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준비했다. 시험을 준비하려 연필을 잡았더니 괜스레 일반 학교 때 시험이 생각이 난다. 내 기억 속의 첫 시험은 초등학교 2학년 시험이었다. 공부라는 것은 꿈에서도 하지 않았던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마치고 나니, 근거 없이 시험을 잘 본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문제를 되뇌고 또 되뇌어도 틀린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당연히 100점을 맞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다음 날 나는 성적이 대충 다 70~80점대라는 것을 알았고, 틀린 문제를 보니 그제야 내가 어디서 실수를 하였는지 알았다. 그 처음으로 성적이라는 개념이 왔을 때, 나는 15점 맞은 친구를 놀렸다. 나만 놀린 것이 아니라 우리 반 친구들 모두 어떻게 하면 15점이 나올 수 있냐며 놀렸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점수를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날 시험지를 자랑하듯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엄마는 내 점수를 보자 한숨부터 쉬고 난 후 누나와 비교를 하였다. 누나는 이런 시험지를 가져와 본 적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이어서 창피해서 다른 엄마들한테 내 점수는 말하지도 못하겠다는 소리도 했다. 그날 분명히 나는 기분이 좋았는데- 분명히 나는 시험을 잘 본 줄 알고 들어왔는데, 엄마 때문에 나는 좌절스러웠다. 분명 받아쓰기 시험을 보면 항상 20점 정도를 맞아서 가지고 오는 나에게는 정말 큰 점수였는데, 엄마는 생각보다 나에게 기대가 있었나 보다.
그런 식으로 몇 년 동안 준비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준비하지 않으면서 시험을 쳤다. 물론 시험 당일에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풀었다. 하지만 시험 칠 때마다 한 명씩 올백을 맞는 친구가 있었고,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에게 평균은 나왔다고 말하고 한편으로는 올백을 하지 못하는 내 머리를 탓하였다. 그러던 중 4학년 1학기가 끝날 때쯤 가정통신문이 왔다. 그 가정통신문의 내용은 학부모의 투표에 따라서 우리 학교는 시험을 폐지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다음 학기부터는 시험이 폐지되고 수행평가로 모든 과목의 매 단원마다 수행평가 시험을 쳤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엄마에게 잔소리 듣는 빈도만 배로 늘어났을 뿐이었다.
"좁아터진 교실에서 멍이나 때리고 있는 게 너무 억울한데 다들 당연히 해야 한다고 하니
나는 그 분을 풀 방법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 중학생이 되었다. 나는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명성학원이라는 곳인데, 서울 서부권 청소년들이 이름 한번 안 들어봤을 리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와 빡세다고 소문이 나 있는 그야말로 명성이 자자한 학원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예비 중1로 다니던 나는 중학생이 되기 전에 수학 1학기 정도를 선행해 두었다. 그리고 중간고사가 되자 갑자기 주말에도 나오라 하였다. 문제 푸는 속도가 느린 나는 주말 동안 내내 학원에 박혀 있어야 되었다. 어디 주말만 그리하였을까? 월, 수, 금 수학 화, 목, 토 영어 45분씩 3교시 토요일 남는 시간과 일요일은 선생님 재량……. 이렇게 학원을 다니면 학교 끝나자마자 학원 숙제를 하고 학원을 들른 후, 그렇게 토요일까지 보내고 나면 일요일에는 숙제를 대충 찍어서 가져와도 봐주니까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10시까지 학원으로 가 8시~10시쯤에 학원에서 나온다. 처음에는 미치는 줄 알았다. 내가 사람으로 사는 기분이 아니었다. 1년 전만 해도 친구랑 자전거나 타고 뒹굴 거리는 시간에 연필을 잡고 좁아터진 교실에서 멍이나 때리고 있는 게 너무 억울한데 다들 당연히 해야 한다고 하니 나는 그 분을 풀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절대로 공부에 열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3주 동안의 시험대비가 끝나고, 시험을 쳤다. 시험이 3일 동안 치렀는데 첫째 날 평균이 아마 75점 정도 나왔다. 엄마는 중학교 들어올 때부터 평균 90점만을 외쳤고, 중학교부터는 평균 90점이 안 나오면 앞으로 살아나갈 방법이 없는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 덕에 나는 보통 사람 점수인 줄 알고 살아왔던 75점을 보고 놀라고 그 당일 학원에서 다음 날 시험인 수학에 목을 걸었고 학원을 마치고는 해 뜰 때까지 도덕과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 다른 한 과목을 공부하였다. 그렇게 이틀 동안 해를 보니, 평균 90점이 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리고 나는 ‘나도 할 수 있구나! 그동안 올백 맞은 애들은 이런 느낌으로 했구나! 앞으로는 올백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올백을 해본 적도, 올백 가까이에 가본 적도 없었지만 매 시험마다 늘 올백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시험을 준비하였다.
"가장 좋았던 것은 학원이 우리 동네와 약간 멀리 있다는 점이었는데,
나중에는 학원 주변으로 안 가본 길을 찾아서 몇 시간씩 걸어 다니기도 할 정도였다."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자, 학원에서 늘 나는 억울함에 가득 차 있었다. 공부를 해야 된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공부를 하고 싶은 적이 없고 공부가 사람의 인생에 필요하다는 것을 한 번도 동의 한 적도 없는데, 지들 마음대로 공부를 해야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든 것 자체가 너무나도 나를 억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늘 누가 조금이라도 건들면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억울함으로 몇 달을 살고 있다가. 학원에 친구들 중에는 나보다 더 바쁜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영어와 수학, 두 과목만 하는데 온 세상의 억울함을 다 머금었는데, 그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학교가기 싫다고 아픈 척을 하며 때를 쓰는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반성 끝에 앞으로는 학원을 가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절대로 학원이 힘들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갑자기 학원이 재미있어지고, 정말 학원을 즐겼다. 학원을 즐기니 사사로운 것 하나에도 재미와 행복을 느꼈다. 가장 좋았던 것은 학원이 우리 동네와 약간 멀리 있다는 점이었는데, 학원이 우리 동네가 아니라서 언덕을 두 개씩 넘어가면서 자전거를 연습할 수 있었던 점도 좋았고, 우리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람 많고 건물이 큼직하고 꽉 차 있는 느낌의 길, 심지어 거기서 약간만 벗어나면 빌라단지가 나오는 것도 재미있었다. 나중에는 학원 주변으로 안 가본 길을 찾아서 몇 시간씩 걸어 다니기도 할 정도였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내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나니, 도덕이나 사회, 그리고 역사 같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과목들이 더 중요하고 더 재밌게 느껴졌다."
그렇게 학원을 즐기는 한편에 나는 각 과목별로 우리가 어떤 과목이든지 간에 그 과목을 배우는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가끔은 아빠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내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해해나갔다. 물론 그것을 이해하였다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나니, 도덕이나 사회, 그리고 역사 같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과목들이 더 중요하고 더 재밌게 느껴졌다. (외우지는 않아서 성적에는 변동이 없었다 한다.) 이렇게 나는 다른 친구들이 더 바쁘게 사는 모습을 보고 나는 나의 행복을 찾았다. 이때는 내가 정말 잘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는 나의 불만과 불행을 남의 비극으로 치료하였던 것 같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북한에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히 여기라고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얼마나 많이 들어왔으며, 초등학교에서 급식을 남길 때 아프리카 드립을 셀 수 없이 들어왔고, 닉 부이치치를 보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 것에서 멋지다는 말보다 팔, 다리 멀쩡하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라는 말을 들어왔다. 이렇게 남의 불행에서 나의 행복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 일상화되어 있고, 한편으로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래도 여기서 나는 그저 내가 믿고 싶지 않은 나에게 처한 상황을 극복하지 않고 위로하는 것에 그친 것 같다. 이건 그냥 눈을 가리고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결과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일반교과를 뒤로 미루어 두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재미있어하는 과목을 선택하는 연습 속에서 나는 내가 배우는 과목보다 대안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더 재미있고 중요하다 판단하였다. 그리고 나는 오디세이에 들어왔다.
"오디세이에서 일반교과는 달랐다.
수학을 전혀 모르는 친구에게 무언가를 정확히 이해시켜주었다는 기분이 든 순간,
나는 내 인생의 첫 100점보다 더 큰 기쁨을 느꼈다."
여전히 시험도 있었다. 솔직히 오디세이에서 배우는 일반 교과에 대해서 큰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수학 같은 경우는 약간 다를 수 있지만 다른 과목은 딱히 다를 것이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오디세이에서 일반교과는 달랐다. 수학은 1학기에는 매일 짝을 임의로 정해 서로 도와가면서 문제를 해결해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식의 수업을 통해서 남들보다 잘하고 싶은 공부가 남들도 잘하면 좋겠다는 공부로 바뀌었다. 수학을 전혀 모르는 친구에게 무언가를 정확히 이해시켜주었다는 기분이 들은 순간, 나는 내 인생의 첫 100점보다 더 큰 기쁨을 느꼈다. 2학기는 수준별로 나누어서 수업을 진행하였다. 일반 학교에서 수준별 학습은 사실 공부를 하지 않는 친구들을 거르고 수업을 듣는 친구들만 모아다가 수업을 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내가 일반 학교에서 영어 최상위 반을 다니면서 최상위반을 오지 못하는 애들을 속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영어 최상위 반을 오지 못한다는 것은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안 하는 것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디세이의 수준별 학습은 아니었다. 공부를 못하는 반 친구들에게는 쉽게 따라오지 못했을 칠판 수업을 그 친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선생님이 더 오랫동안 붙어서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셨고, 제일 잘하는 반 친구들에게는 많은 문제를 접하게 해서 남는 시간 동안 문제를 푸는 연습을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특정 누군가를 위한 수준별 학습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수준별 학습을 지향하였다. 그래도 시간적 한계 때문인지 솔직히 실력이 많이 늘어난 것 같지는 않다. 특히 1학기의 수업 방식은 나보다는 나보다 못하는 친구들의 실력이 더 향상되었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상관없다. 내 친구들이 나와 같이 공부를 할 수 있는 형식 아니었던가? 나는 이런 수업 형식 속에서 친구들은 서로를 이겨 먹고 무시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가치인데 말이다.
"중학교 동안 우리가 주로하고 있는 모의고사는
한 연구결과에 따른 글과, 브레드의 가정사를 알아보는 것 같은 것을 하면서
말하기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었다. "
다른 점은 수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어와 역사에도 다른 점이 있었다. 영어와 역사는 과목을 배우는 것을 넘어 생각해보는 과정을 거쳤다. 역사 같은 경우는 매번 수업이 끝나고 잔듸께서 질문을 주신다. 보통 질문은 오늘 배운 역사적 내용을 분석하면서 그때의 상황을 분석해보거나, 또는 역사를 예시 삼아 현재와 대입시켜보는 질문이었다. 우리는 역사 시간에 정말 깊게, 많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영어 시간에는 매번 친구들과 생각을 물어보는 시간을 가지는데, 최근에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와 그에 대한 시위, 한국의 시위 문화에 대한 생각도 영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생각해보니, 중학생 때 생각했던 영어를 배우는 이유로는 논문 같은 것을 해석하면서 정보를 얻는 부분도 있었지만, 글로벌 시대에 맞추어 영어를 배워 나의 생각과 주장을 전 세계인 앞에 주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도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우리가 주로하고 있는 모의고사는 한 연구결과에 따른 글과 초대장, 심경, 브레드의 가정사를 알아보는 것 같은 것을 하면서 말하기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었고, 심지어 내신은 본문을 외워서 가야 할 정도로 문제 많이 풀기 경쟁과 실수 적게 하기 경쟁을 하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나는 영어를 배우면서도 외국인과 문어체로 대화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공부는 하기 싫지만, 대학은 가고 싶다. 하지만 절대로 그 이유가 취업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많은 것을 볼 줄 아는 큰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시험이 다가오면 나는 전략적으로 나를 분석하고 상대를 분석한다. 내가 하자 안에서는 몇 등을 할지, 민들레, 꿈틀 다 합치면 2등급이 몇 명 정도 될지, 지금 내 실력이면 몇 등급 정도가 나올지, 등등 많은 것을 분석하고, 이쯤 되면 평소에는 관심 없던 다른 반 친구들의 공부 실력도, 다른 친구들이 얼마나 초심을 잃었는지 누가 갑자기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모두 자료 삼아 속으로 상대를 견제한다.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공부를 해야 할지 각오를 하고, 지난 학기 보다는 잘 볼 거라고 뼈에 새긴다. 맨날 어둠이 있어야 빛이 귀한 줄 안다고 나 같은 놈도 있어야 공부 잘하는 것들도 빛이 나는 거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또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이상하게 시험만 되면 전교 1등 한번 되어보고 싶고 꿈이 크다면 입 떡 벌어지는 성적을 보여줄 수 있길 바라게 된다. 시험이 다가오면 나는 정말 약아지는 듯하다. 친구가 공부를 잘하게 되었으면 한지가 언제라고 친구들을 분석하고 이겨 먹을 생각이나 하고 말이다. 이런 나를 강하게 표현하면, 나는 성적의 노예이다. 물론 나는 공부를 잘 하지 않는다. 중학교 때도 그렇고 나는 시험 직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평소에는 공부를 시험 때로 미루어 두기 바쁘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을 정도로 미루어지면 나는 최선을 다해 그날 해를 볼 때까지 최대한 독하게 공부를 한다. 이렇게 나는 아직까지도 숫자에 불과한 성적에 매달리고 있다. 나를 이렇게 성적의 노예가 되어 안에 괴물을 키우고 있는 것에는 엄마가 있고, 그 뒤에는 아무것도 보장해줄 수 없는 사회에서 그나마의 지푸라기가 되어주는 대학교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으면 안타깝기도 하다. 나는 공부는 하기 싫지만, 대학은 가고 싶다. 하지만 절대로 그 이유가 취업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많은 것을 볼 줄 아는 큰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직업에 관해서는 솔직히 나는 아직도 뭐 해 먹고 살지 정하지 않았고,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돈에 연연하지 않고 땡기는 직업을 취미처럼 바꾸어 가면서 일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단 나는 그동안 나의 최선을 다해서 이 행복을 누리고 기억에 담아둘 것이다.
나에게 큰일이 일어났을 때,
그 힘은 그 과정이 멋지든 비참하든 내가 그 일을 해결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생각해보니까,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시험을 제대로 준비해본 적 없는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시험지나 성적표를 집으로 가져가는 날은 늘 불안해야만 했다. 내가 성적표를 가져가면 엄마는 단 한 번도 좋은 표정을 해 본 적이 없다. 항상 심란하고 한숨만 푹푹 쉬고 며칠 동안 내가 쉬거나 노는 꼴을 못 본다. 예를 들면 밥 먹을 때나 게임을 하고 있을 때 틈틈이 내 성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내용은 보통 다음은 이러면 안 된다. 큰일 난다. 요런식....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난 항상 비슷한 내용의 성적표를 가져왔는데, 단 한 번도 큰일 난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항상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겁을 먹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나름 최선을 다해서 더 좋은 성적표를 만들려 했다. 재미있는 건 나는 이 생활을 벌써 10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10년 동안 “2학년 되면 진짜 초등학생 되는 거니까 구구단 잘 외우고 놓치면 안 돼.”, “4학년부터는 이제 진짜로 고학년이니까 이제부터는 공부 열심히 해야 돼.”, “6학년에 중학교 공부까지 다 하지 못하면 나중에 수포자 돼.”, “너희 누나는 중학교 때 평균 90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어.”, “내년에 고등학교 가야지? 중학교랑 고등학교는 달라.” 마지막으로는 “내년에는 복교하니까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해야지?” 이처럼 나는 긴장과 간과, 그리고 나태를 반복하면서 살고 있다. 근데 나는 생활 속에서 확실한 거 한 가지는 건졌다. 적어도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엄마가 말한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나는 그동안 나의 최선을 다해서 이 행복을 누리고 기억에 담아 둘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 아빠로부터 독립하고 나면 나에게 날지도 모르는 큰일이 일어났을 때, 좋은 힘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은 그 과정이 멋지든 비참하든 내가 그 일을 해결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