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써지지 않는 글감을 쥐고 밖을 나섰다.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엘리베이터를 누르지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10층까지 오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려서 비상구 계단에서 신발 끈을 묶었다. 나는 대충 엘리베이터 봉을 잡고 한 발로 서서 꺾인 신발을 펴곤 했는데 A가 습관처럼 비상구 계단에서 신발을 고쳐 신는 걸 1년 가까이 보고 나니 나도 어느 순간 걔를 따라 하고 있었다. 자, 2시까지는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30분 안에 글을 마감하는 거야. 오래 붙잡아봤자 더 쓸 말도 없을 거야.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선선한 여름 공기를 맞았다. 산책 코스는 언제나 A의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을 찍고 오는 것. 양팔을 좌우로 흔들며 출발했다, 가방도 물병도 없이. 언제나 선명한 산책의 리듬에 집중했다.
산책으로 생각이 비워지거나 정리되는 건 어떻게 가능한 걸까. 몸의 일이 마음이나 정신의 일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을까. 땀방울 하나마다 생각 한 줄기가 고구마처럼 뽑혀 나갔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엉엉 울게 될까. 눈물도 땀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며, 평평지구론자나 명왕성을 다시 행성의 지위로 복귀시켜야 한다는 사람들과 연대할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서 우는 일만큼이나 마음의 온 근육을 움직여야 하는 운동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 A, 너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새냐며 운동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 너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운동이 싫은 게 아니라, 무력하게 누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일에도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단 말이야. 운동이 싫은 게 아니라···.
공원에 가면 항상 앉는 그 벤치에 앉았다. 에어팟에서는 로이 하그로브의 Strasbourg / St. Denis가 흘러나왔다. 제목 말이야, 파리 지하철역 이름이래. 그렇게 들으니까 파리 시내에 온 걸 환영하는 재즈 같지 않아? 음악에 별 조예가 없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눈을 감고 노래에 집중하는 네 몸의 흔들거림을 망연히 바라봤던 적이 있다. 네 리듬은 흐릿해. 흐릿해서 서러워. 산책처럼 규칙적이고 선명한 게 좋아. 알 수 없는 건 싫다고 해명하고 싶었다. 같이 앉아 있었던 벤치가 끝도 없이 길게 느껴졌다.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고민하고자 나선 거였는데 머릿속이 더욱 뒤죽박죽됐다. 혼자라는 사실에는 언제쯤 익숙해질까. 나는 또 매드 사이언티스트처럼 인간에겐 운명의 짝이 있고 인연은 붉은 실로 묶여 있어서 인간은 사실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운명이나 인연 따위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우리는 홀로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거라고 위로해 주고 싶다. 누구를?
재즈가 왜 좋은지 잘 모르겠어. 곡의 진행을 예상하기도 어렵고 연주하기에 따라 느낌이나 분위기가 다 달라서 리듬을 타기가 힘들어. 그렇게 말하면 A는 그거야말로 정말 좋은 거라고 해줄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알 수 없는 건 싫다고 변명하는 건 결국 어렵게 됐고, 그 불규칙, 불투명, 예측할 수 없음을 사랑했다고 인정해야 했다.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한다. A는 더 이상 이곳에 살지 않으니까. 확실히 눈물과 땀은 같을 수 없나보다. 울면서 돌아오는 길 내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꼬인 생각들은 하나도 정리되지 않고 더 부피를 키우기만 했다. 내일은 좀 뛸 것이다. 그리고 그 동네로 더는 가지 않겠다고도 다짐했다. 장소는 너무나도 선명해서 괴로우니 말이다. 그리고 그게 A를 그리워하는 완전한 방식일 수도 없을 것이다. 알 수 없이 흔들거리게 되는 그 재즈만으로 A를 그리워할 수 있다.
어쨌거나 노래에도 리듬이 있다.
글 · 사진_ 다정(하자글방 죽돌)
2024년 가을학기 하자글방 후속모임 〈둥글레차〉는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함께한 시간을 간직하기 위해 차(茶)를 글감으로 진(zine) 『오래 우린』을 만들었습니다. 오래 우려낸 차의 맛과 오랜 우리의 이야기가 담긴 진은 둥글게 둘러앉은 자리로 독자를 초대합니다. ‘From. 하자글방’에서는 차에서 시작해 산책을 거쳐 노래로 도착한 릴레이 글 일부를 소개합니다
From. 하자글방
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3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가운데 일부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