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기꺼이 알아봐주기
저는 하자작업장학교를 시작으로 창작지대, 러닝크루 등을 거쳐 올해 시유공까지 하자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답니다. 그만큼 크고 작은 일상을 하자와 함께했는데요, 그 안에서 배운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을 문득 해봅니다.
올해 저는 소속의 무게는 줄이고 느슨한 연대 속에서 프로젝트를 꾸리는 일에 중심을 두었는데요, 그중 가장 큰 프로젝트는 '사적인 졸업식'을 올리는 일이었어요. 학교 밖에서 보낸 시간을 스스로 알아봐 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학교 밖의 시간 속 중심이 되었던 하자에서의 일들을 자연스레 되돌아보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하자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OOO은 무엇일까를 떠올려보니 어떤 것을 호명하고 명명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동료가 되고 새로운 순간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하자에서는 늘 자기 자신과 서로를 알아봐 주는 일에 힘쓰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어떤 것을 알아봐 준다는 것은 그것이 땅속에서 나와 싹을 틔우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알아봐 주고 이름 붙이고 싶은 순간이 있으신가요? 하자에서 보낸 시간은 어떤 시간으로 기억하고, 부르고싶나요? 저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알아봐 주는 힘을 기른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리고 우리 안에는 불러주지 못한, 그래서 아직은 힘을 내지 못하고 있는 순간, 관계, 마음과 같은 것들이 참 많다고 생각해요. 이번 연말에는 많은 일을 함께 이겨낸 우리가 느슨한 연대 속에서 서로를 기꺼이 알아봐 주며 안부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 이외에도 내 주변과 속의 많은 것을 챙겨주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희덕 시인의 <속리산에서>라는 시를 빌려 여는말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시 또한 새로운 것을 알아봐 줄 수 있게 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통신을 나누는 우리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이일지라도 서로의 순간을 흠뻑 응원해 봐요.
시유공 죽돌 제이 드림
<속리산에서>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