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9일 올봄 하자마을의 첫 의례인 2014 입촌(立村)잔치 '마을의 씨앗'이 많은 마을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하자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차려낸 싱그러운 봄밥상, 이웃 성미산마을 오케스트라의 연주, 하자 초기부터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권병준 님의 특별한 노래, 초대되신 촌장님들의 지혜로운 덕담, 흙공방의 크리킨디 촛불 스탠드와 조팝나무, 곱슬 등 우리 꽃과 풀로 꾸며진 손은정님의 플라워 스타일링, 밀양 작업으로 잘 알려진 빈진향 작가의 사진, 로드스꼴라밴드의 풋풋한 연주와 모두가 함께 노래한 비틀즈의 'in My Life'까지 모든 것이 기억에 남는 오후 한때였습니다. 자세한 이야기, 또 손을 보태 도와주신 이들에 대한 감사는 차차 풀어놓고, 우선은 입촌잔치에서 낭독한 조한의 축문과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열심히 준비한 영상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영상 링크
사진/빈진향
축문
황망한 시대에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찬란한 봄날이어야 하는데 요즘은 초미세먼지까지 난리를 피워서 봄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을 안타깝게 만드네요.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동제와 부락굿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릴 때는 교회의 예배 시간이 따뜻했고 1970년대에는 남산 아래 마을에서 벌어진 굿판에서 흐드러지게 춤을 추며 화해하는 동네를 보았습니다. 70년대 후반에는 시골 마을에서 여자들은 못 가게 하는 부락제에 몰래 가서 참관을 했고 제주바닷가에서 한판 신나게 벌어지는 해녀 굿에 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온 동네 분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부락의 안녕을 비는 축문을 읽고 그간의 갈등을 훌훌 털어내고 대동으로 모두가 배불리 먹고 흥겹게 노는 그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80년대에는 양반 동네 종가 집에서 준비하는 불천위 제사에 자주 갔었습니다. 집안 여자들은 모두 나와 며칠 전부터 음식 장만 하느라 분주했고 제사를 모시는 제주들은 그 날 아침에 목욕재계하고 장롱 깊은 곳에서 축문을 읽어보셨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들이 황망하고 스산한 시대를 마을 여기저기에 깃든 신령께, 그리고 조상에게 정성을 바치는 의례를 통해 이웃 간 정을 새롭게 하면서 반듯하게 살아내신 것 같습니다. 한데 모여 정성을 들이는 시간을 통해 어지러운 세상에 질서를 부여했던 것이지요.
별로 세상이 어지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때에 그 의례들은 실은 즐거운 구경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매우 어지럽다고 느껴지는 지금 그 의례들이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동제를 참관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한명의 참여자로, 이런 마을 의례를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쁩니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2월로 35 년을 재직했던 대학을 은퇴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오십의 나이에 만들었던 하자센터로 돌아왔습니다. 대학을 떠난 것에 대해 충분히 시원섭섭함을 느끼기도 전에 하자센터와 성미산 학교 후배들은 이제 마을 일을 제대로 하라고 은근히 압박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실은 올 3월에 3주간에 걸쳐서 이 터에 깃들어 있는 세 학교, 하자 작업장 학교, 로드 스콜라, 그리고 영세프에 다니는 백십여명에 이르는 학생, 담임, 판돌과 함께 [하자 마을 인문학 입문]이라는 공동 수업을 했었습니다. 어제 종강수업에서는 마을 이야기를 하면서 1970년대에 우리들의 심금을 울렸던 ‘마음은 언제나 태양, to sir with love’라는 영화도 같이 보았습니다. 사랑과 존경과 돌봄과 학습이 살아 있는 마을과 같은 학교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모두가 함께 감동스럽게 보는 그 자리는 세대를 넘어 교감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자 마을 인문학 수업은 손수 바느질한 걸레로 교실을 닦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 함께 왈츠를 추면서 끝나는 진지한 만남과 즐거운 학습의 자리였습니다. 바로 그 친구들도 오늘 이 마을 잔치에 각자 나름의 몫을 최선을 다해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그간 이 하자센터가 자리한 터에 오셔서 이 터가 융성하도록 물을 주시고 바람과 빛을 주신 분들을 모셨습니다. 우리 욕심으로는 바로 ‘우리 마을 분’들이고 부르고 싶은 분들입니다. 하자의 주민들은 욕심이 좀 많습니다. 특히 작업장 학교 교장 히옥스는 욕심이 많아서 존경하는 이 분들을 다 학교의 선생님들로 모시고 싶어 합니다.
하자 작업장 학교 첫 회 졸업식에 모두에게 컴퓨터를 나눠주신 삼보 이용태 회장님은 그 이후에도 가끔 오셔서 학생들과 붓글씨 쓰기를 함께 해주셨지요. 지금은 아프리카에 계셔서 못 오셨지만 연대 물리학과 박홍이 선생님은 검도를 가르쳐주셨고 하자에서 아코디언을 배우셨습니다. 하자 초기부터 창의적 문화 활동에 영감을 나누 주시는 파티 디자인 학교 안 상수 선생님과 쌈지 농부 천호균 대표, 아직 학교일로 분주하지만 남정호 선생님은 춤을 좋아하는 마을 친구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수업을 해주시고 김현미 선생님은 인문학이 얼마나 재미난 공부인지 세상을 알아가고 세상을 읽어내는 것이 얼마나 재미난 것인지를 수시로 일러주는 하자 마을 선생님입니다. 성년식이나 학예회에 오셔서 멋진 덕담을 해주시는 김정헌 박혜란, 배영호, 권혁일 선생님, 돌봄과 환대의 이야기를 수시로 해주고 실제 돌봐주시는 또 하나의 문화 조형, 조은, 여성문화기획 이혜경 선생님과 의사이면서 좌선의 대가인 김진, 우리 동네 치과 주치의 송화수 선생님, 산부인과 안명옥 선생님, 학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과학기술지상주의를 넘어서는 일에 함께 하는 발명가이자 최초의 인터넷 벤처 사장이었던 정철 박사, 그리고 이화여대에서 새로운 인문학의 길을 내고 있는 인문학자들과 새 시대의 새로운 농사법과 집짓는 법을 가르쳐주시는 농부와 목수 선생님들.
모두 탈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상상을 시작한 하자 마을에 깊숙이 들어와 계시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우리 멋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일정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주 창의적이고 호기심이 많으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기보다 시대를 내다보고 일을 벌이시는 proactive 한 분들입니다. 타고난, 그리고 잘 성장하신 자유인이시라 챙겨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잘 구경하고 지내시고 핸드폰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지요. 그리고 모두가 다음세대 삶에 지극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오늘은 이렇게 우리 마음속에 자리한 분들에게 우리 마을을 뽐내는 자리입니다. 깍쟁이처럼 내 것 네 것을 따지고 신이란 것은 없다고 잘난 척을 하던 시대의 끝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믿으며 실리만 따지는 시대. 가치에 대한 질문을 생략하고 공동체적 의례를 무시해온 시대의 파국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다시 겸손하게 신들을 불러들이고 우리를 사랑해주셨던 돌아가신 분들을 그리워하고 오랜 시간 지혜와 힘을 키워온 분들에게 지혜를 구하면서 이렇게 감사와 함께 초대의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하자에서는 같이 밥을 먹는 ‘동네 나눔 부엌’이 자리를 잡으면서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이 밥 먹는 것 이상의 엄청난 의미가 있는 일임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서로를 수시로 초대하는 ‘곁불 쬐기’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경쟁과 적대를 넘어서 우정과 환대가 무엇인지를 나눔을 통해 몸으로 익혀가는 것이지요. 나눔이 몸에 배게 하려면 여유로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좀 다른 원리로 가볍게 몸을 움직여보기. 총체적 혁명을 단번에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기. 좀 다른 관계망 만들기 벗들과 좀 다른 삶의 모델을 만들어내기, 정겨운 마을을 이루어서 살기, 마을 의례를 통해 그 뜻을 새기기, 이를 통해 인류의 삶이 지구상에서 지속가능해지기를 빌기.
이 자리는 이렇게 작은 마을 잔치이지만 또한 큰 뜻을 품은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께, 그리고 우리를 늘 지켜봐주시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들과 하늘과 땅을 주관하는 우주의 신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올립니다.
앞으로도 하자마을에서 벌어지는 이런 저런 즐거운 자리에서 자주 만나 뵐 수 있기 바라며
2014년 3월 29일 하자의 가장 오래된 주민 조한이 대표해서 축문 올립니다.
추신: 내년 마을 축문은 좀 더 축문다울 수 있도록 경륜이 많은 분들에게 자문을 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