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영화와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문지원이라고 하고요. 하자에서 사용했던 이름은 원입니다. 영화 <증인> 시나리오를 썼고,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대본을 썼습니다. 지금은 <데프 보이스>라는 일본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요. 코다*가 농인 사회 안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이야기인데요. 각본을 쓰고 연출도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코다(CODA): Child of Deaf Adult 의 약자로 청각장애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를 뜻함.
하자 이야기를 먼저 해보려고 해요. 하자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저는 어릴 때부터 학교 다니는 걸 힘들어해서 호시탐탐 자퇴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어머니께 내가 왜 학교를 그만둬야 하는지 정성껏 쓴 손편지도 보내봤고요. 어머니는 한결같이 ‘그 마음은 알겠으나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공부는 계속해야 할 텐데, 엄마가 돈이 있고 아는 게 많다면 유학을 보내주거나 널 가르칠 사람을 붙여주겠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 그래서 그만두라는 말을 못 하겠다.’라는 굉장히 합리적인 대답을 하셨거든요. 학교를 다니지 않고도 학습을 이어 나갈 방법을 제 나름대로 찾아보려고 별별 짓을 다 했는데 실패했어요. ‘방법이 없으니까 학교생활에 적응해서 졸업하고 대학에 가야겠지.’라고 생각하게 됐죠. 당시에는 대학입시에 수상 실적이 중요했기 때문에 한 토론대회에 나갔어요. 그 토론대회의 결승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조한혜정 교수님(조한, 하자의 가장 오래된 주민, 하자센터 설립자)이셨고 나중에 하자센터 판돌*이 된 다른 분도 같이 구경을 오셨어요. 그때는 하자센터를 만들기 위해 임시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였는데, 저를 유의 깊게 보시고 그중 하나를 같이 해보겠냐고 얘기해 주신 거죠. 그게 바로 제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도 배움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인 거잖아요? 그래서 정작 토론대회에서 상을 받자마자 학교를 그만둔 거예요. *판돌: 하자센터 직원을 부르는 말. ‘판을 만들고 돌리는 사람’이라는 뜻.
하자에서 활동하시면서 좋은 동료도 많이 만나셨을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 제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사실 다 하자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이거든요. 예를 들면 <우영우> 두 번째 방송을 하던 날 큰 스크린이 있는 파티룸을 빌려서 친구들과 ‘우영우 잔치’를 한 적이 있어요. 우영우 변호사가 김밥을 좋아한다는 설정이 있으니까 김밥과 술을 놓고 친구들과 같이 봤죠. 그때 온 친구들도 전부 제가 하자 생활을 할 때 만난 친구들이에요. 예전처럼 자주 만나고 붙어 있지 못하지만 저에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제가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하자에서 만난 친구들인 것 같아요. 하자에는 뭔가 다른 걸 찾아 헤매다 모인 친구들이 많잖아요. 그런 동질감으로 지금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나도 진짜 저런 거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청소년기부터 영상작업을 시작하셨어요. 영화에는 어떤 매력을 느끼신 건가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비디오방을 하셨어요. 그맘때 학교생활이 많이 힘들었거든요. 일요일마다 비디오방에 가서 두세 편 정도의 영화를 봤죠. 중간에 아빠가 ‘나와서 밥 먹어’ 하시면 둘이 제육 덮밥 같은 거 시켜서 먹고. 계속 영화 보다가 ‘나 갈게’하고 먼저 집에 오는 식이었는데, 그 하루 때문에 나머지 6일을 버티는 느낌이었어요. 그때 많은 영화를 봤습니다만, <그랑블루>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누워 있을 때 하늘에서 바다가 내려오는 장면이 있어요. 그 장면을 보다가 ‘나도 진짜 저런 거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저런 걸 만드는 사람이 돼야지’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일단 영화를 좋아했고,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긴 것 같은 영화를 개인적으로 그렇게 좋아하진 않거든요. 그것보다는 조금 다른 느낌을 좋아하는데 그러면서도 가장 깊은 부분은 실제 삶과 연결이 돼 있는, 별도의 세상을 하나 만든다는 느낌이 좋은 것 같아요. 평행 우주가 막 있는 느낌으로요. 이 영화의 우주, 이 영화의 우주 이런 게 수천 개가 있는 느낌이잖아요.
어떤 세계관을 만들 때 즐거움을 느끼신다는 것일까요?
현실과 아주 똑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톨킨*처럼 완전히 판타지 같은 장르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예를 들면 저는 <우영우>에서도 맡은 역할이 작가지만 명대사보다는 명장면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 타입인 것 같아요. 영우와 준호가 회전문을 어떻게 도는지, 영우와 준호가 키스할 때 불을 껐다 켰다 한다든지, 영우가 법정에 있는데 고래가 헤엄쳐 들어와서 눈을 마주친다든지 이런 식의 잊을 수 없는 장면. 하늘에서 바다가 내려오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을 계속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우영우 변호사가 사는 세계는 우리 세계와 완전히 같지 않지만 깊은 부분이 연결된 어떤 세계잖아요. 그런 의미로요.
*톨킨(J. R. R. Tolkien): 영국의 영문학자이자 소설가. 저서 <반지의 제왕>, <호빗> 등.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방송 화면 캡처. ⓒENA
보통 하고 계신 일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리는데요. 작가나 감독은 많이 알려진 일인 것 같아서 조금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작가의 일과 감독의 일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미리 접하고 생각 해봤는데요. 지금 제 버전으로 작가의 일은 ‘나 자신을 어르고 달래는 일’인 것 같고, 감독의 일은 ‘다른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는 일’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작가일 때는 그 일을 끝까지 완수해 내야 하는 주체가 ‘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중간에 쓰러지거나 지치면 안 되니까 나 자신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유지한 채 이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도록 오냐오냐를 엄청 해줘야 돼요. 또 너무 나태하거나 적당히 만족하려고 하면 ‘야 정신 차려!’ 이렇게 해야 하고요. (웃음)
반면 감독의 일은 내가 생각하는, 혹은 우리 팀이 생각하는 그 그림을 사실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구현하는 일이거든요. 촬영은 촬영 감독님이 하고, 연기는 배우들이 하고, 미술은 미술 감독님이, 편집은 편집 감독님이 하고 이런 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어르고 달래면서 영감을 주기도 하고, 용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또 싸우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격려하기도 했다가 하죠. 이런 식의 포인트가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아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요. (웃음) 그럼 나 자신을 어르고 달랠 때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세요?
그러니까 이런 게 있어요. 예를 들어서 운동을 했다고 하면 몸이 약간 피곤하잖아요. 그 상태에서 저는 글은 못 쓰겠더라고요. 너무 예민해서요. 반면 영화를 위한 회의를 한다면 몸 상태가 조금 안 좋아도 함께 하는 일이니까 충분히 할 수 있거든요. 특히 영화 시나리오는 보통 한 편을 쓰기 위해 길어도 두세 달 정도를 집중적으로 쓰는데, 드라마는 열여섯 개를 써야 하니까 후반에는 제가 너무 힘들어하는 거예요. 그때부터는 저에 대한 무조건적인 오냐오냐를 해요. ‘힘들어? 힘들면 40분만 자. 배고파? 시켜시켜~' 이렇게 하면서 완주했던 것 같아요.
“39살까지만 해보다가 그때도 되지 않으면 두부의 길을 가려고 했어요.”
오랜 시간 동안 한 길을 쭉 걸어오신 건데요. 중간에 흔들리거나 다른 일을 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신 적도 있을까요?
30대 중반쯤에 이 일을 오래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가 끊임없는 시도를 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이것도 안 되나요?”, “이것도 안 되나요?” 하면서 계속 거절당하고 실패하고 엎어지고 시도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던 시기였는데요. 점점 먹고 사는 부분이 힘들어지고 이 생활을 오래는 못 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때 정한 데드라인이 39살까지만 해보자는 거였죠. 39살에도 업계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으면, 여전히 다른 데서 돈을 벌어야 하고 계속 도전하기만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때는 두부 만드는 사람이 돼야겠다’라고 생각했어요. 두부 만드는 일을 배워서 두부의 길을 가려고 했죠. 마흔부터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먹고사는 걸 해결하자, 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전에 뭐가 됐습니다. 왜 두부인가요? 두부를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꽤 좋아하고, 안 팔리면 내가 먹지. 이런 느낌도 있었어요. 두부를 만드는 과정이 되게 길고 복잡하잖아요. 중간에 뭘 어떻게 하면 순두부가 되고 뭘 어떻게 하면 다른 두부가 되기도 하고요.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혼자 하는 일이 나랑 제일 맞을 것 같다는 그런 흐릿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데뷔작 <바다를 간직하며>, 다음 영화 <헬멧>은 하자센터를 다니던 시기에 작업하신 건데요. 이 영화들이 여러 영화제 본선에 진출했어요. 어떻게 탄생하게 된 영화인가요?
하자센터 영상방에 갔더니 반짝반짝한 카메라와 편집기를 갖다 놓으셨더라고요. 하자에 처음 오고 1~2년 정도 지나 20살쯤 됐을 때였는데요. 저랑 세 명의 친구가 카메라 한 대와 그동안 모아둔 30만 원을 갖고 신촌에 갔어요. 밤새 신촌에서 네가 연기할 때 내가, 내가 연기할 때 네가 이런 식으로 카메라도 돌려가면서 게릴라 느낌으로 터프하게 만든 영화가 <바다를 간직하며>예요. 말씀하셨듯이 반응이 좋았어요. 영화제에 한 번 냈는데 계속 초청되어서 또 연결되는 식으로 (영화제에) 잘 갔거든요. 전체적으로 호평이었고 평론가들의 진지한 리뷰가 나온다든지 반응이 굉장히 좋았죠.
<헬멧>은 전작보다 조금 더 영화의 꼴을 갖춘 것을 만들고 싶었어요. 영화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스태프로 끌어들이는 식으로 사이즈를 키워서 만들었고요. 내용은 퀴어*를 헬멧을 쓴 사람으로 비유한 약간 우화 같은 이야기, 퀴어 영화였던 거죠. 헬멧 쓴 사람들이 나와서 인권운동하고 운동회도 하고, “난 헬멧을 쓴 사람인데 너도 헬멧을 쓴 사람이니?” 이러면서 서로 만나는 그런 영화였는데 이것도 잘 됐어요. 여성영화제(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도 받았고 해외 영화제에도 갔고요. 제가 (작품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하자센터의 장비와 영상방 판돌*들의 지도, 또 저와 친구들의 코워크로 만든 영화예요.
*퀴어(Queer): 성소수자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
영화 <헬멧> 촬영 날, 출연 배우들
“드디어 업계로 들어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상황으로 전환된 거죠.”
나의 커리어, 내 작업의 일대기를 그려본다면 전환점이 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뭐가 있을까요?
18살 때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하자센터에 온 게 언제나 시작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고행의 길로 (웃음) “그 길로 들어가 보겠습니다!”라고 했던 시작이어서 굉장히 중요한 거죠. 그 후에 계속 단편 영화를 만들고 여기저기서 배우면서 준비를 해온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있었던 거고요. 그다음이 2013년, 처음으로 쓴 장편 시나리오가 여성영화제 장편 시나리오 피칭* 프로그램에서 상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입봉 준비를 해보겠습니다!”라며 출사표를 던진 게 두 번째인 것 같아요. 그 이후가 진짜 힘들었거든요. 정말 너무나 많은 거절과 엎어짐이 있었어요. ‘마가 꼈나? 내가 손 대면 다 엎어지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요. 그런 걸(거절과 엎어짐) 계속 반복하고 시도하고 또 시도하다가 두부 생각 같은 걸 구체화하고 있을 때, 2016년 롯데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증인> 시나리오가 상을 받아서 영화가 된 것이 세 번째인 것 같네요. 드디어 업계로 들어가서, 그러니까 밥벌이 따로 하면서 이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이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상황으로 전환된 거죠. “친구들아, 이제 더 이상 그 전단지 알바를 나에게 억지로 시켜주지 않아도 돼. 편한 알바생을 써” (웃음) 이렇게 말해도 되는 기점인가 봐요. 공모전 당선 후부터 일이 들어왔고 그때 들어온 일도 무수히 엎어지고 안 되고 했지만, 그중에 <우영우>가 있었어요. 성공해서 그렇지, 들어온 일 중에 그냥 하나였죠. 그래서 2016년이 또 다른 기점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총 세 번이겠네요.
*피칭(Pitching): 영화업계에서 주로 창작자가 시나리오를 제작사 및 투자사 등에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소개하여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을 말함.
창작자에게는 피드백이 원동력이 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요. 기억에 남는 피드백이 있으실까요?
이 질문을 보고 가져왔는데요. 저도 몰랐지만 이런 문화가 있더라고요. 드라마 팬분들이 본인들의 리뷰를 모아서 보내주신 거예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리뷰북
와. 드라마 팬분들의 커뮤니티 같은 게 있는 건가요?
그런 것 같아요. 스스로를 ‘고래단’이라고 부르시면서 여기저기서 리뷰를 모아서 보내주셨어요. 이 리뷰북은 여러 사람의 리뷰를 모은 책인데요. 정독했습니다. 리뷰북 말고도 블루레이 디스크 만들 때나 촬영이 끝날 때도 선물을 보내주셨고요. 리뷰북도 선물과 여러 굿즈를 함께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포장을 뜯기 전에 사진을 찍고, 뜯은 후에 또 찍어뒀죠. 이걸 담기 위한 상자도 새로 사서 보관해 놓았거든요. SNS를 하면 이런 걸 인증할 수 있는데 제가 SNS를 하지 않다보니 자꾸 저 혼자 감사하고 끝나서 이번 기회에 한 번 말해봅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어떤 일을 이루는 데는 운이 7이고 인간의 재주가 3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면 그만큼 좌절이나 실망하는 일도 생길 것 같아요. 그럴 때 어떤 방식으로 그 감정을 다루고 어려움을 이겨내려고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이 일의 애로사항, 어려운 점은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 100만 원을 갖고 찍는 것과 100억을 갖고 찍을 때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완전히 다른 종류란 것이에요. 만약 100억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찍고 싶다면, 자격 증명을 먼저 해야 한다는 특이점이 있어요. 근데 이 자격 증명이 골치 아픈 게 뚜렷하지가 않아요. 공무원 시험처럼 몇 점 이상이면 오케이, 같은 기준이 있는 게 아니고 실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이나 운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그 경쟁이 굉장히 치열하죠. 그리고 꼭 돈의 문제가 아니라 100여 명의 스태프가 저 사람은 감독이다, 작가다, 라고 인정할 수 있는 자격이 필요한 거잖아요. 그게 일단 쉽지 않다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그 자격을 얻게 됐을 때 하게 되는 일은 내가 막 죽을 둥 살 둥 뭘 하나를 만들어서 갖고 오면 스태프가 다 달려들어서 평가를, 크리틱을 해요. 이게 별로 재미없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여기가 늘어지고 이런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되게 힘들거든요. 온갖 종류의 비판을 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근데 듣는 게 힘든 것을 수습하는 건 둘째 치고 이 중에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를 구별하는 것도 되게 어려워요. 그리고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는 걸 어떻게 적용하지? 하는 것도 노하우와 경험이 필요하고요. 그래서 이 과정이 힘든데 이거를 계속하는 게 이 일이에요. 그렇게 완성해서 세상으로 나가면 전 국민과 그거를(크리틱을) 하게 되는 것이 이 일의 특성이다.
저 같은 경우에는 안 해본 방법이 없는데요. 예를 들면 처음에는 모든 비판을 다 수용해보려고 했어요. 그랬다가 ‘내가 이걸 다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되게 오만한 생각이구나’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렸고, 단점을 고치는 것보다 장점을 살리는 쪽이 더 낫다는 걸 생각하는 데도 굉장히 오래 걸렸어요. 장단점을 구분하는 연습도 또 되게 오래 걸려요. 그리고 (비판을 수용할 때) 감정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작품과 나를 자꾸 분리하는 연습을 하죠. ‘작품이 구리다고 내가 구리다고 하는 건 아니잖아?’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훈련도 하고요. 이렇게 안 해본 방법 없이 갖은 수를 쓰면서 지금까지 왔는데 무슨 방법이 좋더라, 라는 건 없는 것 같아요. 결국 계속하다 보니까 맷집이 세져서 좀 나아지는 것이다… 너무 끔찍한 얘기를 지금 제가. (웃음)
그 무렵 제가 제일 많이 기댔던 말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일을 이루는 데는 운이 7이고 인간의 재주가 3이다. 조금 더 멋있는 말로 하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 이런 뜻인 거니까 나는 노력을 하는데 그게 되고 안 되고는 하늘이나 운 같은, 다른 무언가가 결정하는 것이니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거나 하자. 안달복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 이런 식으로 그 말을 거의 가훈처럼 품고 자신을 다스렸던 것 같습니다. 걱정되네요. 이 일을 다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웃음) 근데 이 일이 가져오는 장점은 모두 아시잖아요. 잘되면 부와 명예를 얻고 (웃음)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성취감이 있죠.
그 다음 질문이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 오신 이유였는데요.
저도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나는 너무 짝사랑을 하는 것 같아’라는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영화를 나 혼자 사랑했다. 한 20년을. (웃음) 나 혼자 계속 구애하고 가까워지려고 하고 자꾸 환심을 사려고 하고, 영화는 답이 없는 이런 느낌인데요. 그래서 사랑해서 그렇다, 그게 정말로 대답인 것 같아요. 내가 진짜 만족해서 ‘이걸 만들었으니까 이제 진짜 그만해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을 만들 때까지 가보자. 그거죠.
원의 작업실 모습
앞서 입봉 준비를 하시던 시기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이야기 해주셨는데요. 하고 싶은 일만으로 먹고 살 수 없을 때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부모님은 되게 열심히 사시는 분이지만 서민이시고, 저는 학교를 자퇴한 순간부터 만둣가게에 취직해서 용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몇 년 있다가는 독립하고 제힘으로 살았는데요. 어떤 전략이었냐면, 우선순위는 영화나 드라마를 위한 일을 하는 시간에 둔다. 그리고 먹고살기 위한 돈을 버는 일은 짧게 해서 최대한 조금씩 오래 쓰는 전략으로 버틴다. 이거였거든요. 여러 알바를 했지만 주로 영상 제작하는 일을 했어요. 하자에서도 행사 촬영, 편집하는 알바를 많이 했고요. 그런 일을 해서 얼마를 벌었으면 그걸 '아, 그걸로 한 사람이 살 수 있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금액으로 적게 쓰면서 최대한 시간을 버는 거죠. 그런 형태의 전략으로 살았고요.
한 번은 <증인> 시나리오를 쓸 때가 지금처럼 더운 여름이었어요. 집에 에어컨이 없었거든요. 낮에 너무 더워서 일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낮에는 자고 밤이 되면 낮 동안에 얼려둔 수건을 목에 두르고 시나리오를 썼어요. 그렇게 한 두세 달 정도를 확 썼는데 매일 밤낮이 바뀐 채 일을 했더니 몸이 아프더라고요. 아픈데 그 두세 달 동안에 (생계를 위한) 일을 안 했잖아요. 그래서 아픈 몸으로 알바를 가기 시작하는 거죠. 카메라를 둘러메고 촬영해서 밤새워 편집하고. 그렇게 해야 할 때 ‘오래는 못 하겠다’ 이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그래도 이런 게 있습니다. 예술인복지지원 같은 게 있어요. 나라에서 예술인을 지원해 주는 거예요. 아주 급한 일이 있을 때 돈을 빌려준다든지, 몇 달 동안 몇십만 원씩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도 있고요. 또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하는 창의인재동반사업이라는 프로그램도 있어요. 8개월 동안 매달 100만 원씩 주면서 멘토링도 해주는 프로그램이거든요. 너무 좋잖아요. 8개월을 시나리오를 쓰거나 단편을 찍고 나서도 알바하러 갈 필요가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내가 뭔가 준비해 볼 수 있는 시간과 돈을 주는 프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런 정도로 어렵게 살고 있으면 나라에서도 혜택을 줘요. 세금도 깎아주고 근로 촉진을 위한 지원금을 가끔 주기도 하고요. 그런 식으로 살 방법은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그 와중에 신경 쓰려고 한 것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문화생활은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절대 거기에는 아끼지 말자. 먹는 걸 안 먹더라도 저한테 인풋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투자했어요. 그러다 공모전에 당선되면서부터 하고 싶은 일만 해도 돈이 들어오는 삶이 시작된 것이죠. 너무 슬픈 얘기만 한 건 아니겠죠? 제가 되게 부티 나게 하고 있었다, 라고 써주세요. (웃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방법도 있다.”
괜찮을까요? 하고 싶은 일 계속해도.
그럼요. 전 괜찮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렇게 살았는데도 괜찮다고 생각하는걸요. (웃음) 진심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불확실하고 불안한 시대잖아요. 시대랑 상관없이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니까 그 불안 속에 제가 두부냐, 영화냐 거의 이 정도의 끝에 몰렸을 때 자꾸 되뇌었던 게 운칠기삼과 진인사대천명. 어차피 되는지 안 되는지 내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게 묘하게 마음이 편해져요.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고 결국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하늘이든 운이든 그것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불안을 줄이는 데 조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방법도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진심으로 좋아해 보려고 하는 것도 방법이다. 저는 초등학생 때 버스 기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었는데 똑같은 버스 기사라도 이 일을 좋아하고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운전은 진짜 다르거든요. 그 사람의 표정, 태도, 삶의 질까지 되게 달라져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버스 운전인데 이 일을 좋아하는 것까지 해보면 어떨까, 이런 식으로 접근해 볼 수도 있고요. ‘첫 번째로 좋아한 일은 영화였는데 되지 못했어. 그럼 두 번째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해야지’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요.
다른 인터뷰이 분들도 비슷한 얘기를 해 주셨어요. 통하는 맥락이 있는 것 같네요.
근데 모두에게 적용되는 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제게 병이 있거나 장애가 있었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 같은 방식으로는 못 했겠죠. 병원비로 들어가는 돈이 있고 내가 원할 때 확 알바해서 몇백을 벌어 올 수 없다면 내 상황과 함께 가는 다른 방법을 고민했을 거예요. 두 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세 번째나 네 번째로 하고 싶었던 일을 꺼내와야 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다 해! 나도 하는데 너는 왜 못 해!’는 절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성숙도나 안전망에 따라서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이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딴따라’라고 붙잡혀서 머리 깎기던 시대에 20년을 그렇게 한다면 "20년 했는데 아직도 성공 못 했으면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됐을 테지만 지금은 예술인복지제도가 있고 창의인재사업이 있어서 나라에서 작은 돈이라도 주는 시대잖아요. “해 봐 그럼! 어휴 정말 언제 성공할래!” (웃음) 이런 거를 하는 시대, 무엇보다 하자센터가 있는 시대고. 지금 또 (하자에서) 예술가 청소년 지원도 하신다니까. 돈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인풋을 준다는 거잖아요. 그런 게 있는 시대에 버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만약에 이런 지원을 하나도 못 받는 이방인이었다. 이건 또 다른 얘기거든요. 그래서 그런 사람한테 막 “노력해!”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죠.
원은 하고 싶은 일이 없던 적이 없으시죠?
네. 저는 그런 타입의 사람인 거죠. 하고 싶은 게 너무 빨리 있어서 오히려 학업에 방해가 되는. (웃음)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는 데 그게 큰 방해가 된 타입의 사람이라서. 근데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는 분들도 많죠. 그래서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는 전략은 어떨까. 저는 진짜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괜찮은 전략인 것 같아요. 어때요? ‘내가 하는 일을 한 번 좋아하기까지 해볼까’라는 건 결이 진짜 다르거든요.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게 뭐가 됐든 사람이 빛이 나고 그래요.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청소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오늘 한 이야기에 대해 고민은 돼요. 고생을 강조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쿨시크하게 얘기하기도 하잖아요. “했더니 되던데?” 이렇게요. 그래서 저는 아예 솔직하게 이야기해 본 건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