업실도 정해진 프로그램이나 일정에 없던 거여도, 멤버가 ‘이런 거 해보고 싶다’ 하면 다같이 그걸 어떻게든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요. 그런 의미에서 여기 하자에 있는 누군가가 저에게 와서 ’이거 한번 해보자’, ’저기 한번 가보자’ 하면… ’같이 가서 이 영역을 조금이라도 우리의 판으로 넓혀보자’고 하면, 저도 재미있게 같이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