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시골에서만 살아왔다. 상경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음악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시골의 삶을 청산하고 24년 4월 동명 베르디움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내가 ‘신명’이 된 그 시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우리 집엔 가수가 하나 있다. 홍순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걸 사랑한다. 집에 누군가가 찾아온다면 무대를 만들고 작은 공연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때마다 숨기에 급급했다. 애조는 나를 붙잡고 노래를 불러야 하는 이유를 열심히 설명했다. 숫기가 없었던 나는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무려 노래까지 불러야 한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우리 집에 아무도 오지 않기를 바랐다.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노래를 불렀다. 그렇지만 편안한 사람들과 노래를 부르고 만드는 일을 사랑했다. 마을 친구와 비닐하우스 안에서 난로를 피우고 멜로디언으로 작은 노래들을 만들고, 아빠와 세상이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고, 그게 당연한 삶이었다.
초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하던 중 풀무학교에 가게 된다. 내 자아가 형성된 건 아마 그때부터였다. 핸드폰도 없었기에 얼마 안 되는 저장공간을 가진 MP3에 노래를 고심하며 담고, 다양한 음악들을 마주했다. 나는 아마 풀무를 농사지으러 간 것이 아닌 노래를 부르러 갔나 보다. 그럴 운명이었을 수도 있겠다. 간간이 치던 기타는 날로 갈수록 늘었고, 친구들과 논길을 걸으며 노래하고, 운동장에 별을 보며 노래하고, 항상 기타와 친구들이 함께라면 계속해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음악은 정말 하나도 질리지 않았다. 온통 음악과 함께한 3년이었다.
나는 졸업을 하고 대학 진학에는 그다지 관심이 있진 않았다. 대학 진학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간단했다. 진실로 무언가 진득이 배우고 싶었던 분야가 없었을뿐더러 그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어떻게 삶을 꾸려나갈 것인지 찾아보고 싶었다. 1년 동안 한곳에 머물며 그때마다 내가 있을 수 있는 공간들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내 꿈을 찾고 삶을 행복하게 영위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2023년. 나는 마을 만들기와 공동체를 꾸리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한 이유로 홍동 마을에 남게 된다. 마을 일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남았지만, 나의 삶은 농사 짓는 일에 연속이었다. 주 6일 동안 일하며 새벽에 일어나 저녁 8시에 잠들었다. 고단한 삶이었다. 이전의 내 음악은 누군가를 놀리기 위함이나, 사랑하는 시를 보고 그저 외우고 싶은 마음에 음을 붙여 시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노래를 만들던 나는 타지에서 외롭고 고달픈 마음을 풀 수 있는 작업으로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다. 술을 먹고 취해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의 녹음본을 듣고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행복하면 더 행복한 마음으로, 슬프면 더 슬픈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고민과 지구가 망해 버린 지금과 어떻게 살아가야 내가 현재를 즐길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2023년을 살며 느낀 것은 확실히 나에게 농사는 맞지 않다는 것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진절머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저 홀로 내가 재밌는 것만 하고 싶었다. 정말 즐길 수 있는 삶은 20대가 아니면 할 수 없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홍동에 살며 만들어낸 음악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게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답답했다. 2024년을 맞이하기 전 나는 무조건 서울로 올라가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음악을 ‘업’으로 하고 싶단 마음은 없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싶단 마음이 컸다. 한 번쯤은 서울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24년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홍순과 애조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상경을 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하자 음악작업장’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에 일자리를 구할 때도 화요일, 목요일을 제외하고 골랐다. 상경한 목적을 말하면 어쩌면 하자가 한몫했을 수도 있다. 정확히 내가 원하는 지점이 하자센터 음악작업장 홈페이지에 적혀 있었다.
‘열린 마음으로 음악을 듣고, 타인과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팀 작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느슨하지만 서로를 지지해 줄 수 있는 음악 친구를 만나고, 나 역시 그들에게 동료가 되어 주고 싶은 사람.’
음악작업장에선 나의 음악이 ‘잘하고 못하고’가 아닌 사람으로서, 음악으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즐겁게 사람들과 함께 노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그렇게 6개월가량의 시간 동안 수많은 노래들을 만들었고, 나눴다. 지금은 음악작업장에서 좋은 동료를 만나 밴드를 만들고 진지하게 우리의 음악이 어떻게 대중에게 닿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처음엔 비록 가벼운 마음으로 음악을 시작한 것이지만 현재는 또 그렇지 않은 점을 봐서는 음악작업장은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마운 마음이 가장 크다.
하자에서 나는 ‘신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말 그대로 나의 음악이 사람들에게 닿아 그들의 삶이 신명 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다. 말의 힘은 크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말처럼 나에게도 노래를 계속해서 부를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신명’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것도 같다. 나는 계속해서 무진장 신명 나게 노래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