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아직은 겨울과 헤어지기 싫어하는 봄의 날에 인사드려요. 이 글이 올라갈 때 즈음엔 날씨가 조금은 풀려있을지 모르겠어요.
이번 둥글레차의 글감은 ‘가족’이었습니다. 어떠한 수식어도 붙지 않은 이 단어 앞에서 정말 많은 이야기가 떠올랐는데요. 여러 가족의 이야기를 한 문장씩 나열하다가 여러 개의 짧은 글들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소개해 드릴 글은 제가 쓴 네 편 가운데 두 개의 조각글입니다. 각각 제 글의 도입과 말미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그대로 1번과 4번으로 옮겨온 제 고집스러운 마음을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웃음). 이것이 ‘가족’의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렇기에 어느 가족의 어떤 이야기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새카만 길 위에서 한 가족이 탄생했다. 흰 옷차림의 여자와 남자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길을 천천히 걸었다. 그들의 시선은 잠시 먼 곳으로 갔다가 서로의 눈으로 돌아왔고 가끔은 주변에 있는 눈으로 가기도 하였다. 둘의 눈빛은 확신에 찬 모양을 하고 있었으나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이를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그들은 입꼬리를 더욱 올렸다. 주위의 모두가 여자와 남자의 옷맵시를 보며 예쁘다고 입을 모으는 가운데 여자와 남자의 떨리는 입술을 포착한 단 한 명의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남자의 팔촌쯤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자를 어려서 한 번 정도 본 기억이 있고, 이 자리에도 타의로 참석한 것이기에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성스러운 노래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천천히 걷는 여자와 여자가 짓는 벅찬 기쁨의 미소, 길의 끝에서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를 보며 그는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본인의 주인공인 그 둘이 느낄 감정이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워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 감정은 그가 아직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고, 따라서 어렴풋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그의 마음을 건드렸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런 그 앞으로 육중한 카메라를 목에 건 여자가 바쁘게 지나갔다. 여자는 그의 대각선 방향에서 몇 초간 셔터를 터트리다가 또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버튼을 눌렀다. 여자는 발과 손만 민첩하게 움직일 뿐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자는 카메라를 든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풍성한 드레스를 조용히 정리하는 자, 조명을 껐다 켜주는 자, 보면대를 설치했다 치우는 자들도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는 이 탄생의 장소에 눈물을 흘리는 자와 아무 감흥 없이 의무를 다하는 자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아쉽고도 흥미로웠다.
생각해보면 생명의 탄생에도 눈물을 흘리는 자와 생명을 안전하게 받아 품에 안기는 역할을 하는 자가 있으니, 탄생의 순간에는 눈물과 무표정이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는 자신의 때가 온다면 그때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나, 언젠가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거룩하고도 심드렁하게 펼쳐진 새카만 길을 걷는 순간이 온다면 그 자리에 눈물을 흘리는 자가 표정이 없는 자보다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4.
그들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갔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에 차이가 있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유일한 것이라고 어느 누가 그랬던가. 남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남자의 아빠는 하루가 다르게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저께 핏기가 돌던 얼굴이 어제는 노래졌고 어제까지만 해도 이상이 없던 심장 박동은 오늘 갑자기 현저히 느려졌다가 겨우 정상 근처로 돌아왔다.
남자의 시간이 흘러가는 모양새도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남자의 아빠가 수술실에 들어가 있을 때면 기다리는 세월이 영겁이었고, 심전도계 모니터에서 울리는 경고음을 듣고 뛰어오는 의사들 옆에서 한발 물러나 두 손을 맞잡고 정신없이 울먹거린 이십여 분의 시간은 찰나와 같았다. 아빠의 수발을 들다가 몇 가지의 병원 서류를 작성하다가 잠시 외출하여 볼일을 보고 오면 남자의 하루는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무던히 흘러오던 남자의 시간에 큰 낙차 또는 통째로 들어 올려진 블록 같은 것들이 생긴 것이다. 그것들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에서 밀려 들어왔으며 일정한 패턴이 없이 들쑥날쑥 추가되었다.
하루종일 몇 차례의 고비를 넘기고 더욱 지치고 처진 얼굴로 잠이 든 아빠를 보며 남자는 문득 아빠의 심장박동 모양과 자신의 시간의 형태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심장박동이 들쭉날쭉하면 남자의 시간도 닥치는 대로 아무 방향으로 흘러갔고 아빠의 상태가 진정되어야 남자도 숨을 돌릴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와 너무나도 닮은 얼굴을 가지고 태어나서 시간까지 닮아버렸나. 어차피 닮을 거라면 아빠도 자기와 같이 일어나 앉아있었으면 좋겠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묵묵히 흐르든 정신없이 흐르든 시간의 모양은 상관없고 서로 엇갈리지만 않았으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남자는 곧 다가올 날에 대한 대비를 하고 절차를 밟아야 했다.
또다시 그들의 시간과 상관없이 해가 떴다가 지기를 반복했으며 그들의 시간은 시계와 상관없이 흘러갔고 어느 순간 남자와 남자의 아빠는 직감했다. 인사는 짧을수록 좋다지만 이번의 인사는 길 것이다. 그들은 눈으로, 입으로, 손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인사를 나누었다. 이 인사를 나눈 순간은 지워지지 않을 시간이다. 남자는 이 시간만큼은 날아가지 않게 눈에, 입에, 손에 또 자신도 모를 어딘가에 숨겨두었다.
그로부터 삼 일이 지난 후 남자는 단지를 들고 새카만 길 위에 발을 디뎠다. 그는 흰 띠를 두른 검은 옷을 입고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길을 천천히 걸었다. 남자의 시선은 죽 바닥을 향하고 있었고 주위의 사람들이 그에게 여기서 걸음을 멈춰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의 앞에는 검은 차 한 대가 와있었다. 이 차를 타고 가서 모든 일을 마치고 나면 남자의 시간은 예전의 모양처럼 들쑥날쑥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남자는 들쑥날쑥함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기에 다시 무던해질 때까지 한동안 크고 작은 파동을 거칠 수도 있을 것이다.
글 · 사진_ 나스히(하자글방 죽돌)
2024년 가을학기 하자글방 후속모임 〈둥글레차〉는 글방지기 죽돌(청소년)이 제안한 글감을 단서로 글쓰기와 합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글감 소개 : 가족
둥글레차 2월 글감은 “가족”입니다. 떠올리긴 수월할지 몰라도 적기엔 무거운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글감을 생각했던 날은 설날이었습니다. 저도 혼자 사는 서울 집에서 훌쩍 떠나 지방에 있는 본가로 내려갔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가족인 인물들과 며칠을 함께 지내며 알고 싶었습니다. 가족이란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아낌없이 주고 어떤 힘을 남김없이 쓰게 하는지. 어떤 세상을 열어주고 어떤 뿌리로 발을 거는지. 서로 다른 형태로 존재할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매달 명절 연휴만큼 기다려지는 둥글레차 식탁에서 들려주세요!
_하루(하자글방 죽돌)
From. 하자글방
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3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가운데 일부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