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가 아닌 게임으로 배우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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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센터 토요진로학교 ‘게임을 통해 보는 세상’


 

"우리 임금이 또 깍였잖아. 최저임금법을 만들자"

"비정규직은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다는데? 난 정규직이 되고 싶어."

 

머리를 맞댄 11명은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계약직, 정규직, 최저임금 등 노동 관련 단어들이 쏟아져나온다. 한참동안 논의가 끝나질 않자, 중재자가 나선다. “서로 필요한 것을 먼저 이야기해볼까요?” 그제서야 한 명씩 차례대로 우선순위를 정해나간다. 정책회의, 포럼에서나 볼 법한 광경. 지난 5월 27일, 영등포 하자센터(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에서 운영하는 ‘2017 토요진로학교’에 참가한 청소년들의 모습이다.
 

◇직업 체험이 아닌 공동체 가치를 배우는 ‘토요진로학교’

 

이날 게임에 참여한 이들은 한성여자중학교 학생 11명. 이들은 교과서가 아닌 게임으로 민주주의와 정치활동을 체험했다. ‘2017 토요진로학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 ‘게임을 통해 보는 세상, 게임학교’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민주적인 방식으로 법안을 발의하고 채택하면서 변화시키는 게임이다. 지난 5월부터 진행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청소년 수는 50여명에 달한다.
 

하자센터는 연세대학교가 서울시로부터 수탁 운영하고 있는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공식명칭)다. 청소년 진로 활동 지원이 주요 사업이고, 게임학교는 ‘토요진로학교’의 프로그램 중 하나다. 하자센터의 진로교육 프로그램은 직업이나 직종 체험 교육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적기업 등 사회적 경제 주체, 지역 공동체, 교육 관련 단체 등과 협력해 지속가능한 삶과 공동체 가치를 공유하는 교육 개발을 목표로 한다.

 

게임학교에서 진행하는 ‘헬조선 리셋 게임’은 월간잉여 편집장 최서윤씨가 개발한 ‘수저 게임’을 청소년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한 게임이다. 수저게임은 ‘헬조선’, ‘노오력’ 등 현실을 자조하는 청년들이 활발한 정치와 토론, 연대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개발된 게임이다. 게임 개발에 참여한 김지빈 하자센터 담당자는 “청소년들이 교과서나 영상이 아닌 게임이라는 친숙한 미디어를 통해 향후 현실 공동체에서 사회적 활동을 계획하고 제안하는 역량을 키울 것을 기대한다”며 “현실 사회와 자신의 관계 속에서 진로를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게임으로 민주주의를 배운다… ‘헬조선 리셋 게임’

 

1라운드부터 4라운드까지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세금을 내거나 월급을 받는다. ‘진짜’ 게임은 5라운드부터다. 한 라운드당 한 개의 법안을 채택해 사회의 규칙과 구조를 바꿀 수 있기 때문. 기회는 총 5번. 청소년들은 매 라운드마다 20여분간 토론과 투표를 거쳐 법안을 만들었다. 6라운드에선 나은(15)양이 발의한 ‘정규직전환법’이 시행돼, 모든 플레이어들은 정규직이 됐다.게임 현장을 한참을 지켜보니 무언가 색다르다. 보통 게임은 플레이어가 임무를 수행하거나 목표를 달성하면서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이 게임에선 노력이 아니라 계급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 계급은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나뉘는데 이 역시 제비뽑기로 정해졌다. 출발점도 다르다. 금수저는 건물과 현금칩을 가지고 게임을 시작하지만, 흙수저는 자산이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다. 일명 ‘헬조선 리셋 게임’. 9라운드로 진행되는 게임에서 흙수저가 금수저를 역전할 수 있는지가 관전 포인트다. 세상에서 가장 불공정한 게임인 셈이다.

 

공부만 잘하면 될 거라 생각했던 청소년들은 낯선 상황에 처하자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계급에 따라 성공 확률이 달라졌기 때문. 흙수저로 게임을 시작한 혜정(15)양은 “대학 등록금 낼 돈이 없어요”라며 은행에서 코인 칩을 빌리고, 발목에 모래 주머니를 달았다. 뉴스에서만 접하던 정규직, 비정규직 단어가 쓰여진 스티커를 팔다리에 붙이기도 했다. 반면 금수저의 상황은 달랐다. “다음 라운드에선 월세를 올려야겠다”고 말하던 금수저(건물주) 나빈(15)양은 흙수저 역할을 맡은 친구들에게 눈총을 받기도 했다.

 

게임을 마친 청소년들은 “다른 게임 및 교육과는 차원이 달랐다”며 입을 모았다. 기존의 진로체험은 특정 직업을 소개 하는 교육에 머물고 있다. 게다가 이렇게 체험하는 직업조차 기성세대의 기준으로 좋은 직업이라고 선택한 것이다. 학생들의 흥미와 적성을 고려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필요한 상황이다. 학생들은 “토요진로학교에서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해줬다”며 앞다퉈 소감을 전했다.

 

혜정(15)양은 “금수저가 돈을 많이 가져가긴 했지만, 게임처럼 우리사회에서도 금수저들이 다른 사람을 위한 법들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게임을 진행한 임명현 하자센터 청년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학습촉진자)는 “아르바이트생 역할을 맡은 친구가 채연양 혼자라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라며 사회 참여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윤상혁 한성여중 교사는 “누군가 제시한 조건에 맞게 개인이 열심히 공부해서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 자체를 사회 구성원이 재구성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2017.06.29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7기) 나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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