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돌아보면, 하자에 있던 핑크색 남자 화장실 표지판이 어떤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지금의 두루마리 휴지 디자인 전에는 남자는 핑크색 M, 여자는 파란색 W로 표시됐었거든요. 우연히 하자에 왔을 때, 그걸 보고 충격 받았던 순간이 기억나요. 제가 실제로 핑크색만 보고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었죠. 저 말고도 종종 사람들이 실수로 남녀를 바꿔서 들어갔다고 해요.
대부분의 화장실은 파란색이 남자 화장실, 분홍색이 여자 화장실이잖아요. 하자는 그걸 바꿔 놨던 거예요. 흔히 디자인을 문제 해결 도구로만 여기곤 하지만, 디자인은 문제를 발견하고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는 근사한 작업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하자는 이런 실험이 가능한 공간이구나. 그게 하자에 대한 첫인상이었죠.
겨자/ 그러고 몇 년 뒤 하자에 눌러앉으신 거네요?
봄밤/ 그 뒤로도 하자와 종종 인연이 있었죠. 2023년에는 하자 아이덴티티 리뉴얼 작업으로 하자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구요. 마침 작년 하자에서 디자인 판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죠. 그때 프리랜서 생활을 접고 판돌로 함께하게 되었어요.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그는 모험을 떠났습니다…
겨자/ 모험에 성공하신 거겠죠…? ㅎㅎ 그런데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어요.
봄밤/ 맞아요. 하자에 오기 전, 비영리단체에서 일했었는데요. 일손이 부족한 비영리단체의 숙명 탓에 디자인 툴을 다루기 시작했어요. 단체의 소식지를 만드는 일에서, 어느새 포스터를 만들고, 책을 만들다가, 급기야 모든 홍보물을 맡게 되었어요. 제가 바로 비전공자의 진로 찾기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겨자/ 저는 최근에야 디자인의 중요성을 느끼고 얄팍하게나마 공부하기 시작했거든요. (눈물) 정치외교학과에 재학하면서 레포트를 수십 장은 썼을 텐데… 아무리 노력해도 문장으로는 전달이 되지 않는 뉘앙스가 있어요. 그런데 디자인은 그걸 너무나 쉽게 전달하는 것 같은, 강력한 힘을 느껴요.
봄밤/ 그렇죠. 그런데 디자인은 굉장히 중요하기도 하고, 중요하지 않기도 해요.
겨자/ 헉. 그런가요??
봄밤/ 그래픽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과는 별개로, 실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오히려 무력감이나 공허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거든요. ‘아름다움이 진실을 가린다면 그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내 손을 떠난 디자인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과정에서 결국 독자를 속이게 된다면, 우리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렇기에 단순히 패키지나 로고를 바꾸는 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싶어요.
겨자/ 진짜 <어른>이시네요… 그 지점까지는 생각을 못 해봤어요. 봄밤은 디자인과 현실의 연결고리에 참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본질적으로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겠죠. 하자도 그렇고, 하자에 오시기 전에도 주로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는 클라이언트와 함께 해오셨다고 들었어요.
봄밤/ 변화에 방점을 찍어서 일을 했던 건 아니고, 돌아보니까 제가 해온 일들에 그런 공통점이 있었어요. 대체로 더 나은 사회를 기대하며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클라이언트로 만났던 거죠.
겨자/ 요즘 들어 생각하는 건데, 그것 자체가 참 신기한 일인 것 같아요. 가치에 함께하는 일이요. 이제 저도 직업을 선택할 나이가 되니까 더욱 실감하는 것 같아요. 가치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기도 하고, 때로는 외면해 버리기도 하는데… 봄밤의 그런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봄밤/ 그냥 하고 싶다는 마음인 거죠. 그러니까 제가 거창하고 비장하게 “이 캠페인이나 가치를 알리기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겠다” 이런 거는 절대 아니고, 그럴 위인도 아니에요. 그냥 제가 이런 것들에 끌리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재미를 느껴서 관련된 일을 해온 거죠.
겨자/ 끌리는 지점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봄밤/ 당연하지 않은 것을 하려는 사람들한테 많이 끌렸던 것 같아요. 제가 운전을 못 하는데… 대리운전 협동조합이라는 곳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했었거든요. (웃음) 모든 플랫폼 노동이 그렇듯이, 대리운전하시는 분들도 사실상 서로 경쟁자예요. 그런데 이 일의 고달픔을 서로 아니까, 오히려 동료를 만들어서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콜이 뜨면 서로 경쟁자임에도 서로 돕는... 이런 것들이 늘 기적처럼 보이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부분이죠.
겨자/ 처음에 언급하신 하자의 분홍색 남자 화장실 표지판과 연결되는 부분이네요. 당연하게 여겨지는 걸 굳이 뒤집어보는. 하자센터도 설립 당시 인류학적 배경이 있어서 그런지, 곳곳에 그런 감각이 전제된 것 같기도 해요. 마침 봄밤이 인류학을 전공하셨잖아요. (웃음)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까요?
봄밤/ 인류학에서는 다양한 사회나 문화적인 요소들을 다루잖아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실제로는 한 사회의 문화적인 각본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작업이 이뤄지죠.
겨자/ 봄밤이 설계한 하자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도 이런 점들이 고려되었을 것 같아요. 봄밤이 생각하는 하자의 멋이란 뭘까요?
봄밤/ 하자의 멋이 무엇이라고 제가 규정을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겨자/ 엇… 이러면 분량이 안 나오는데…
봄밤/ 하자가 디자인만으로 정체성을 표현하는 곳도 아니고, 저 개인이 “하자의 멋은 이런 거니까 디자인도 이래야만 해”라고 하는 것은, 반대로 하자의 멋의 기준에 따르면 되게 멋 없는 거예요. (웃음) 하자에는 여러 구성원들이 있고, 모두가 함께하자는 게 우리의 가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기관 차원의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있지만, ‘하자’라는 전체적인 상을 고정적으로 두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겨자/ **우문현답이군요.
봄밤/ 그런데 이상하게 일관성은 있단 말이죠. 그게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세련된 기성품으로 통일된 느낌을 만든다기보다는 군데군데 청소년의 창작 흔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어요. 청소년의 작업 흔적을 굳이 정리하지 않았던 것. 그런 흔적들을 이 공간에 계속 두려고 했던 것. 그런 것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도 죽돌들이 퓨처랩 유리에 시트 커팅해서 붙여놨잖아요. 그게 어떤 결과물을 전시하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 떼지 않는다면 몇 년 후까지 붙어 있을 가능성이 크거든요. 만든 사람이 스스로 “이거 너무 부끄러워서 못 참겠어!” 하면서 스스로 뗄 수 있을지언정, 큰 일이 있지 않는 한 그런 흔적들은 하자에 오래도록 남을 거예요. 그게 어떤 모습이든, 이곳에는 계속 기록되고 담길 것이라는 거죠.
하자 아이텐티티 가이드에 제가 작성해 둔 이 표현(왼쪽 사진)은 지난 26년간 하자가 걸어 온 발자취, 특히 청소년과 함께 해온 시간을 암시하는 거예요.
겨자/ 감동이에요.
봄밤/ 감동이에요?
겨자/ 요즘 인턴 콘텐츠 디자인으로 크나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제 작업물도 그 자체로 괜찮을 거라는 위안을 얻습니다…
봄밤/ 하자가 무슨 콘텐츠 회사도 아니고, 디자인 회사도 아니고. (웃음) 여기는 청소년들이 발언하고 창작하는 곳이니까, 그런 부담을 안 가지셔도 될 것 같아요.
겨자/ 감사해요… (진짜로 감동 받음)
겨자/ 요즘 또 인턴 콘텐츠 디자인을 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건데요. 본질적으로 멋이란 뭘까요? 쏟아지는 시각 작업물의 홍수 속에서 트렌디함과 하자다움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봄밤/ 글쎄요, 이것도 제가 답변을 못 할 것 같은데… (웃음) 그래도 트렌디한 것과 아닌 것이 있을 때는, 좀 구리다고 생각할지언정 실험적인 걸 택하라고 많이 말씀드려요. 굳이 하자에서까지 매끈하고 트렌디한 시각물이 나와야 하나 싶고. 하자를 팔로잉하시는 분들도 그런 생각이 들 거 같아서. 자유롭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거죠.
하자의 멋이라는 것을 설명할 때, 그 멋의 바탕이 있잖아요. 멋이라는 게 겉으로 드러나기 위해선 내면의 바탕이 있어야 해요. 그런 것들을 이해한다면, 의도하지 않아도 하자다움이 표현되지 않을까요?
겨자/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정말 많은 걸 깨닫고 가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인터뷰 제목이 <판을 만드는 사람들>이잖아요. 봄밤은 스스로, 혹은 하자에서 어떤 판을 만들고 계신 지, 혹은 만들고 싶으신지 궁금해요.
봄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쓰신 문지원 작가님도 하자 경험이 있으신데, 하자에는 교육보다는 돌봄이 있었다고 인터뷰하셨더라고요. 그 말에 크게 공감했어요. 판돌이 일방적으로 죽돌을 돌본다기보단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는 상호 돌봄 관계인 거죠. 판돌로서 경험을 해보니, 오히려 제가 배울 점이 많은 멋지고 훌륭한 죽돌들이 많았어요.
제가 이번 하자마을 성년식 사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했었는데요. 아등바등 디테일하게 행사의 전반을 준비했다고 해도, 행사의 구체적인 의미는 그 안의 청소년과 초대된 관객들이 만들어 간다는 것을 실제 행사를 진행하면서 겸손하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판”이라는 게 판돌이 모든 것을 다 만드는 게 아니고, 그 위에 올라선 죽돌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거다. 판돌과 죽돌이 나란히, 또 마주보며 함께 판을 만들어 나가는 거다.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겨자의 말
어도비 좀 깔았다고 겉멋 부리려던 겨자에게, 봄밤은 진정한 멋을 가르쳐주었다.
꾸며내기보단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보이는 걸 넘어서서 보아주는 것, 때론 당연함에 도전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