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금요일, 하자신관1층 카페그냥에서 ‘여행자카페’가 열렸다. 작년 여름에 핀란드를 한 달간 여행하고 돌아온 주말로드스꼴라 2기 친구들이 사람들을 초대해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였다.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모교를 찾았다. 후배들로 추측되는 소녀 소년들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활기찬 분위기 속 마담의 인사와 작은 공연으로 모임이 시작되었다. 여행지에서 만든 노래를 들려줄 땐 미니콘서트 같기도, 패널들이 나란히 앉아 핀란드 무용담을 주고받을 땐 토크쇼 같기도, 그러다 찬바람에 뺨이 언 누군가 빼꼼 들어와 구경할 땐 정말 카페 같기도 했다. 노란 조명 아래 공적인 차담소가 이어졌다.
밤늦도록 해가 지지 않는 백야, 문화복합공간처럼 다양한 쓰임새로 조성된 도서관, 뜨거운 싸우나와 차가운 호수를 오가는 뜀박질, 산과 들에 열리는 베리를 누구나 따먹을 수 있다는 만인의 권리, 국회에서 일하는 어른들 포함 온 국민이 한 달간 숲에 들어가 유유자적하는 휴가철까지. 그 나라 어떻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동선이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사실 그전에 나는 샘을 섞어 그 나라에 인간이 아닌 요정이 살고 있지 않을까 했다. 훌륭한 복지시스템을 구축해 세계의 박수를 받는 모범일등국이라는 사실이 그랬고, 울창한 숲과 호수가 많다는 사실이 그랬다. 흠 잡을 데 없는 청정국이랄까, 타고난 행운의 나라랄까. 그런데 듣고 보니 핀란드 역시 한국처럼 강대국 사이에 끼어 수없는 전쟁을 치르고 식민지배 또한 당하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폐허가 된 땅 위에 광장을, 도서관을, 공원을 재건해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핀란드를 한 달간 쏘다니며 ‘사회는 고정된 게 아니라 유동적이며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것’을 목격한 의미라는 친구는 여행에서 돌아와 자신이 적을 두고 있는 대학에서 총장직선제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해가고 있다고 전했다.
핀란드에 대한 무식과 오해를 푼 자리에서 그 나라의 잔상은 내게 무릇 달라져 있었다. 구체적인 질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왜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 그만큼 바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온 국민이 한 달간 쉬면 나라가 꼼짝 없이 멈출 것 같지? 사전에 순서를 정해놓고 돌아가며 쉬면 되잖아.’ ‘소비하는 전력을 감당하지 못해 원전을 세워야 한다고? 건물을 세울 때 햇살을 최대한 이용하면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책을 읽을 수 있는데.’ 머릿속 단상에 지나지 않던 핀란드는, 어느 저녁 둘러앉은 여행자들의 이렇더라 저렇더라 하는 증언들을 거쳐 내가 원하던 것을 실재로 체현해가는, 하여 지금 이곳에서 또한 가능하다고 뱃심을 실어주는 ‘뱃속의 마을’로 자리 잡게 되었다.
광막한 숲과 움튼 호수와 한켠의 오두막, 반라 차림으로 땀 흘리며 줄다리기하는 정상들 틈에 유연하고 강단 있게 중립국의 추를 다지는 어느 싸우나실, 주인 없는 베리를 듬뿍 넣어 구운 파이와 도서관을 오가는 시민들이 번갈아 잇는 뜨개질, 한낮의 태양과 한밤의 태양과 자전거 타고 귀가하는 대통령, 누군가 파업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언젠가’라고 여기는 느긋한 시선과 나른한 햇살 받으며 유모차 끌고 산보하는 아빠들, 분장한 줄 알면서도 전율케 하는 요정언니 산타할아버지와 발길 끊어진 골짜기 너머 살고 있을 법한 무민들.
풍문으로 떠도는 ‘일류복지’의 리얼한 속살을 보고, 듣고, 먹고, 헤엄쳐본 여행자들이 날라준 오감을 재료삼아 내가 원하는 하루와 오래 간직하고픈 평온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그런, 일상의 안녕하는 감각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