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돌 노트>는 하자센터에서 '판돌(판을 만들고 돌리는 사람)'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만나, 판돌들의 커리어와 일터로서의 하자에 대해 이야기 나눈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세 번째 인터뷰이는 학습생태계팀에서 작년과 올해 온라인 <서울청소년창의서밋>을 기획하고 진행한 판돌 흐른을 만나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음악을 해오던 뮤지션이 판돌이 된 사연, 흐른이 바라보고 느끼는 하자의 문화, 청소년과 프로젝트를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등등! 질문해보았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 하자에서는 보다 수평적인 소통을 위해 본명/직급 대신 하자 이름(별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인터뷰에 등장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는 <프로젝트> 게시판에서 자세히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판돌 노트 기획자 편 - 흐른
#학습생태계팀 #서울청소년창의서밋 #음악작업장 #별명문화 #뮤지션 #하자냥
안녕하세요. 흐른! 자기소개와 팀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흐른입니다. 2017년에 들어왔으니까 벌써 5년 차가 되었네요. 하자에서 하는 일은 작년하고 올해 <서울청소년창의서밋> 총괄을 했고 또 판돌이나 죽돌1) 대상으로 성평등 감수성 교육이 필요할 때 성평등 감수성/공존 감수성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업무는 아니지만, 하자를 오가는 길냥이(하자냥)를 돌보고, 하자냥 인스타 계정도 운영하고 있어요.
학습생태계팀을 소개하자면, 저도 '학습생태계'를 하자에서 처음 접한 말이었는데 '한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배움이 전 일생에 걸쳐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배움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 저희팀은 2018년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청소년들과 매체 기반으로 소통하고 배움을 만들어나가는 일들, 예를 들면 <문제없는 스튜디오>, <음악작업장>, <10대 연구소> 등 장기 프로그램을 주로 운영해왔어요.
1) 죽돌: 하자에서 활동하며 일을 배우고 학습하는 청소년
하자센터를 평소에 어떻게 소개하시나요?
다른 분들에게 하자를 소개할 때 가장 쉽고 간단하게는 청소년 기관이라고 소개해요. 하자의 문화로 설명할 때는 하자 이름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고요. 하자에서는 누구나 하자 이름을 만들어서 청소년들과도 부르고 직급이나 지위로 부르지 않는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그러면 외부 분들도 하자가 어떤 것을 지향하고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 같거든요. '나는 센터장한테도 물길이라고 불러.'라고 이야기 하곤 하죠. (웃음)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제 친구가 트위터에 "얼마 전 처음으로 갑과 을이 아닌 계약서를 썼다"고 올렸더라고요. 그것만으로도 엄청 많은 것이 달라지는 느낌이라고요. 저는 "하자도 계약을 할 때 갑과 을이 아니라 센터와 파트너로 해"라고 멘션을 달았죠. 하자 안에서는 당연한 건데,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이런 작은 차이가 하자를 만들어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어요.
흐른은 뮤지션으로서 음악을 오래 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고 또 하자에서 어떻게 일하게 되셨나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아서 밴드를 하는 게 막연한 로망이었어요. 그러다 대학원에서 논문을 '여성 록 음악가'에 대해서 쓰기로 했는데, 그때 참여 관찰을 하게 된 거예요. 참여 관찰을 위해 여성 음악가들을 만나면서 나도 현장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음악으로 이름을 남긴다는 것보다는 그냥 한 번 무대에 서고 싶고 내 노래를 만들어보고 싶고 참여 관찰도 해야지, 하면서 시작했는데 저도 진지해진 거죠.
그러다 보니 음악을 전업으로 하면서 다른 일은 아르바이트 정도만 해왔어요. 예를 들면 방송국에서 파견직으로 국제뉴스 관련 일을 하기도 하면서요. 그런데 많은 뮤지션들이 그렇듯 음악활동으로는 거의 돈을 못 벌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 일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고, 그러면서 구직활동을 다시 시작했어요.
저는 학교에서 여성주의 활동을 했다 보니 하자센터를 여러 가지로 잘 알고 있어서 하자의 문화나 지향하는 가치라든지 그런 것들이 익숙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하자에 이런 채용공고가 올라왔다고 친구가 공유해줘서 그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때는 구직 생활이나 서류작업을 거의 안 해봐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제출하는 것부터 조금 서툴렀을 거예요.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하자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하자 판돌들은 명함 만들 때 6가지 디자인 중에 고를 수 있잖아요.2) 흐른은 어떤 그림을 고르셨나요?
저는 이건데요. 따뜻한 색, 차가운 색이 다 같이 있어서 좋기도 하고 임팩트가 있다고 생각해요. 또 단순해서 좋았던 것 같기도 해요.
처음 하자에 들어왔을 때는 연말 비전회의3)를 돕는 역할을 했어요. 그리고 <학부모대학>4)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제가 보조를 했죠. 보조를 하면서 하자의 사업이나 청소년 관련 담론에 대해서 좋은 오리엔테이션이 됐던 것 같아요. 여러 연사들이 오셔서 강연을 했는데 제게는 그게 좋은 온보딩이었어요.
그리고 이듬해에는 청소년 영상작업자인 마나와 함께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영상을 만들기도 하고... 또 그때 예술인복지재단에서 하는 '예술인파견지원사업'에 하자가 예술인들이 파견되는 공간으로서 참여를 했었는데요. 하자에서 잘 보지 못했던 예술인들과 함께 하자 안에서 어떤 식으로 문화활동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창의서밋에서 발표도 하고, 청소년 그룹들과 워크숍을 하기도 했어요.
2019년에는 음악작업장 첫 해 빌딩하는 일을 후멍(학습생태계팀 판돌)과 같이 했고요. 그리고나서 2020년부터 <서울청소년창의서밋>을 맡았어요. 그냥 뭐... 이것저것 다 한 거죠. (웃음) 기회나 제안이 있을 때 할 수 있겠다 싶으면 이것저것 다 해봤던 것 같아요. 전에는 그게 콤플렉스가 되기도 했어요. 어떤 판돌들은 특정 사업이나 브랜드를 가지고 쭉 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나의 전문성은 뭐지?'라는 생각도 했는데. 지금은 좀 생각이 바뀌었어요. 하자에서 하는 기획이라는 것이 어떤 기획을 해도 경험이 되는 거고 유연하게 이것저것 해볼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요즘은 그런 고민을 덜 하고 있어요.
3) 비전회의: 매년 11월경 하자의 한 해를 돌아보고 다음해를 준비하는 회의. 5주간 주 1회 일정을 기본으로 진행합니다.
4) 학부모대학: 서울시교육청에서 2015년부터 진행한 학부모 대상 교육과정
올해는 창의서밋과 입촌식을 진행하셨잖아요. 창의서밋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서울청소년창의서밋>은 청소년 의제를 사회로 발신하는 축제의 장이에요. 그래서 사회로 발신하고 싶은 의제가 있는 '청소년 펠로우'를 모집해서 그들이 자신의 아젠다를 서밋에서 발표할 수 있도록 멘토링하고 지원해줘요. 창의서밋은 그런 것들을 펼쳐 내보이는 무대가 되는 거죠. 아젠다라는 게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주장이 될 필요는 없고요. 예술, 일상, 정서적인 것이나 캠페인일 수도 있는 그런 모든 것들을 포함해서 청소년의 목소리를 사회로 발신하는 무대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2020년부터는 코로나 상황으로 2년 연속 온라인으로 진행했어요.
창의서밋 펠로우5)는 청소년이 기획과 실행의 전 과정을 경험해본다는 게 중요해요. 창의서밋은 하자에서도 큰 행사라 청소년들이 기획해야 하는 세부 프로그램 자체가 어느정도 수준을 요구할 수밖에 없거든요. 저희도 펠로우들에게 멘토링을 촘촘하게 제공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펠로우 청소년들에게는 기획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진하게 경험하는 그런 계기가 되는 것 같아요. 나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프로젝트를 관객 앞에서 선보이고 소통한다는 점에서 성취감이 큰 것 같아요.
그리고 서밋의 참가자 입장에서는, 양질의 프로그램을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청소년 축제예요. 양질의 프로그램을 무료로 들으면서, 다른 청소년의 생각도 듣고 네트워킹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해요. 오프라인에 올 수 없는 여러 청소년이 온라인으로 접속해서 하자를 좀 더 알게 되고,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거죠.
5) 창의서밋 펠로우: 창의서밋에서 청소년의 목소리와 이슈를 담은 프로그램을 기획/진행하는 청소년 파트너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할 때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어떤 프로그램이냐에 따라 다르고 어떤 시점에서 참여하느냐에 따라서도 다른 것 같아요. <음악작업장>의 경우에는 초기 빌딩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팝업프로그램을 열면서 여기에 오는 청소년들이 누구인지 수요를 파악하고, 누구를 향해 말을 걸어야 할지,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지 그런 것들을 탐색하는 과정이 중요했어요.
창의서밋 같은 경우는 펠로우들이 내가 여기서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성장했다는 성취감을 느끼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하자의 중요한 행사기 때문에 잘못하면 프로그램의 퀄리티를 위해 펠로우를 다그치거나 컨트롤하게 되기 쉬워요. '이런 것 가지고는 안 돼요.' '아직 경험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이건 제가 잘 알아요.'라고 말하기 쉬운데 그렇게 하지 않고 펠로우들이 납득하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장 효과적이고 좋은 방식으로 다듬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노력했어요. 근데 생각보다 쉽지 않은 면이 많죠. 좋은 (서밋의) 세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과 청소년들이 그 과정에서 성장했다고 느끼는 게 정말 어렵고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서밋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020 창의서밋 당일 개막식 모니터링중인 흐른
기획을 잘 하는 팁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일단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명확해야 해요. '지구를 살리자' 이런 식의 추상적이고 뭐든 담을 수 있는 것보다는 구체적일수록 좋은 것 같아요. 대상도 파악해야 하고요. 기획을 해서 진행하다 보면 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경우는 많이 없고 변수가 많다 보니 그런 것들을 대처할 수 있도록 기획을 짜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짠 대로 하지 않으면 틀어지는 방식이 아니라, 변수가 생겼을 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기획이 좋다고 생각해요.
하자에서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최근 일을 얘기하자면 작년 창의서밋 끝났을 때가 생각나요. 창의서밋을 처음 맡았고 하자에서 온라인 행사를 그렇게 크게 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너무 긴장했어요. 심지어 전임자가 같은 팀도 아니었거든요. 우리 팀(당시 커뮤니티 디자인팀)에는 창의서밋 일을 해본 사람이 없었고, 담당자인 저도 처음이고 또 온라인으로 해야 했었죠. 그때는 또 나름 의욕이 넘쳐서 타임테이블도 복잡하고 공이 많이 들어갔는데요. 그게 끝났을 때 거의 울 뻔했어요. 그때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그리고는 하자냥이들 중에 노랑이와 함께 지냈던 시간들이 기억에 남아요. 하자가 저에게 매력 있는 직장이라고 생각하는 건 조직문화나 일의 보람, 같이 일하는 사람과의 신뢰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사소한 것에서 많이 채워지는 것 같아요. 제가 하자냥이들을 돌볼 수 있고 거기에 대해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지지해주는 것. 그런 게 가능한 직장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자의 지향과 조직문화와 다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요. 다양한 존재가 공존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서로를 돌보고 서로가 성장하는 문화. 사회적인 소수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애정어린 시선을 주고 돌보는 그런 것들이 연결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흐른이 운영중인 하자냥 인스타그램 계정
하자 일약속6)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제일 마음이 끌리는 건 '잡담하자'예요. 제가 그런 걸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봐요. 부수적인 것들, 하자의 조직문화도 중요하지만 길고양이를 돌볼 수 있는 소소한 것들이 만족감을 준다고 했잖아요. 잡담하자도 비슷한 맥락인데, 어떻게 보면 잡담이 일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거든요.
살림집 2층에서 날씨 좋을 때 의자에 기대면 좋아요. 흔들의자도 있고 암체어도 있어서, 기회가 있을 때 잠깐 앉아서 생각하면 좋더라고요.
마지막으로, 판돌로서 일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판돌이 되면 좋을까요?
다른 사람의 피드백이나 의견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건데,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런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성평등 감수성, 소수자 감수성 이런 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변화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유연해야 하는 것 같아요. 하자센터가 서울시 위탁기관이다 보니, 시의 변화에 따라서 일 처리 방식 같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