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누나를 보며, 나는 누나와는 다른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매일 같이 싸우고 나와 엄마, 아빠 모두가 힘들어지는 고등학교 생활보다는 학교에서 자고 일어나며 부모님들의 영향애서 벗어나 친구들과 같이 생활하는 것을 원했다. 어쩌면 친구들과 같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기숙학교로 가는 길은 너무 험했다. 어쩌면 기숙학교로 가겠다는 나의 선택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기숙학교를 가기에는 이미 점수가 너무 낮았고, 지금부터 잘한다 한들 이미 기숙학교는 나에게서 멀리 도망간 지 오래였다.
그때, 아빠가 말했다. “간디학교는 어때?” 분명히 아빠는 농담이었고, 내가 간디학교에 가는 것을 가정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간디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나는 단순히 아빠의 농담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간디학교가 무엇을 하는 곳이기에 아빠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을까?’라는 의문으로 시작된 탐색이었다. 그리고 나는 간디학교의 시간표를 보게 되었다. 놀라웠다. 공부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디 학교의 시간표는 내가 보기에는 하루 종일 노는 시간표로 보였다. 그저 부러웠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부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어도 공부는 어지간히 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간디학교를 가는 일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 학교를 나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앞서 있었다. 반대로 농담으로 말을 꺼낸 아빠는 내가 간디학교로 가도 괜찮을 거라며 계속 간디학교를 생각해보라 권했다.
그해 겨울이 되었다. 나는 간디학교 학교체험에 찾아갔다. 나는 이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은 학교를 나와서 무엇을 할지에 관한 답변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계획이 있는 사람들만이 이 학교를 찾아왔을 거라 믿었다. 나는 내가 직접 답을 찾아볼 생각은 안하고 그 학교 사람들이라면 나에게 답을 알려주기만을 기대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간디학교체험은 그 커져버린 기대들을 져버렸다. 이 학교를 나와서 무엇을 할 거냐는 나의 질문은 벌써부터 그런 걸 생각 하냐는 말로 묻혀버렸고, 내가 사이트에서 보고 온 간디학교의 교육목적은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도 이 학교를 가서 똑같이 행동하고 있을까봐 걱정부터 생겼다. 이렇게 간디학교는 나에게서 멀어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대안학교라는 곳이 그 누구도 소중히 여기고, 그곳에 가면 모두 다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대안학교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머리 깊이 박았다.
학교체험을 다녀온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셨다.
바로, 담임 선생님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내가 대안학교를 가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관심이 많으셨다. 담임 선생님도 대안학교가 무엇을 배우는 학교인지 모르고 계셨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잘못 알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담임 선생님에게 처음으로 대안학교를 얘기했을 때, 담임 선생님은 나 같이 어느 학교를 가던지 잘 지내고 사고치지 않을 아이가 왜 대안학교를 가려 하냐고 물었다. 나는 물론이고 선생님에게 까지도 공교육에서는 대안학교가 문제아 또는 장애를 가진 친구, 임신을 한 친구 등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거나 못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진 친구들이 가는 곳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나도 아빠의 소개로 대안학교가 무엇을 배우는 학교인지 찾아보기 전까지는 사고치고 다니는 애들이나 다니는 학교로 알았다. 이름이라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있다면 바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내 친구들 모두 ‘대한학교’로 알고 있었으니. 나라에서 거의 반교도소처럼 학생들을 다루는 학교인지 알았다. 주변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나도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 담임 선생님이라면 오죽했을까? 이 상황 속에서 선생님은 충분히 궁금히 여길만했다. 이때, 내가 간디학교 체험을 학교를 빠지고 다녀왔으니, 나에게 물을 질문들이 많았고, 나는 선생님에게 나의 선택이 잘못된 것 같다는 점을 말해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이 자신도 몇 일전에 알게 된 과정이라며, 오디세이학교를 권했다. 선생님도 나도 오디세이학교에 대해서 정확히 몰랐고, 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 얼마 되지 않아서 입학설명회가 열렸다. 솔직히 말해 나는 입학설명회 때, 오디세이학교가 정확히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체감하지 못했다. 그저 오디세이학교 사이트를 찾아가본 느낌 정도였다. 넘나들며 배우기 등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말들도 많았다. 하지만 여기는 간디학교와는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는 확신을 안겨주었다. 선생님들이 직접 와서 소개해 주신 면이 있었고, ‘길잡이 선생님’등 오디세이 학교에서만 쓰이는 용어들이 오디세이학교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오디세이학교를 갈 수 있었던 이유 중에 내가 대안학교를 가겠다고 했을 때 나를 해코지 안하고 차분히 내가 대안학교를 가는 이유를 물어봐주신 담임 선생님도 있었다.
오디세이에 입학했다.
초반에는 걱정이 앞섰다. 괜히 왔나 싶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재미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도 가득 차 있었다. 오디세이에 가서 한 일이 많아 하나하나 무엇을 했는지는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처음에 했던 회의가 기억이 난다. 그동안 학교에서 한 회의는 아무도 관심 없는 주제를 가지고 빨리 집으로 가기 위해 그저 다 같이 머리를 모아 회의록에 쓸 그럴듯한 말을 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회의였다면, 오디세이에 와서 한 회의는 우리에게 직접 문제되는 주제, 예를 들면 수업시간 핸드폰, 지각 등을 해결할 방법을 다 같이 정하는 회의였고, 처음해보는 회의인지라 정신없는 토론이 되자 우리는 토론규칙을 정해 교실에다 대문짝만하게 걸어두었다. 많은 다른 활동들이 있었지만, 나는 토론이 가장 인상 깊었다.
내 말 끝에서,
친구의 말끝에서 우리만의 교칙이 생기는 경험 덕에 나는 내가 이 학교 속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느꼈다.
입학하기도 전에 있는 그 어느 교칙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오디세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머리하나에 담기 힘들 정도로 많은 활동이었고,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편집부 활동이었다. 편집부 활동은 내가 오디세이 1년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 활동이었고, 그만큼 가장 열심히 했고, 그만큼 가장 재미있었던 활동이었다. 편집부 활동은 간단히 말하면 격월로 오디세이 기사를 실은 잡지를 하나 만드는 것이었다. 별거 아닐 줄 알고 시작했는데, 그 작은 소식지를 만드는 과정에도 편집부 친구들끼리 무엇을 쓰고, 어떻게 쓰고, 누가 쓰고 등을 정하다 보니 항상 빠듯하게 소식지를 만들어 나갔다.
편집부 활동을 하다보면
무언가 내가 재미있는, 또 의미 있는 노동을 하는 기분을 받았다.
글을 쓰고 난 후에는 여러 사람들이 내가 쓴 글을 보고 재미있다, 잘 썼다 등 여러 가지로 나를 인정해주는 기분을 받을 때, 나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 그것 말고도 혼자 타는 자전거가 아니라, 같이 타는 자전거, 교통수단으로서의 자전거에 대해 배우는 것도 재미있었고, 사회 읽기 수업에서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친구들 앞에서 준비하여서 내 생각을 발표하기 등 여러 가지 쪽에서 나는 오디세이 학교생활에서 재미를 느끼며 1년을 보내왔다.
1년을 마칠 쯤 나는 오디세이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나만 열심히 1년 동안 하고 남들은 1년 동안 열심히 하지 않아서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회의 때 정한 규칙들은 나만 중요한 것 같았고, 회의에 열심히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규칙을 다 어기는 애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나는 오디세이 선생님과 상담을 하였다.
내가 물어본 내용은 대충 “재들은 나 같은 애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을까요? 왜 저렇게 맨날 규칙어기고 또 회의 하고 또 어기고 또 회의하게 만드는 걸가요? 오디세이에서는 우리가 직접 규칙을 만들고 직접 학교를 구성해나가는 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니에요?”라고 물어봤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건 내 생각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각자가 생각하는 오디세이는 다르다며, 나는 오디세이에서 규칙을 만들고 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지 모르지만 다른 친구들은 오디세이에서 쉬었다 가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다른 학생들은 오디세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고 하셨다. 그 말들을 듣고 나는 여태까지 나는 친구들을 내 관점에서만 바라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역지사지라는 말을 좋아했다. 어떤 사람이 처한 상황에서 나도 같은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다면 옹호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같은 상황이라도 충분히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미워하고 질타했다. 그 때 내가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그 상황에 있더라도 나는 규칙을 어기지 않을 텐데’ 라는 생각에 가득차서 그 친구들을 많이 미워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친구들이 어떤 부모님과 어떤 사람들을 만나가며 자라왔는지에 오늘은 또 그 친구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인디언 속담에는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기 전까지는 그를 판단하지 말라’ 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의 신발은 신기는 신었는데 걸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나도 신발 신어봤는데 별것도 아니더라, 엄살 부리지 말라” 라고 그 사람에게 말한 격이다.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오디세이를 졸업하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명지고등학교를 와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가면 중학교 때와는 달리 정말 다 다른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친구들 돈 훔치는 아이, 맨날 돈 없다면서 돈을 다 담배에다 쓰는 아이, 일베를 이용하는 아이, 학교와 선생님에게 충성하는 아이 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 이해가 잘되고 잘 맞는 친구들은 친하게 지내고 안 맞는 친구면 조금 멀리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그냥 그 친구들을 미워하지 않고 그 친구들은 어쩌다가 일탈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자, 그건 그 친구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그 친구를 이루고 있고 여러 가지 요소들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오디세이를 졸업하고 나서 키워진 것이 비정상에 대응하는 방법이다.
내가 일반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느낀 비정상은 회장 선출이었다. 성적순으로 회장을 뽑고 나머지는 투표로 정하는 것이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저 작년에도 똑같이 헸다는 것을 해명으로 내놓았다. 담임 선생님도 마찬가지 다른 친구들도 크게 착각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다들 회장을 선생님 심부름꾼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회장은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반의 의견을 학생회의에서 잘 전달할 수 있어야 하는 역할을 가진 위치이다.
난 이 부분이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누구한테는 별 것도 아닌 학급 회장 선거라도 나에게는 중요했다. 그리고 학교 내의 선거문화가 어른들 하는 선거처럼 며칠 동안 토론도 하고, 연설도 하고, 끝난 후에는 말을 얼마나 지켰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는 문화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렇게 하면 학교에서 학생들이 선거가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몸으로 배워 사회에 나가서도 투표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나는 약 11년 동안 학교교칙에 관한 공약을 내걸은 후보를 본 적 없으며, 끝날 때 자기 공약 하나라도 기억하는 당선자 없었다. 심지어는 선생님이 임의로 정한다니 나는 한 명의 시민이 되어 서울시교육청에 우리 반의 재선거와 투표문화를 바꾸어 달라는 민원을 넣었고 재선거를 하는 것이 받아들여져서 재선거를 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나와는 달리 교육청은 선거 문화가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도 뭐 다시 선거를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오디세이는 내게 일반학교에서의 나의 행동 또 나의 가치관에 대해 영향을 주었다.
난 오디세이를 다녀와서 친구들을 한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오디세이를 다녀와서 문제를 감지하고 해결하려 하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 글_왕방울(2016 오디세이학교 수료생) / 경기 교육 포럼 - '삶과 배움의 주체로서 학교 넘나들기' 발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