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이행 공간'으로서의 하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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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과정으로서의 진로

2024년은 하자센터가 태어난 지 25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하자센터는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한국사회에 어떤 의미였을까요. 이런 궁금증을 안고 한 해 동안 다양한 분들을 만나보니, 25년간 하자센터가 생산해 온 사회적 영향력(social impact)이 하자라는 공간의 경계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하자를 거쳐 간 죽돌들과 판돌들이 구축한 수많은 사회적기업과 소셜벤쳐, 대안학교와 글방, 커뮤니티와 예술작품들이, 이미 우리 사회를 많이 바꿔왔기 때문이죠.

 

하자센터가 25년 동안 변화해 온 것처럼, 글자 그대로 나아갈(進) 길(路)을 뜻하는 ‘진로’ 역시, 삶의 여러 단계를 거쳐 가는 이행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여정이 표준화되어 미리 정해진 철길 위에 놓여 있던 산업화시대와 달리, 불확실성과 다양성, 자유도가 높아진 지금의 진로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연속되는 ‘로드무비’에 가까울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고 해서 이 여정이 쉬운 것은 아니죠. 특히 현대사회에서 청소년기는 학교에서 일터로 이행하는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도 있는데, 여기에 실패하는 경우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혹은 무업상태에 놓이기도 하고, 청장년기에도 잦은 경력단절을 겪다 보면 소속될만한 집단을 찾지 못해 막막함을 겪기도 합니다.

 

서 있는 자리와 설 자리, 소속집단과 준거집단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는 일터로의 이행 실패(니트)가 단순 실업(무업) 상태를 넘어 사회적 고립(은둔형 외톨이)으로 이어지는 비율이 높습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노동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사회, 어떤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을 때 느슨하게 관계에 접속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된 사회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양한 길이 펼쳐져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니 획일화된 좁은 길 위에서 무한대로 경쟁하게 되고, 그 경쟁에서 뒤처질 경우 인생 전체를 실패로 느껴 사회를 등지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현대사회에서 진로를 제대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사회와 개인 모두 상상력의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진로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과거에서 미래로만 흘러가는 ‘단선적 시간’의 비유로부터 벗어나,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행하는 ‘다층적 공간’으로서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죠. 이렇게 사고의 전환을 하고 나면 사회적 시계가 명령하는 템포에 따라 떠밀려가듯 진로를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설 자리로 어떻게 이동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스스로 중심을 잡고 이행을 도모할 수 있게 됩니다. 대기업이나 전문직종 등 소속되어야 한다고 믿는 집단이 요구하는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어떤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지를 고민하며, 가치와 판단의 준거가 되는 집단을 잘 찾아보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돌봄과 성장, 모험과 안전이 순환하는 ‘이행 공간’

25년 동안 하자센터라는 공간의 개념과 의미도 이행의 연속이었습니다. 굳이 단순화해보자면, 첫 10년 동안 하자센터는 ‘창의적인 인재와 사회적기업가를 양성하는 인큐베이터’에 가까웠습니다. 그 시기의 운영 원리는 자기주도성과 성장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10년 동안은 ‘나와 사회와 지구를 돌보는 동료시민을 육성하는 학교와 공동체’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사회관계성과 생태적 지속가능성, 상호돌봄 등이 중요한 키워드였지요. 세 번째 10년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가상공간과 물리적 공간을 포괄하는 포용적 진로 플랫폼’으로 수렴되고 있습니다. 성장과 돌봄이 선순환하고, 개인과 사회가 상호작용하며, 창의성과 안전함이 공존하는 곳이랄까요.

 

25년의 역사를 정리하려다 보니 조금 어렵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하자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죽돌들은 훨씬 명료하게 하자를 정의합니다. 글쓰기 작업장 죽돌 ‘홍시’는 하자가 ‘모험가 길드’ 같다고 말합니다. 판타지 작품을 보면 주인공들이 모험을 떠나기 직전 평온한 마을에 들러서 필요한 물건도 사고 동료들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자센터가 꼭 그런 일시적 공동체 같다는 것이죠. 유년기에서 성년기로 이행하는 청소년기, 진로활동이라는 긴 모험을 떠나기 전에 하자의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에 맞는 동료들도 만나고, 필요한 스킬이나 장비들도 준비한다는 홍시의 표현은 지금의 하자센터에 딱 맞는 비유였습니다. (인터뷰 영상 보기)

 

반면 인류학 수업의 과제를 위해 하자센터를 참여관찰하러 온 아문/윤슬/고래/모래 네 명의 대학생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하자를 ‘안전공간’이라 정의했는데요. 결론부에서 연구자들은 주류사회의 기존 질서와 어떤 식으로든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에게 하자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간이고, “하자센터가 선사하는 ‘진정한 배움’은 청소년들이 하자센터 외부 세계로 나아가, ‘자신만의 안전공간’을 창출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완성된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모험가 길드’와 ‘안전공간’이라는 두 개념은 언뜻 상충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불확실한 세계에서 진로라는 이행과정을 준비하는 모험가들이 동기와 용기를 충전하기 위해 안전한 공간과 커뮤니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릅니다.

 

25년간 하자 ‘출신’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하자’들
제가 위의 보고서에서 특히 반가웠던 점은, 연구자들이 판돌과 죽돌 모두의 노력을 통한 ‘안전공간-되기’의 다이내믹한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하자센터를 떠난 죽돌 창작자와 창업가, 어젠다워커들이 각자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하자 ‘출신’들은 문학/음악/미술 등의 예술영역에서 창작자 개인의 천부적 재능에 대한 신화를 깨며 ‘건강한 피드백 집단으로 기능하는 창작 커뮤니티와 동료’가 지속가능한 창작활동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또한 에세이나 드라마가 사회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일시적 공론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고립 상태의 청소년이나 가족돌봄청년(영케어러)이 겪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빠르게 사회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기업이 돈을 버는 일 말고도 더 많은 사회적 임팩트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은 물론입니다.

 

‘소속은 있지만 소속감은 없는’ 고립의 시대가 도래하고 ‘차별과 혐오의 무게가 공기처럼 가벼워진’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지금, 청소년과 청년들이 지금의 자신을 긍정하면서도 다음 단계로의 도전을 망설이지 않을 수 있는 공간과 커뮤니티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2025년의 하자는 하자 바깥의 이행공간들과 만나 더욱 다양하고 튼튼한 ‘사회의 진로’들을 만들어내려 합니다. 지금까지처럼, 많은 격려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2025년 1월 하자센터 아키 

 


▼ 하자마을통신 1월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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