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사회,
아이들의 야생성을 어떻게 되살려줄까 그 첫번째 장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초청 강연회에서 오간 이야기들
지난 7월 25일 오후 3시 하자센터 신관 하하허허홀에서 열린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초청 강연회는
세월호 이후의 교육을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생각과 의지가 모여 시종 진지한 분위기였습니다.
이 날 자리를 같이 하지 못했던 분들을 위해 그의 강연과 이후 질의 및 응답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올려 드립니다.
강연 /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통역 / 조은주(동시통역사)
사회 / 김찬호(성공회대 연구교수)
오늘 강연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저에게 큰 슬픔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이번 세월호 참사와 제가 주로 강연에서 주제로 삼는 것 간에는 연관성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주로 ‘최상의 상태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고, 그 과정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연을 많이 합니다. 어제가 세월호 침몰 사건 100일이었고, 오늘이 101일째 되는 날이죠. 저도 추모제에 참석했습니다. 지워지는 노란 문신도 새겼구요.
제일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러분들이 느끼실 슬픔과 비애에 저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 소중한 어린 생명을 잃는다는 것, 그것만큼 큰 비극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소중한 생명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잃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슬프구요. 이 사건에 대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자세하게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제가 가장 관심 있게 보고 있고 또 가장 우려하는 아이들의 배움과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1차적인 이유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목숨을 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립학교 학생들과 그들의 교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 선장이 아이들에게 ‘다시 돌아가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답니다. 선장의 말을 안타깝게도 교사들과 학생들은 그대로 따랐습니다. 전 오랫동안 수학을 가르쳐 왔기 때문에 통계를 내봤습니다. 승선했던 교사와 학생들 중 77%가 결국 침몰하는 세월호와 함께 바다에 빠졌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선장의 말을 듣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갑판 위로 올라가 헬기로 구조가 되었거나 물속으로 뛰어들어 구조선들에게 구조되었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도대체 왜 학생들과 교사들은 선장의 지시를 따랐는가” 입니다. 저는 미국사람이고, 한국에 살지도 않습니다. 비극이 100일밖에 지나지 않았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지도 않았으니, 굉장히 민감한 사안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여러분들에게 양해와 허락을 먼저 구합니다. 미국 사람으로서 제 생각을 이야기해도 될까요?
제가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비극의 원인이 되었던 맹목적 순종, 이것은 제 생각에는 한국문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의 심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아시는 지 모르겠는데요. 9.11 테러 당시 첫 번째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와 충돌했을 때, 두 번째 건물에서는 “이 건물은 안전하니까 계속 업무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 지시를 따랐던 600명의 직원들은 결국 계속 일하다가 바로 20분 뒤에 두 번째 비행기가 건물에 충돌했을 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1,400여명의 직원들은 지시를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직감을 믿고 바로 건물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살아있죠. 그러나 이런 잘못된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은 미국 안에서조차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기사가 하나 났을 뿐입니다. 9.11 테러 참사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공론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번 세월호에서는 잘못된 지시가 내린 그 상황에 대해서 누구도 잊지 않고 계속 공론화되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두 번째로 비행기가 충돌했던 건물이 세계무역센터가 아니라 공립학교였다면 사망률이 훨씬 더 올라갔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끔찍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 시대를 돌아보면요. 그 당시에도 이미 나치들이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하고 있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알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당시 압도적인 다수의 독일 국민들은 명백한 증거를 외면하고 정부의 프로파간다를 믿었습니다. 2차 대전 중, 또 끝난 후에도 많은 유럽과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어떻게 파시즘이 유럽을 뒤덮을 수 있었던가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왜 인간이라는 존재는 권위에 도전하기 보다는 기꺼이 순종하게 되는지 연구하게 되었죠. 이런 연구 결과 깨닫게 된 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이미 알고 계실 수 있겠지만 한 번 해 보겠습니다. 그 연구 결과를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어떤 사회에서든 아이들을 권위에 복종하도록 권위주의적인 환경에서 기르게 되면 사회가 파시즘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부모나 교사나 사회가 자신들에게 거는 기대에 의해서 통제가 되고, 인위적인 여러 가지 규칙이나 규범 기준에 자기를 맞추게끔 강제가 되고,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면 사회가 파시즘이 되겠지요. 제가 어제 촛불추모제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잊으면 안 된다’, ‘잊지 맙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유태인들이 자식들에게 계속 하는 말입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우리가 잊으면 안 된다, 전 세계가 잊으면 안 된다고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그 때 연구에 참여했던 심리학자 중 한 명이 있었는데 본인도 독일 유태인이었습니다. 2차 대전 직전에 미국으로 망명한 학자였는데요. 미국에 와서 연구를 계속하면서 굉장히 유명해진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이라는 책을 쓰게 되었죠. 자유에로의 도피가 아닌,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제목이 매우 특이하죠. 이유를 설명한 그 사람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모든 권위주의적인 사고의 공통분모에는 자기 자신, 자기 관심사, 자신의 의사 이외의 것들, 이외의 힘들에 의해서 인생이 좌우된다는 믿음에 그 뿌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그 외부의 힘에 자신을 순응시키고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인용문을 해석해 보면, 아이들이 자유롭게 스스로 사고하고,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막히게 되면, 또 독립적인 선택을 하고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길이 막히게 되면, 이 아이들은 내면의 자유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유를 원치 않아요. 외부의 권위에 기대서 권위자나 권위세력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사고하고, 말하게 되는 것에 더 익숙해지고 거기서 안정감을 찾는 거죠.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형성할 기회도 없습니다. 결국 그렇게 되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에, 상실을 메꾸고 만회하고자 남의 인정과 칭찬에 기대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거죠. 그렇게 통제력이나 통제감을 잃게 되면, 그러면 둘 중의 하나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수동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살거나, 아니면 입장을 바꿔 자신이 충분한 권력을 끌어 모아서 ‘지시를 내리고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파시즘, 파시스트 사회의 주재료가 되는 거죠.
에리히 프롬은 위대한 교육학자 존 듀이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우리가 지금 지켜온 민주주의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다. 결국 자신의 태도. 제도 속에서 외부의 권위와 규율과 획일성,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 이런 것들에게 우리의 자리를 내주고 승리를 내주었던 사회 여건. 이것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적이다. 따라서 우리의 전쟁은 밖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 우리가 만든 제도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정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다는 거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안타깝게도 에리히 프롬은 교육이라는 제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교육에 대해서 직접적인 담론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은 듀이, 몬테소리, 밀 정도였죠. 그런데 그 다음 세대 심리학자들, 특히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학교가 아이들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직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연구와 담론에 대해서는 몇 차례 강연을 해도 모자라겠지만 두 가지만 주목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가 마틴 샐리그만(Martin E. P. Seligman)이라는 미국 심리학자의 연구인데요. 이 사람은 우울증과 우울증을 일으키는 원인에 주력했습니다. 이 우울증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우울증을 정리해보면 100% 수동적인 상태로 빠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콧구멍이 뚫렸으니까 숨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지와 의욕이 없는 상태가 우울증이죠. 개를 대상으로 샐리그만은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했는데요. 반려견을 키우는 분들에게 기분 나쁜 이야기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실험동물을 학대한 것은 아니구요. 그렇다고 아이들을 직접 실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으니까 개로 대신했던 겁니다.
개들을 두 집단으로 나눴구요. 앞발에다가 아주 약한 전류가 흐르게 했습니다. 개들에게 전기 쇼크를 준 거죠. 고통을 줄 만큼 아니고, 불편한 느낌을 줄 만큼의 전류를 흐르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서적으로 스트레스 상태에 놓이게 한 것입니다. 저는 평생 항상 개를 키워봤거든요. 반려견이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시잖아요. 개들도 감정이 있습니다. 개들도 감정표현을 합니다. 두 집단의 개를 나눠서 한 집단은 전류를 차단할 수 있는 레버가 있는 우리에 넣었는데요. 개들이 누르게 되면 전류가 차단이 되는 거죠. 또 다른 집단의 개들은 차단 버튼이 없었기 때문에 전기 쇼크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 노출시켰던 두 집단의 개를 다시 한 공간으로 모았습니다. 그곳은 굉장히 낮은 담을 건너뛰기만 하면 전기 쇼크를 피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었습니다. 스스로 전류를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첫 번째 집단의 개들은 바로 낮은 담장을 넘어서 전기 충격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전기 충격에 노출되어 있던 나머지 개들은 담을 넘을 생각도 안 하고 배를 깔고 누워서 낑낑대기 시작했습니다. 전기 충격을 피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견뎌낸 거죠. 마틴 샐리그만은 두 번째 집단 개들의 현상을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 불렀습니다.
아동 심리학자 캐롤 드웨크(Carol Dweck)도 연구를 했는데요. 이번에는 아이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서 비슷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아이들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지는 않았지요. 캐롤 드웨크는 아이들에게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고난이도의 수학을 풀게 하며 스트레스에 노출시켰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던 상황과 전혀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무기력함을 보였던 집단은 수학 신동이라고 불릴 만큼 수학에 자신이 있었던 우등생 집단이었습니다. 오히려 수학 성적이 다른 집단보다 좀 떨어졌던 집단의 학생들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받아서 끝까지 풀어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죠. 캐롤 드웨크가 내린 결론은 똑똑하고 수학 성적이 좋았던 학생들의 경우 평생 “넌 정말 똑똑해. 넌 머리가 좋은 애야”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듣다보니까 자신의 지능이 주변 어른들의 칭찬과 기대 속에서 생겨난 것이 됩니다. 지능은 자기 것도 아니고,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개와 마찬가지로 학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아이들은 지능이라는 것, 똑똑하다는 것은 어느 하나의 고정된 성질로서 타고 나면 좋은 거고, 이는 노력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더 똑똑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다른 집단의 아이들은 내가 더 배우고 노력하고 여러 가지 문제해결능력을 습득하다 보면 더 똑똑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캐롤 드웨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똑똑하고 수학 성적이 높았던 아이들의 부모들이 대체로 통제하는 성향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단원고 263명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다시 시선을 돌려서 보면 세월호에 갇혀서 물 속에 잠기게 되었던 과정을 역추적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이들을 다시 우리 곁으로 살아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엄청난 비극과 참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다면, 그래서 다시는 이런 참사가 발생하지 않게 힘을 모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시청 앞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민들레에서 출판되는 <길들여지는 아이들>이라는 책 역시 이런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참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 여기에 있고, 그 교훈이 제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더 많은 연구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런 연구 결과가 공통적으로 내리는 결론은 우리가 아이들을 고도로 통제된 환경 속에 놓아 기르고, 교육시키게 되면, 그래서 스스로 자신감을 형성하고, 통제감을 가지고 정체성을 형성하고, ‘내가 살아있는 목적이 무엇인가,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찾는 여러 가지 기회와 경험들로부터 아이들을 차단시키게 된다면, 우리는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회적, 개인적 대가를 치루는 것을 세월호를 통해 함께 겪었습니다.
물론 제가 한국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고, 한국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에 세월호의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구체적으로 조사를 해보거나 충분히 얘기를 들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세월호를 타기 직전까지 전 생애에 걸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고, 학교에서는 자신이 배움을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배울지가 지시로 내려졌고요. 그리고 그런 말을 잘 따르고 지시에 따라 잘 배우면 성적으로 보상받게 되는 거죠. 성적표가 ‘나는 다른 애들보다 똑똑하다’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증명서였습니다. 어떤 새로운 것, 흥미로운 것을 접하면서 배우게 되는 흥미진진함, 그것 자체가 동기를 부여해 준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고 개발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통제하고 계속 배우게 하는 동기는 남들의 기대였죠. 실험 대상이 되었던 아이들이나 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 만성적으로 노출되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공립학교, 일반학교 등 제도권 학교가 얼마나 나쁜지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계속해서 스트레스에 노출되고, 경쟁에 내던져지는 환경이 그들이 원하는 것도 아니고, 또 좋은 것도 절대로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아이들이 필요한 것은 그 정반대죠. 제가 일반적인, 전통적인 교육제도(conventional education)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잠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일반학교를 ‘conventional school’이라 부르는 이유는 ‘convention’ 일반적인 규범, ‘항상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어’라는 관습과 관행에 그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습과 관행이 아이들이 실제로 배우고 성장하는 실제적인 과정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거죠.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고요.
제가 <길들여진 아이들>이라는 책을 쓰게 된 또 하나의 주된 동기는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육’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부모, 교사, 사회, 정부 등이 모두 ‘교육, 교육’ 한 나머지, 교육 외에 아동기를 채우는 일을 외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책 서두도 “유년기(아동기)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오늘날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떤 외부의 힘이나 세력에 의해서, 외부 사람들에 의해서 모두 다 통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아이들이 타고난 ‘내면의 야성’. 야성이라는 것은 아이들의 혼,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는 내면의 불꽃, 창의력,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인데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 그리고 내 존재의 이유를 깨닫게 해주는 그 무엇인가가 우리 안에 다 있습니다. 물이나 햇빛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해서 시들어가는 꽃처럼 바로 그 내면의 야성이 통제를 받으면서 점점 시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들어가는 야성을 가지고 겨우 겨우 어른이 되면요. 그렇게 학습된 무기력 속에 성인기로 접어들게 되면, 몸은 어른이지만 우울증과 수동적인 삶에 빠져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교착상태에 빠진 젊은이들이 한국에는 어느 정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우울증이라는 것이 전염병처럼 20~30대에 번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항우울제 복용률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도 덩달아 우울해지는데요. 우리를 우울함에서 꺼내줄 문구를 읽어볼까 합니다. 하자센터의 존재처럼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이 될 만한 것입니다.
제 제자가 쓴 졸업 송사인데, 여러분께 송사를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이름은 코디이고, 제가 지내고 있는 알바니 해리어트 텁먼 민주 고등학교(Harriet Tubman Democratic High School : http://tubmanschool.wordpress.com)를 졸업하면서 쓴 송사입니다. 그 학교는 제가 자문위원으로 있고, 파트타임으로 수학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헤리어트 텁먼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은 졸업하기 위해서는 졸업 심사위원회 앞에서 사회에 진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합니다.
“정말 굉장히 오래 전,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 같지만 제가 이 학교를 처음 왔던 그날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솔직히 몰랐습니다. 얼마나 제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저는 제 자신의 행복과 의욕을 지키기 위해 힘겹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가족은 거의 파괴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알콜 중독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 직전이었죠. 저는 성적도 굉장히 낮았고 학교에서 학생으로 활동하려는 의욕도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인생이 너무나도 불행했고, 내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했습니다. 이 학교에 처음 온 그 날 저는 너무나도 긴장했습니다. 하지만 리즈와 이 학교에 대해서 그리고 학교를 다니게 되면 어떤 활동을 하게 될 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긴장감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이 학교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당시 겪고 있었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이 되었습니다. 제가 제 페이스에 맞춘 교육을 받고, 또 제가 세운 목표를 중심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바로 민주주의가 직접 실천되는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리즈와 첫 번째 오리엔테이션 대화를 나누면서 저는 반드시 이 학교를 다녀야 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물론 바로 학교를 다닐 수는 없었지만, 이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제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훨씬 더 행복했고 스트레스가 줄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제 모습을 생각할 수 있었고,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학교에 있는 시간이 즐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분노가 많이 사라졌고, 신경질도 줄고, 더 합리적이고 더 똑똑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학교를 다니면서 있는 줄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고 발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관심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음악과 수학, 과학, 문학, 글쓰기, 컴퓨터 프로그래밍, 철학, 사회학, 역사 등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가르치는 방법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과 논쟁을 하는 방법도 배웠고. 실수나 잘못된 생각을 인정할 수 있는 법도 배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학교에서 저는 배우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을 가르치는 방법,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 일하기 싫을 때도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 누가 감시하지 않아도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이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고, 이 곳을 발견하게 된 것은 저에게 무한한 행복입니다. 이 학교가 없었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저의 만분의 일도 안 됐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학교에서 제가 배운 것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삶의 네비게이션으로 사용할 생각합니다. 어떤 삶이 앞으로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이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을 계속해서 사용해 나가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며 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어떤 삶을 살고 또 삶의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선택을 하던지 간에 내가 이곳에서 배운 것들에 앞으로 찾아올 난관,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엄청난 자산이고, 제가 이 곳에서 배우고 가져가는 것입니다. ”
마지막 문단이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코디라는 학생이 졸업하고 무엇을 할지 자기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기대감에 차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 미지의 세계에는 역경도 있고 도전도 있을 것이라는 것도 이 친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거죠. 이 송사를 여러분들께 읽어드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은유적으로 보자면, 코디는 이 학교를 만나기 전에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익사하기 직전이었죠. 저는 지금도 이 학교를 찾아왔던 14세 때의 코디 모습을 기억하는데요. 당시에는 굉장히 행복하지 않는 친구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삶과 배움을 통제하도록 허락된 환경에 놓이는 순간, 이 아이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실력과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배우게 됐다는 거죠. 그렇게 함으로써,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신을 스스로 구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세운 조건과 자기가 만들어낸 환경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는 힘을 이 학교에서 기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코디는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자신이지 다른 사람들의 기대나 요구, 지시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자센터와 같은 곳을 직접 보게 되고, 이런 곳이 많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기쁨과 흥분을 감출 수 없습니다.
헤리어트 텁먼 학교와 같은 그런 공간들이 한국 곳곳에 싹트고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저에게 크나큰 힘입니다. 하자센터, 헤리어트 텁먼 같은 곳들이 점점 많이 생겨나게 되면, 한국에서도 퍼지게 된다면, 세월호 같은 참사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번 강연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배우고, 나눴던 것들이 강연장 밖에서 여러분을 통해서 퍼져 나가게 되면 그것이 바로 희망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을 만나 뵙게 된 것을 다시 한번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