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긴 침몰의 시간만큼이나 상처투성이인 세월호가 떠올라 뭍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수면 아래에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2014년 4월 16일 ‘그날’ 이후 1000일이 넘게 지난 지금에도요.
세월호 참사 3주기를 앞두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에 우리는 ‘그날에 우리'를 조심스레 꺼내봤습니다. 그리고 ‘그날’ 모두 다른 곳에 있었던 우리를 한 자리에 불러내준 건 SBS 캠페인을 통해 자신들의 기억을 이야기해준 오디세이학교 청소년들의 목소리였습니다.
아프고 슬픈 그날, 잊혀서는 안되는 시간들을 기억하려고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걸까요?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진실을 알기 위해서,
무기력해지지 않기 위해서,
혐오를 멈추기 위해서,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기억주간을 통해 일상을 나누는 이들과 함께 기억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오디세이학교 청소년들의 녹음된 이야기를 전해받으며, 몇명의 판돌들은 마을책방에 둘러앉았고, 작업장학교 청소년들도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기록했습니다. 하자를 오가는 여러 사람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작은 콘서트를, 말없는 글짓기를, 노란나비 작업실을,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들을 마련했고요.
동료시민으로서 서로의 곁에 서며, 사회적 재난을 멈추기 위한 동시대인으로서의 숙제를 조용히 그리고 치열하게 생각하는 마음으로요.
:: SBS ‘그날에 우리’에 참여한 청소년들의 목소리
“가족이랑 티비를 보고 있는데 큰 배가 뒤집힌 영상과 함께 뉴스가 나오더라고요. 화가 났던 것 같아요. 선장의 그 가만히 기다리라는 그 한 마디, 그다음에 무책임하게 자기 먼저 도망가는 (그 행동들이요). 그래도 어른이라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고, 역할에 맡는 일들을 수행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걸 아예 안 한 것 같아서 조금 화가 났던 것 같아요.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했냐?’ 라는 걸 한번 물어보고 싶어요. 왜 그랬는지.
저는 그래도 최소한 제가 한 행동에는 책임을 질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어요.” - 가온(정지안, 오디세이학교)
“17살 현동호입니다.
제가 세월호 쌍둥이 배인 오하마나호라는 걸 탔었는데요. 사망자 목록 보니까 그 안에 선원들도 계시던데, 아빠가 사진 작가셔서 사람들 얼굴을 잘 기억하세요. 그 안에 밴드 분들도 식사했을 때 연주해주셨던 분들인데, 그분들도 피해자 목록에 올라가 계셔서.
그분들 떠올리면 아직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으실 텐데 현장 지시가 없어가지고 끝까지 거기 계셔서 희생되셨던 분들이어서 많이 안타까워요.” - 하늬(현동호, 오디세이학교)
“그 날 희생자 학생이 핸드폰에 찍어가지고 남겼던 영상이 있는데,
마지막에 배가 엄청나게 기울어 있는 상황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복도에서 누워서 그걸 친구들과 찍으면서 옆에 있던 친구가 울면서 ‘엄마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왜 우냐’고, 그 (영상을) 찍던 친구가 ‘우리 다 살아서 나갈 건데 왜 우냐’고 그러는 거에요. 저게 만약 내 언니나 아는 동생이나 내 친구나 이런 사람이었으면 기분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감정이 막 북받치고 그러라고요.
약자를 보호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 선율(김서영, 오디세이학교)
:: ‘그날에 우리’를 따로 나누고 기록한 하자작업장학교
| 하자작업장학교 홈페이지에 실린 세월호 그날의 기억
“그 당시의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학교의 교육과정 일환으로 제주도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나를 포함한 친구들, 선생님은 뉴스를 접할 수 있는 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사고 소식을 늦게 접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듣고는 다들 충격에 빠졌다. 큰 배가, 서울에서, 제주도로 오고 있던 그 배가, 사람들을 태우고 있던 그 큰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은 뉴스를 보지 않고는 실감할 수 없었다. 세월호의 침몰 소식을 듣고 우리는 다 같이 둘러앉아 자신의 상태나 이 사고 소식을 들은 마음들을 털어놓는 자리를 가졌다. 나는 정말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내 감정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 같이 이야기를 하던 친구 한 명이 울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얼마나 무서울까, 구해질 줄 알았던 사람들은 지금 얼마나 절망적일까, 차가운 바다에서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가라앉아 가는 모습이, 그 광경을 지켜보지 밖에 못하는 가족들이, 시민들이 지금 모두 어떤 마음일까에 대해 생각하니 울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지내고 있는 제주도를 향해 오고 있던 배.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사고가 났다는 것이 슬펐다. 그날은 그냥 그렇게 슬픔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희라(하자작업장학교)
"3년 전 4월 16일은 언제나 그랬듯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밴드학원에 갔었다.
드레와 우주가 ‘여객선 침몰’, ‘세월호’라는 단어들을 얘기했다. 난 궁금해서 뭔데? 하며 물어봤다.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대”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또 “구조 작업 진행 중이라네”라고도 말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내 할 일을 했다. 그 당시에도 ‘세월호’라는 것이 배 이름인지도 모른 상태로 드레가 말한 것만 들으며 “아 그렇구나, 그럴 수 있지” 생각하며 밴드학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밴드학원이 끝나고 간 미술학원에서도 조금씩 ‘세월호’라는 단어를 들을 수 있었지만 난 “뭐, 괜찮겠지”하며 그림을 그리다가 평소처럼 집에 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신발은 엄마 신발 밖에 없었다. 그런데 티비를 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뉴스에서 보도되고 있는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이 담긴 뉴스였다. 난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판단할 수 있었고 엄마의 떨린 목소리에 내 마음도 떨렸다.
당시 우리 형의 나이는 세월호에 탄 단원고 학생들의 나이와 똑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엄마는 뉴스를 심각하게 보며 초조해했다. 그러다가 날 끌어안고 세월호 얘기를 하셨다. 나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쓸려 잠자는 방에 들어가 불을 끈 상태로 핸드폰을 켰다. 어떤 상황인지, 뉴스는 뭐라고 하는지, 인터넷에선 뭐라고 하는지 찾아봤다. 여러 얘기도 볼 수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난 그날 자기 전에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맴돌면서 그 안에 상황을 상상하며, 그 슬픔을 생각하며 누워 있다가 형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도 형이랑 같이 세월호 얘기를 하며 걱정을 하셨다. 난 자기 전까지 생각하다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다.
난 이날 무신경했다. 관심도 없었다. 이날 만이 아니라 일상 자체가 무관심했던 나였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어떤 것에 슬퍼했던 걸까 생각된다. 하자만 이날 만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대화의 내용은 조금 다를 수 있어도 했던 일은 모두 다 기억이 난다." - 정(하자작업장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