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기성세대에게 “양보하라”지만
경험이 부재한 청년들에게 누가 무엇을 양보할 수 있을까
지난달 1학년 학생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작년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평소보다 못 봐서 가려던 대학에 못 갔는데 다시 시도해야 할지 고민중이라 했다. 연세대냐 서울대냐는 꼭 실력 차 때문이라기보다는 운도 많이 작용하고 예전에 입시공부에만 집중했던 시간이 그립기도 한데, 그간 대학에서 한 학기를 날려버린 느낌이어서 대학 입시에 다시 도전해 삶을 ‘리셋’(재시작)해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반수’라고 불리는 이 문제를 놓고 수업에서 함께 토론을 했는데 많은 학생들은 리셋을 하고 싶다는 그의 욕망에 공감을 드러냈다. 리셋도 중독이 될 수 있다고 염려를 하면서 말이다.
5월 노동절 집회에 참여해서 관찰 글을 써오라는 숙제도 냈었다. 30대 인디 청년들이 주도한 집회였다. 문화인류학 수업은 사회현상을 폭넓게 보는 능력을 키우고, 특히 개인과 구조의 연결고리를 보여줌으로써 학생들이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목적이 있는지라 많은 것을 느끼고 오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시위 자체에 거부감이 있어 시위에 가지 않은 학생들이 적지 않았고, 참여는 했는데 시위로 인해 차가 밀린 것 때문에 내내 불편했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실은 소규모 인파가 행진을 했던 터라 차가 밀린 것도 아니었다.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극진한 배려’ 세대가 등장한 것인가? 이들은 꽤 풍요로운 사회에서 나름의 배려와 존중을 받고 자란 편이다. 그리고 이들은 정말 존중받기를 원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들이 원하는 존중은 모욕을 받지 않는 것,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것이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차원의 존중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와 공공에 대한 감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존중과 배려는 의도와는 달리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고립시킨다.
학기말 조별 발표 또한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첫 팀의 주제는 “왜 우리 조모임이 망하게 되었는가?”였다. 처음에 국산 제품만 먹기를 해보려고 했는데 국산 제품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아서 포기했고, 다음엔 교내 수위 아저씨나 청소 아주머니들께 인사하는 프로젝트를 해보려 했는데 중간발표 때 반대가 있어서 포기했고, 지난 학기 선배들이 했던 독립영화 보기를 해볼까 하다가 너무 쉬운 것 같아서 포기하다 보니 한 학기가 다 가버렸다고 했다. 자신들이 시간을 충분히 들이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남을 설득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리더가 없는 조모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등의 변이 이어졌다. 아마도 이들은 조모임이 실패한 백가지 이유를 금방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존중과 배려에 대한 감정적 고픔’과 하지 말아야 할 수백가지 이유를 단숨에 생각해낼 수 있는 ‘똑똑함’이 만나면 고립과 부유하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교육부와 학교와 가족에게 보상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를 발견할 시간을 유예시킨 것에 대한 보상 말이다. 입시 교육으로 인해 극심한 불균형 성장을 해온 대한민국 청년 모두에게 스무살이 되면 1년간 공익근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면 어떨까 한다. 각자 살고 싶은 지역에 가서 아이를 돌봐주고 노인에게 책을 읽어드리거나 집을 고쳐드리면서 사회와 만나고 공공의 감각을 키우는 경험을 깊고 진하게 할 필요가 있다. 청년 당사자 운동을 해온 김영경 서울시 청년 명예 부시장은 기성세대의 자원 독점을 비판하면서 청년들에게 “양보하라”고 말하고 있다. 맞는 주장이다. 그런데 경험이 부재한 청년들에게 누가 무엇을 얼마나 양보할 수 있을까?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청년들은 또 어떤 방식으로 모일 수 있을까? 소심한 배려 때문에 더더욱 움직일 것 같지 않은 학생들에게 이번 방학에는 꼭 ‘농활’이나 ‘빈활’ 떠나볼 것을 권하고 싶다. 자체적으로 기획해서 말이다. 변화에 대한 공포감을 갖고 사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패의 두려움 없이 일에 몰두해보기, 생각을 나누고 조율해가며 마침내 ‘멘붕’에서 서로를 구해줄 친구 얻기, 신뢰할 사회를 자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경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