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주차미터기는 왜 뜨개모자를 쓰게 되었을까? 옥외광고기둥에 두른 목도리는 무엇에 필요한 걸까? 버스정거장에 매달려 흔들리는 저 빨간색 그네도 수상하다. 자동차소음 가득한 로터리 한가운데 교통섬에는 나무팔레트로 만들어진 소파 두 개가 버젓이 놓여있고. 조만간 그 옆에는 버려진 타이어들이 자리를 잡을지도 모르지. 건너편 보도에는 이미 타이어 몇 개가 부엽토로 채워진 채 놓여져 있다. 배추가 그 안에서 순진한 모습으로 고개를 내민다.
이 모든 것을 보며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생각없이 그 옆을 지나갈 수도 있다. 어차피 다음날이면 환경미화원들에 의해 치워져 소파며 그네도 더 이상 없을 수도 있다. 기둥을 감싼 목도리와 미터기의 모자는 사라지고, 배추도 뽑혀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다시 그대로일 것이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완벽히 금욕적으로 지어진 철과 돌의 도시에서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최소한 겉으로보기에는. 보도 옆 채소텃밭이나 손으로 직접 만든 도시가구, 그리고 초현실주의적 느낌을 풍기는 사족같은 것들(풍경에 랜드마크를 심어놓는 전문 기획들을 떠올려보자!)이 무슨 특별한 의미를 지녔을 리 없다. 그것들은 일시적인 현상들일 뿐이어서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 이것을 거대한 변화의 징표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들은 어떤 전환을, 도시 변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다.
플래시몹이나 스마트몹, 견고하고 차가운 도시 형체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외피를 입히는 게릴라뜨개질(양털폭격), 직접 제작하거나 사용 중인 의자와 벤치를 공공공간에 배치하는 체어봄빙(의자폭격), 다리 위 난간이나 지하철계단 같은 곳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눕는 플랭킹,
광고 포스터나 현수막들을 훼손하는 애드버스팅Adbusting, 유통기한이 지나 마트에서 버려지는 음식들을 찾아 먹는 덤스터-다이빙Dumpster-Diving, 흉물스럽다는 주차장 건물을 신체적 기예를 실행하는 장소로 활용하는 파쿠르Parcour, 포장된 도로변을 야생적이고 일시적인 작은 정원으로 꾸미는 게릴라가드닝Guerilla-Gardening, 거리의 배전박스를 예술작품으로 둔갑시키는 거리예술Streetart, 버려진 도시공터를 새로운 파티장소로 불러내는 아웃도어 클러빙Outdoor-clubbing 등을 통해 도시 안에서 쫓겨난지 오래되었다는 ‘삶’이 힘차게 돌아오고 있다. 현재의 시점을 사는 삶, 가능성으로 가득하며 일상을 유랑하는 흥미로운 삶이 보행로, 광장, 사거리, 주차장 위, 그리고 고가도로 아래를 점령한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귀환이지만 이 모든 것이 착각이 아니라면, 그동안 우여곡절이 있어온 도시문화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집안을 나서지 않고도 단추 하나만 누르고 데이터를 전송하는 것만으로 모든 욕구를 해결할 수 있어 모든 도시적인 것을 흡수해 버릴 것이라던 예상, 어떤 형태의 시위나 토론도 온라인상의 포럼이나 채팅방, 블로그들로 한정될 것이라는 예상, 사이버마을과 스마트시티, 텔레토피아 같은 개념들이 약속되는 시대에는 더 이상 개별적인 장소들이 중요치 않을 것이라는 20세기 후반의 미래비전 중에서 현재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인터넷은 강력해졌지만, 전능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21세기에 놀랍게도 도시 공간들이 여전히 대체될 수 없는 가치들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사실 정확히 어떤 것이 대체 불가능한 가치인지를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예를 들면 공공성과 개방성에의 욕구가 그러하다. 도시로 귀환한 삶, 또는 삶이 돌아 온 도시의 밑바탕에는 공공공간이 무엇이고 어떤 공간일 수 있는가의 가능성에 대한 변화된 인식과 자각이 깔려있다. 도시의 공공공간을 확정되고 형태가 고정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변화를 갈망하는 새로운 시작점을 위한 논란의 중심에 공공공간이 있다.
여러 도시에서 쇼핑몰업체들은 한때 모두의 공공장소였던 땅을 차지하고서 그들의 룰 아래 움직이는 소비공간들로 탈바꿈시켰다. 지자체들도 그 모델을 따라 도로와 광장들을 반(半)사유적인 사무지역으로 운영되도록 하거나, 공공건물들을 최고낙찰가에 팔아넘기는 경우가 흔해졌다. 그 밖에도 늘어나는 감시용 카메라의 수나 게이티드커뮤니티(Gated Community: 출입이 제한된 폐쇄적인 주거-생활구역)에 대한 높아지는 관심, 그리고 급속히 늘고 있는 초대형 광고판들은 공공공간들이 이전보다 점점 더 통제되고 제한되며 사적인 의도에 지배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렇게 닥치는 대로 손을 뻗으려는 사유화와 극도의 개인화에 맞서 공공공간에의 참여와 탈환, 그리고 새로운 가치매김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도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도시를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제공하기 위해서. 공유와 공동경험, 일시적인 함께 함을 욕구하는 사회는 더 이상 이전 모습의 사회가 아니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공간이 공유되는 경험의 장소가 되고, 다중적 관심사들이 결집하고 새로운 무게감을 갖게 되는 플랫폼이 되면서야, 물질적인 상품들과 부동산들로 채워진 도시의 다른 공간들은 현실적인 힘이 지배하는 영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직되고 관념의 세계에 속하게 된다. 바로 이 하이브리드적인 성격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공간을 매력적이고 대체불가능하게 만든다.
# 2. 유동성의 가치와 잠정적 상태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만들어지는 ‘이행기 공간’
눈과 손으로부터 멀어져 수많은 작용들이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숨겨진 곳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디지털모던에서 이전의 물질-패티쉬, 형태의 권력에 대한 믿음은 그 의미를 잃는다. 그에 따라 계획가들에 의해 지어진 환경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는 상태에 맞춰 자리를 펴는 법, 그리고 발견되는 기존건물들을 우리의 시대와 사용에 맞춰 변형하는 법을 배웠다. 숭고한 유토피아는 낯설고, 변화를 모색하고자 할 경우에는 실용주의에서 그 답을 찾는다. 그리고 세상은 새로 발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교리를 따른다: 이 부분을 개선하고, 저 부분에 덧붙이는 것으로 충분하며, 큰 것은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고전적인 근대가 세계의 절대적인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면, 디지털모던은 더 이상 구원을 꿈꾸지 않고, 최종적으로 축복받은 사회가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만에 하나라도 희망하는 바가 있다면, 세계 2.0 혹은 3.0, 즉 현재 상태가 보완된 버전을 바랄 뿐이며, 이 버전에는 당연히 계속해서 다음 버전들이 이어질 것이다.
이 디지털현대도 실현가능성에의 믿음에 기초하기는 하지만, 완결로서가 아닌 잠정적 상태를 표방한다. 인터넷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메타포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생각을 발전시켜나가고 확장하는 것,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고 꼬인 매듭을 푸는 것, 부서지기 쉬운 것과 유동 가능한 것이 그 속에 포함되어있고, 현재와 앞으로 올 것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 현재가 미래를 집요하게 추구하지 않는 만큼 반대로 과거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반감 또한 적다. 단선적인 모더니즘의 사고방식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위협적인 짐으로 받아들였다면, 현재의 동시성의 시대에서는 편안하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 디지털모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가변적인 것으로 생각되므로 역사가 된 것들도 다시금 다르고 새롭게 정의될 수 있고 심지어 재구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치의 이름은 유동성이다. 개념이나 고유한 ‘나’를 포함해서, 모든 것이 흐르고 있는 중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 듯 하다.
# 3. 움직임과 과정으로부터, 관계의 집합으로서 만들어지는 공공공간
근대에서 공간은 기하학적으로 정확히 묘사가능하며 최대한의 객관성에 기반해 설계될 수 있고, 확실한 경계로 닫힌 통으로 간주되었다면, 탈근대에는 공간관이 말랑하고 불확정적으로 되었다. 공간은 이미 그러한 것이라기보다는 움직임과 과정으로부터 만들어 진다. ‘관계의 집합’으로서. 결국 공간은 공간을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공간을 내화시켜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지각과 그 속에서의 행위들이 이루어지면서 공간은 비로소 정의된다.
실제로 공공공간은 사람들이 그것을 열린 것으로 지각할 때, 미완성적이고 미완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공공공간으로서 정의가 가능하다; 개인들이 그 공간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부분적으로나마, 그리고 장기적이지는 않더라고 순간적으로라도 완성시킬 수 있을 때; 사람들의 행위가 틀에 짜여지고 통제되지 않고, 공간이 그들에게 이렇게도 행동할 수 있고, 저렇게도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며, 그 행위들로 인해 공간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크게 노래를 부르며 다리를 건너거나, 한 다리로 뛰면서 계단을 오르거나, 거꾸로 광장에 걸어들어가는 등의 행위들이 한 공간을 그 순간 다른 공간으로 만든다. 개인들은 그렇게 공간을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경험하며, 그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익숙하지 않음의 형태들은 공공적인 성격의 공간들에서만 가능하다. 공공공간의 개방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그곳에서 실험해보도록 초대하기 때문이다.
# 4. 이행기적 사용의 예
자유와 제약, 그리고 사적인 이해관계와 공공적인 합의의 서로 부딪치는 갈등관계 속에 도시가 놓여있다. 공공공간이 과도하게 통제되고 있으며 특정 권력 하에 지배되고 있다고 보고, ‘도시에의 권리’(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앙리 르페브르의 개념에 기초함)를 위해 싸우는 활동가들 중에는 현 상황을 싸움이라고, 혹은 전쟁이라고까지 여기는 이들도 있다. 준 군사적인 어휘들이 붙은 그들의 활동이 특히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 도로 위에 흰색 페인트로 횡단보도를 그리는 것은 게릴라 횡단보도(Guerilla Crosswalks), 인터넷에 띄워진 표지판을 가로등에 박스테이프로 부착시키는 행위는 게릴라 길 찾기(Guerilla Wayfinding)라 불린다. 버스정거장이나 그 외의 장소에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위해 그네를 매달아놓는 것은 게릴라 그네(Guerilla Swings)이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의 여러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특정 지하철 한 칸을 점거해 그곳에 파티를 열도록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공간 납치범(Space Hijackers)이다. 낙후된 지역의 야성적으로 자라는 잡초들을 스프레이로 색칠해 미적인 효과를 내거나 방치되는 현상을 고발하는 행위는 잡초 폭격(Weed Bombing)이고, 허가되지 않은 포스터나 스티커를 통해 저항하도록 종용하는 것은 그래픽 전투(Graphic Warfare)로 불린다. 그리고 씨앗폭탄을 무자비하게 투척해 차가운 도로변일지라도 한 두 개의 꽃이 피어나도록 하는 게릴라 가드닝(Guerilla Gardening)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활동이 실제로 습격하려 하거나 점거를 하려는 의도로 군사적 어휘를 사용한다기 보다는 위장술로 이용한다는 데에 가깝다. 특히 정치적인 목표가 아닌 문화적이거나 사회적인 목적을 가지는 이들에게 ‘게릴라’라는 단어는 행위의 자립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인다: 그들은 정부와 관계되어 조종되지 않으며, 재정적인 이해관계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고, 열린 공간에서 행동하는 데에 있어 자유롭다. 꼭 형법적으로 고소당할 만한 일들을 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금지된 일을 한다는 스릴감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미국에는 변화하는 협력적인 공간관의 성격을 정의하기 위해 여러 서로 다른 개념들이 통용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전략적인 어바니즘(tactical urbanism)을, 다른 이들은 DIY-어바니즘(Do-It-Yourself-urbanism)을 사용한다. 팝업-어바니즘(Pop-up-urbanism)이나 LQC-어바니즘(‘더 가벼운, 빠른, 저렴한’의 약자)과 같은 개념들은 작은 영향력을 미치고자 함을 짚어낸다. 어느 것도 지속적이지 않고, 모든 것은 유동적이라는 교의가 여기서도 보인다. 어떤 것을 확정짓거나 교착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한 해 여름동안 마대자루나 쓰임이 없어져버린 통에 텃밭을 일구고는 다음 해 다시금 이동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자 한다.
동시에 이행기적인 행위들이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를 희망한다. 2012년 초 발티모어에서의 싸구려 페인트로 아스팔트 위에 칠해졌던 게릴라 횡단보도처럼. 사람들은 그곳에 횡단보도가 생기기를 오랫동안 바랬다. 게릴라 횡단보도는 공공기관에 의해서 빠르게 제거되었지만, 그 후 긴 찬반토론이 이어졌으며 결국에는 공식적으로 횡단보도가 설치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 시애틀에 계획된 비컨 식자재 숲(Beacon Food Forest)이나, 영국의 토드모던과 독일의 카셀, 민덴, 그리고 안데르나흐에 진행되는 프로젝트인 ‘먹을 수 있는 도시’는 야생적이고 일시적인 어반가드닝운동의 텃밭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 현장의 행정가들과 시민들이 함께 협력적이고 체계적으로, 주변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틈새녹지와 쓰임이 없는 녹지들에 화초 대신 과실덤불, 호박, 딸기, 콩, 잎채소, 또는 사과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이는 도시를 생태적으로, 그리고 미적으로 장기적으로 변화시키는 개입이며, 도시공간을 공동적으로 결정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공유지나 이행기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활동들을 호기심과 견문으로 바라보며, 무조건적인 반대나 절대적인 안티를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공간에 놀이적이고 구축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여 자신들에게 맞추어 공간을 변형시키고, 더 발전시켜나가고, 새로 정의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또 다시 인터넷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촉매제 역할을 한다. 온라인상에는 필요한 정보들이 주어지며, 그동안 우려되어왔던 도시의 익명성을 탈피한다.
수많은 시민들의 도시 공간과의 관계도 변화되고 있다. 기존의 것에 끼워맞추고, 분리하고, 덧붙여나가는, 즉 리사이클링(Recycling), 재연(Reenactment), 재생산(Reproduction), 그리고 회복(Reprise), 리믹스(Remix), 추출(Ripping), 리메이크(Remake)를 구사하는 예술가들, 열린 결말을 가진 프로세스가 되어 많은 것이 즉흥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하거나, 새로운 필요가 슬며시 들어와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하는 쓰임을 다한 건물들의 용도탈피처럼 이행기적 사용을 주도하는 건축가들, 그리고 도시운동 활동가들이 관계변화를 먼저 경험하고 시민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추정일 것이다. 도시적 공간에 대한 지각력을 높이고, 한시성의 매력에 대해 주목하도록 하고, 스스로 행동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프로젝트, 이벤트, 혁신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있었고 현재에도 진행 중이라 할지라도 결론을 속단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전체적인 사회적 가치 전환의 한 단면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공공공간에 대해서 말할 때 곧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나누는 이분법을 적용하곤 하는 전문가들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분화 되지 않은 삶, 넘나듦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실제는 많은 단계의 공공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개인을 많든 적든 보호하는 공간들과 많든 적든 공공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공간들을 구별하는 능력을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