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나의 스무 살을 플레이하라”
하자 토요진로학교 <사회변화게임>이 상반기 일정을 끝냈습니다.
<사회변화게임>은 청소년들이 또래들과 함께 롤플레잉 게임을 플레이한 시간이었는데요.
지난 5개월간 동고동락한 ‘게임동 크루’와 함께 그동안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게임동 크루’와의 첫 만남은 4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누가 누군가를 만나 행복해지는 드라마처럼, 게임동 크루 한 사람 한 사람도 누군가를 만나 청소년들과 게임을 하며 웃고 즐기는 각자의 이야기를 그렸을 겁니다. 아, 게임동 크루는 작년부터 하자센터가 만들어온 헬조선게임을 개발하고 게임을 통해 청소년을 만나는 준비를 해온 [나다, 달배, 보름, 상추, 여울, 장수, 지횽, 징타] 8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청소년게임 개발 모임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헬조선 하자센터 게임동 개발호
이제서 생각해보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룬 모임의 이름이 ‘게임동’이었던 건, 동이 주는 포근하고 예스러운 공간을 상상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게임동 크루 8명이 울타리를 이룬 공간에서 벌이는 청소년들의 게임판. 이른 봄 향긋하고 따뜻한 멜로드라마일 줄 알았던 게임동 크루의 이야기는 게임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땡볕이 지독히도 내리쬐는 한 여름 노트 40장 분량의 게임개발 다큐멘터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장수: 돌이켜보면.. 우리 진짜 너무 자주 만나가지고..
나다: 생각했던 것보다 자주 만났어.
보름: 만나면 기이이일게 만났어. 거의 하루의 처음과 끝을 함께 했..
상추: 에너지를 거의 뭐 쏟아부었지.
<게임동 크루 멤버들>
지난 8월 9일 그동안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회고가 열렸는데요. 이 글은 게임동 크루의 얘기를 토대로 그동안 게임에서 인상 깊었던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위주로 대화 내용을 재구성해보았습니다.
그에 앞서, 청소년들이 헬조선 게임과 벌였던 사투(?)의 현장을 살짝이나마 체험해보고 가겠습니다.
보름: 매주 토요일마다 ‘민주주의’라던가 ‘좋은 사회의 방향’ 이런 거를 각 잡고 얘기하는건 사실 부담스럽고, 가볍게 얘기하자니 이런 얘기 꺼내면 ‘너 왜 이런 얘기 꺼내?’하면서 눈초리 주는 분위기가 많잖아요? 근데 게임이라는 도구가 있으니까 편하게 자기 생각을 쉽게 얘기할 수 있고 그걸 뭐 서로에게 강요한다거나 이런 거 없이 너 생각 말하고 내 생각 듣고. 이런 과정이어서 좋았어요.
여울: 게임을 통해서 얘기를 하는게 재밌었어요. 어디 가서 얘기를 하면 요즘은 뭐 진짜 학문적인 거라도 덧붙여야 내 얘기가 정당성이 생기는 거 같고 이런데, 여기는 그냥 말하고 느끼는 거잖아요. 이론을 얘기해도 그걸 게임으로 실현하니까 오히려 (현실보다) 더 진짜 같았어요.
상추: 개발하면서 나다랑 여울이랑 의견이 대립할 때가 되게 많았고, 제 의견도 다른 사람이랑 부딪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근데 그게 엄청 사소한 거여도, 계속 맞춰가고 확인하고 다시 정립하고 그 과정이 오히려 이 관계에서 끈끈하게 얽혀가지고, 차이를 어떻게 다루고 해결할 것인지 큰 도움이 된 거 같아요. 그 자체가 개발과정에서 게임 프로세스에까지도 이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청소년의 회고(1) - 성공은 노력에 비례한다? 아니, 성공이야말로 내 노력의 증거.
보름: ‘노력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얘기가 매 회고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나왔는데,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야 할지 고민이 됐어요. 보통 그런 얘기를 한 청소년들이 게임 속에서 자수성가를 했던 플레이어들이었는데요. 자기성취가 많은 부분 운으로 결정되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더라고요. 이 게임은 노력에 관계없이 랜덤주사위로 결정되는 게임인데...
나다: 게임하고 현실하고 다른 게 게임은 끝이 있고, 내가 어떻게 해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니까 “에잇, 다 엎어버려. 이대로는 안돼" 이렇게 반응하나봐요. 근데 실제 현실에서는 끝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도 내가 좀 더 노력하면 될 거야, 하고 못 내려놓게 되지 않나. 그 당시에 왜 그렇게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청소년들에게 더 물어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여울: 저는 오히려 ‘나 혼자 노력해야지’에서 ‘같이 노력해야하는구나’로 생각이 달라지는 참가자를 봤어요. 그래서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창구가 있고 어떤 말이든 해볼 수 있는 관계에 대한 신뢰와 심리적 안정감이 있을 때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청소년의 회고(2) : 사유재산 몰수 법안. 승자 가리는 게임을 승자 없는 게임으로
상추: 마지막에 창당을 해서 평판을 똑같이 분배한 게임판도 인상 깊었고(사회점수가 높을시 평판에 의해 승자가 결정된다), 사유재산을 다 모은 다음에 공공도서관을 짓자고 이야기하기도 했었죠. 사실 처음엔 사유재산 몰수가 마지막 법안으로 결정되는 경우들이 싫었어요. 그냥 재산몰수, n분의 1 해버리자니... 근데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는 걸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어떤 결론이냐가 중요한 게 아닌 거죠. OO중 학생들도 사유재산을 한군데 모았을 때, 우려되는 점과 그 우려에 대한 대안과 관점을 활발하게 토론을 해나갔잖아요.
보름: 한 청소년이 몰수한 재산을 나눠주는 사람이 있을 텐데 권력을 갖는다고 말하는 거 아니냐라고 비판하는 순간 ‘아 맞아 그럴 수 있지’ 했는데, 반대쪽에서 그 권력을 돌아가면서 가질 수도 있는거 아니냐고 했던 말이 되게 센세이션했어요. ‘맞아... 그렇지’하면서.. 그 외에도 (청소년들의 얘기에서) 정말 배울게 많았어요.
징타: 거의 절반에 가까운 게임판에서 청소년들이 사유재산몰수를 마지막 법안으로 내놨잖아요? 그 이유가 뭘까 고민이 됐어요. 어차피 안 될 거라는 다수가 동의하는 법안에 플레이 결과가 좋던 사람들도 반항 없이 손을 들어주는 게 흥미로웠지만 단박에 이해는 안됐어요. 누군가 돈을 더 갖거나 내 돈이 줄어드는 건 싫은데 n분의 1은 괜찮다고 하니까. ‘이게 답이지?’라는 식으로 그동안의 토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데 청소년들 입장에서 비효율을 거부하는 것 같기도 해요.
달배: 청소년들은 답이 있는 상황에 익숙하잖아요? 게임을 플레이하다보면 한다고 뭐가 나아질 거 같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냥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리를 만드는 거 같아요. 답이 없는 상황을 못 견디는 거죠.
장수: 정작 그러고 나면 꼭 답을 찾았다 라거나, 이런 거 내놓은 사람들 없었죠? 하며 자축하는 반응도 재밌었어요. 사실 다들 똑같은 답을 내놓고 있는데.
기록된 아홉번의 만남, 14 개의 사회, 56 개의 법안...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다섯개의 이야기
현실을 닮은 게임을 개발하는 과정은 게임동 크루 각자의 세상에 대한 편견을 서로를 통해 발견하고 극복하는 학습의 과정이었고, 한편으로는 그 학습의 과정을 다시 디자인해본 시간이었습니다. 가상의 세상을 만들고 다시 허물어보고 재구축해보는 동안 9번의 만남, 14개의 사회, 56개의 법안의 기록이 남았지만, 기록 너머에는 게임동이 돌발질문에 대응하며 몸으로 체득하고 게임에 깊이를 더하며 수정해온 조금씩 다른 5개 버전의 게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경험이 알려준 건 이 게임의 핵심은 게임 그 자체가 아니라, 플레이어들 간의 관계라는 점입니다. 얼마만큼 내 옆의 친구들을 신뢰할 수 있고 나를 드러낼 수 있는가. 서로 믿음이 돈독한 관계에서는 그 관계만큼이나 다채로운 이야기와 제안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처음 만났거나 나를 드러내는 걸 검열하고 단속하는 관계 속에선 딱 그만큼의 이야기가 변죽을 울렸습니다. ‘현실의 룰은 항상 임시적’이라는 게임 속 세상의 도발적인 메시지는 ‘세상은 사람 사이에 있다’라는 전제 안에서 작동한다는 걸 깨달은 만큼, 앞으로 만날 청소년들과 어떻게 신뢰를 쌓고 공적지대를 만들어갈지 고민이 되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