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세계의 경계 사이 IPC(International People’s College) 2015 10월 생활 보고서
덴마크에서 맞는 본격적인 가을날의 시작이다. 캠퍼스 주변의 나무들이 노랗고 붉게 물들었다. 아름답다. 첫 학기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보내고 10월 8일, 가을학기의 나머지 10주가 시작되었다. 함께 생활하던 몇 명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맞았다. 미국, 브라질, 네덜란드, 일본, 덴마크, 독일에서 왔다.
또 수업을 고르는 시간이 왔는데 IPC에서 듣는 마지막 학기라 어떤 수업을 선택할지 고민이 많이 되었다. 내가 앞으로 초점을 맞추고 싶은 주제가 무엇인지, 남은 시간을 이 곳에서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계속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Global Challenges Line, Environmental Studies, People Movement & Migration, Current Affair, Movie Making, Band Playing, Yoga를 듣는다. 저번 학기보다 4시간 적은 30시간을 채웠다.
Global Challenges Line 수업의 마무리는 그룹을 지어 삼성, 구글, 네슬레, 아마존 등 초국적 거대기업들의 상품, 노동환경, 수입 순위 등 사회에 미치는 여러 영향에 관해 알아보고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팀에서는 몬산토를 조사해 발표했다. GMO 작물이 농가와 우리의 먹거리 환경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아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이 없었다. 유럽에서는 상품에 GMO 작물 표시를 철저하게 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유럽에서 유통되는 하인즈 케첩에는 콘시럽이 아닌 설탕이 들어가 있다. 반면 미국의 모든 주에서는 GMO 표시를 전혀 하지 않는다. 정책이 시장에 주는 영향 그리고 토종 종자 운동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이번 학기에는 1995년에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의 기능과 영향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WTO의 가장 큰 역할 두 가지, 농업협정(Agreement on Agriculture, AoA)과 지적재산권협정(Agreement on Trade-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TRIPs)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WTO에 가입한 153개 회원국들은 수입을 막지 못한다. 그래서 만약 정부가 여유가 있어서 농가에 지원금을 많이 지불하면 아주 값싼 작물들이 수출되어 수입국의 농가들은 농업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진다.
가난한 나라들은 또 오히려 정부가 도시에 지원을 하기 때문에 지역이 사라진다고 한다. Global Challenges Line을 맡고 있는 교사 게트루드는 케냐에 갔을 때 신선한 토마토를 사고 싶어도 슈퍼에서 이탈리아산 토마토 통조림 밖에 찾을 수 없었다는 경험담을 들려 주었다. 정부는 작물 가공업 공장에도 지원금을 대기 때문에 가공된 상품들을 값싸게 수출할 수 있다. 덴마크의 경우 정부가 사탕무 농가를 지원했었다. 사탕무가 사탕수수에 비해 당 효율이 떨어지지만 덴마크에서 자라기 때문에 재배하고 있다. 정부의 지원 덕에 싸게 사탕무를 수출할 수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의 항의 때문에 정부가 농업지원금을 줄여서 사탕무 농부들이 더 이상 농업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약품산업과 지적재산권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았다. 약품 부문은 지적재산권 중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낸다. 그리고 약품 산업 이익의 70%가 특허권으로 버는 이익이다. 특허를 한 번 등록하면 보통 20년간 높은 가격을 매겨 독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간이 끝나면 다른 회사들도 그 상품을 카피할 수 있어서 가격이 대폭 낮아진다. 몬산토가 생산했던 제초제 라인업에 속해 있는 약품 중 글리포세이트도 2000년에 독점권이 끝나게 되니 더 길게 이익을 내기 위해 제초제 면역 성분을 가진 작물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 종자의 한 해 사용권 특허를 팔고 있다. ‘Transfer Pricing(이전 가격 조작)’이라는 기업들이 세금을 덜 내는 방법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익에 따라 세금을 내게 되니, 이 이익을 적게 만들려고 다른 나라에 있는 관련 기업의 원재료 상품을 수입한다고 한다. 많은 기업들이 이 방법을 이용해서 세금 부담을 줄인다고 한다. 지금은 식품산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야기 나누고 있다. 알면 알수록 많은 것들이 참 복잡하게 얽혀있는 시대다.
‘Asian Culture Evening’에서 인도에서 태어나 살고 있지만 티벳 난민인 친구가 티벳에 대해 소개하는 발표를 했다. 티벳은 중국정부로부터 1950년부터 침략당해 있는 상황이지만 많은 나라들이 중국과 대규모 무역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티벳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다. 덴마크 정부도 2009년에 달라이 라마와의 만남을 공식적으로 하지 않고 비행기 근처에서 했다고 한다.
WTO 무역의 영향이 농가와 먹거리 뿐만 아니라 난민과 이주자를 만들어낸다. 값싼 작물의 수입으로 인해 농가가 파산하면 그 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부자 나라로 떠난다. 그들은 쉽게 불법체류자, 이민자가 되고 또 어느 공장 혹은 농장은 그들을 값싸게 고용한다. 잘못해서 경찰에 걸리게 되면 그 일마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People Movement & Migration 수업도 가장 기대되는 수업이다. 이 수업에서는 세계적인 이주에 대해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한다. 이주의 역사, 이주노동, 이주결혼, 난민, 정착, 이주민의 현지 기여, 그리고 국가들의 상대적인 이주 정책을 직접 학생들이 패널이 되어 의논하며 둘러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지난 수업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빼앗긴 세대(The Stolen Generation)’을 통해 역사적인 이주의 과정과 이주를 맞는 국가에서는 어떤 영향을 받는지 살펴 보았다. 18세기 영국의 산업 혁명으로 인해 대도시 인구가 증가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시달려 범죄율이 높아졌다. 수감되는 죄수들이 넘쳐나자 영국 정부는 1788년 1월 26일부터 죄수들을 식민지인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 지역에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원주민과의 갈등이 있었지만 식민지 영토를 계속해서 넓히고 백인 인구도 꾸준히 증가했다. ‘The native must be helped’라는 슬로건으로 원주민 종족 자체를 없애려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원주민 어린이들을 강제로 이민시켜 백인과 지내게 했다고 한다. 대량 이주로 인해 이전에는 없었던 질병이 옮겨와 많은 원주민들이 죽기도 했다. 그래서 1월 26일은 지금 건국기념일로 지정되어 있지만 원주민들은 ‘침략의 날’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여기에 관한 <Rabbit Proof Fence>라는 영화도 있다. 2008년에는 당시 총리였던 케빈 러드가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연설을 했는데 이 영상을 함께 보기도 했다.
이주는 인류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인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끊임없이 이동해왔다. 수업에서는 지도를 펼치고 우리들 자신과 가족들의 이주와 이동성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했다. 멕시코에서 미국 등 가까운 나라로 이주한 친구, 먼 대륙으로 이민 간 친구의 가족, 한 국가 안에서 이사한 친구의 가족 등 세계의 어떤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이동의 범위나 루트가 다르지만 몇 대가 한 곳에서만 생애를 이어온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주 요인으로는 결혼, 직장, 학업 등이 가장 크다. 나도 지금까지 학교를 찾아 이리저리 다양한 곳에서 살았다. 수업에 들어온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발적인 이주를 했다. 그러나 이제 함께 비자발적으로 이주를 해야만 하는 나라가 갖고 있는 이유, 또 이 이주를 수용해야 하는 나라의 입장, 두 가지를 두루 살펴볼 것이다. 유럽은 지금 그런 상황에 놓였고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 많다. 얼마 전 수업 시간에는 기후변화와 비자발적 이주에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키리바시의 존엄성 있는 이주와 에티오피아, 케냐,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의 가뭄과 굶주림으로 말미암은 이주를 듣게 되었다. 앞으로도 이 수업 안에서 이주에 대해 다양한 시각으로 이해하고 환대에 대해 다른 학생들과 의논하길 기대하고 있다.
10월 23일에는 ‘People Movement & Migration’ 수업과 ‘Peace & Conflict’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헬싱외르 지역의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2009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유엔기후협약회의 COP15 모델 행사를 하게 되었다. 함께 섞여 한 팀을 이루고 한 국가씩 맡았다. COP15 모델은 실제 회의와 똑같은 형식으로 협상이 진행되었다. 협상의 주요 쟁점은 기금 관리를 유엔에서 할지, 세계은행에서 할지, 기금을 어느 나라가 얼마만큼 낼지, 후진국을 제외한 개발도상국 국가들은 GDP의 몇 % 정도를 낼 것인지, 아니면 안 낼 것인지 등등 이었다. 또한 지속가능 에너지 기술을 선진국에서 얼마만큼이나 개발도상국에게 지원할 것인지 의논했다. 이미 유엔 모델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어서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어 타결을 보았다. IPC 빅홀에서 열린 유엔회의의 협상은 선진국들이 GDP의 1%를 2010년부터 지불하고, 개발도상국들은 2015년부터 똑같이 지불을 시작한다. 그리고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의 지속가능 에너지 개발을 돕고 산림파괴를 막기 위해 280억 달러를 후원한다. 지역 학생들과 만나 같이 회의를 진행해 보는 것은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지금은 10월 26일부터 시작해 2주 정도인 Alternative weeks 중간 시기이다. 중앙 유럽,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두 팀이 여행을 가고 IPC 캠퍼스에 한 팀이 남아있다. 나와 선호는 IPC에 남아서 Arts & Craft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다. 올해가 할프단 라스무센(Halfdan Rasmussen)이라는 덴마크 시인 탄생 1백주년이라 그와 관련된 전시회를 IPC 인근 호수와 숲에서 열 예정이다. 덴마크 어린이라면 누구나 읽었을 책의 작가인데다 그가 오래전 IPC 학생이었던 인연 때문에 그의 아들이 IPC에 와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고 한다. 워크숍에서 준비하고 있는 라스무센 전시는 어린이를 위한 보물찾기를 콘셉트로 잡았다. 각자 보여주고 싶은 나라의 문화 특징을 살려 아트워크를 하고 있다. 아일랜드 동화에 나오는 요정을 만드는 친구도 있고, 베트남 동화에 나오는 신발, 대만 토착민들의 조각을 따라 만드는 친구도 있다. 선호와 나는 지금 키리바시 섬을 만들고 있다. 해가 가장 빨리 뜨는 국가인 키리바시를 IPC 호수에 띄우려고 한다. 흙을 올리고 꽃씨를 뿌리고 식물을 심어서 살아 있는 섬을 만들 예정이다. 나중에 오리들이 잠시 올라와서 쉴 수 있게 작은 계단도 만들까 하고 있다. 또 내년 봄부터 다시 시작할 IPC 텃밭을 정리하는 일도 했다. 정말 오랜만에 밭에서 일을 했다.
덴마크에는 아직도 새로운 것들이 참 많다. 조한이 잠시 IPC에 들러 다함께 생태마을인 Økosamfundet Dyssekilde를 함께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IPC 캠퍼스 구석구석을 돌보고 있는 케어테이커 우베가 집을 짓고 생활하던 곳이다. 학교, 카페, 동물, 직접 지은 집,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조화로운 곳이다. 처음에는 나무 한 그루도 없던 땅에 자연과 함께 살고 싶은 이들이 모여 일을 하고 터를 만들면서 지금은 사람의 손길이 깃들어 있는 아름다운 곳이 되었다.
며칠 전에는 이른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한 친구와 같이 학교 근처 바다에 수영을 하러 갔다. 노인들이 이 추운 날씨에 맨몸으로 바다 수영을 하고 있었다. 그런 광경은 노천온천탕을 제외하고 처음 보았는데 이 곳에서는 옷을 벗고 바다에서 수영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혼자만 수영복을 입은 나만 여지없는 이방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TV에 나오는 스타들의 몸매만 보고 살아온 사람과 많은 사람의 아주 다양한 몸매를 보고 살아온 사람의 인생은 꽤 다를 것이다. 약간 충격이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건강한 문화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사라져가는 문화와 동시에 새로 만들어가는 문화를 생각하고 있다. 키리바시의 사람들이 모두 주변국가로 안전하게 이주를 한다고 해도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지켜나가는 건 큰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호수에 띄울 섬에 키리바시의 국기와 언어, 문화가 보일 수 있게 꾸미려고 한다. 영상 수업에서는 영어로 번역할 수 없는 각 나라들의 고유 표현을 담은 영상을 고나와 함께 작업하려고 한다. 브라질 포르투갈어에는 그립다는 표현보다 더 강한 ‘Saudade’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과 언어가 사라진다면 함께 공유하던 감정과 감각의 세계 역시 사라질 것이다. 다양한 문화의 아름다움을 이곳에서 많이 느낀다. 그렇지만 또 수많은 세계들이 파괴되고 사라져 슬픈 시대다. 공동체도, 생태계도, 언어도, 문화도ÿ. 오래 지나면 기억에서 잊혀지듯이 많은 것들이 경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잊기로 작정하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새로이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지금 살아가는 우리 모두다. IPC는 건강한 시민대학이라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든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잘 쓰면서 이 곳 친구들과 함께 잘 생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