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 인간들의 동화책에서만 나온다 / 만약 그들이 바다에서 경주를 한다면? / 미안하지만 이마저 인간의 생각일 뿐 / 그들은 서로 마주친 적도 없다 // 비닐하우스 출신의 딸기를 먹으며 / 생각한다 왜 백 미터 늦게 달리기는 없을까 / 만약 느티나무가 출전한다면 / 출발선에 슬슬 뿌리를 내리고 서 있다가 / 한 오백년 뒤 저의 푸른 그림자로 / 아예 골인 지점을 지워버릴 것이다 // 마침내 비닐하우스 속에 / 온 지구를 구겨 넣고 계시는 / 스스로 속성재배 되는지도 모르시는 / 인간은 그리하여 살아도 백년을 넘지 못한다 (이원규 ‘속도’)
만일 들판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맹수가 나타나 나를 쫓아온다면? 당연히 재빨리 도망쳐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빨리 달려야 잡아먹히지 않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그 맹수보다 빠르게 달리면 되지요.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욱 현실적인 해답이 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보다 빨리 달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썰렁한 퀴즈지만, 경쟁이 날로 가혹해지는 세상을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과로와 탈진은 많은 현대인의 자화상입니다. 특히 한국의 스피드 숭배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요. 이유나 목적은 묻지 않고 무조건 달리기만 합니다. 어른들은 돈 버는 기계, 아이들은 점수 따는 기계로 혹사당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 게임에서 밀려나거나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고립된 섬으로 살아가기 쉽습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적개심을 품고 폭력으로 치닫기도 하구요. 맹목적인 질주는 파국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나는 왜 뛰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재난사회에서 이따금 멈춰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런 취지에서 하자센터는 2013년과 2014년에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전환과 연대’라는 주제로 창의서밋을 열었습니다. 인류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지구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바꾸고, 어떻게 힘을 모을 것인가? 절박한 질문을 가지고 생각과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문명에 대해 근원적으로 성찰하면서, 변화의 실마리를 모색하는 작업이었습니다.
2015년 하자센터는 그 흐름을 계속 이어가려 합니다. 논의의 지평을 서울이라는 메가 시티로 확대하여 대안적인 도시의 비전을 생태와 협동의 차원에서 탐구할 것입니다. 창의서밋의 경험을 토대로, 변화를 추구하는 시민들의 지혜와 열망을 공유하고 글로벌하게 연결하려 합니다. 이는 하자센터만이 아니라 여러 주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소통해야 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로서, 특히 청년들과 민간단체 활동가들의 참여가 관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마을 차원의 접근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하자센터는 지난 몇 년 동안 허브라는 공간을 매개로, 또 달시장이라는 장터를 통해 마을과의 접점을 다각적으로 마련해왔습니다. 인근 중학교와 연계하여 자유학기제 수업도 한 학기 진행했습니다. 이제 그 고리들을 정밀하게 다듬고, 유기적으로 묶으면서 마을학교를 실험해볼까 합니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함께 하는 세대간 교류가 이뤄질 수 있도록 방안을 짜고 있습니다.
그 공간은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던 사람들이 천천히 걷고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생의 좌표를 새롭게 찍어보는 쉼터이자 놀이터이자 배움터를 지향합니다. 특히 청소년들이 몸을 쓰면서 자기를 새롭게 대면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십대 시절에 생애의 전환을 연습하고, 긴 호흡으로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기력을 체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비닐하우스 속에서 속성재배하는 교육으로는 지속가능한 삶과 문명을 절대로 담보할 수 없습니다. 느티나무의 푸른 그림자처럼 존재의 뿌리를 대지와 생명에 깊게 내리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어떤 공간에 에너지가 놓이면 주변의 시공간이 변한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이론적 토대인 중력방정식의 요체라고 합니다. 이는 물리학의 명제만은 아닌 듯합니다.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도 마음의 힘이 모아지면 주변의 시공간이 변하지 않습니까.
2015년, 여러분의 시간은 부디 경쾌한 리듬과 다사로운 풍경으로 채워지길 소망합니다. 넉넉한 여백을 빚어내어 자신과 타인을 초대하기. 그 휴식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기. 그리고 관행과 습성에 대해 질문하기. 그러한 쉼표와 느낌표와 물음표가 어우러지는 자리가 다양하게 열리기를 기원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속도에 대한 강박에서 풀려나 안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기운을 회복할 것입니다.
‘느림이란 빠른 박자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느림이라는 태도란, 삶의 과정에서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나만의 보폭으로 걸어가겠다.’ (삐에르 쌍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