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2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중 일부를 구독자분들과 나눕니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추가 한참을 지났지만 아직도 무더운 이번 9월, 저희가 꺼내 온 글감은 “가을 맛 빙수”입니다. 35도를 웃도는 날씨 탓에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결심하기도 어려운 요즈음, 제 산책의 가장 큰 원동력은 집 근처 작은 빙수 가게인데요. 깍둑썬 수박과 그 퓨레가 잔뜩 올라간 수박 빙수가 올여름 내내 저를 버티게 해준 가장 큰 기쁨이었거든요. 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양산을 들고 빙수 가게를 찾아갔는데, ‘가을 맛 빙수’라는 글자 밑에 밤, 고구마, 호박과 같은 구황작물 맛 빙수가 신메뉴로 적혀있었습니다.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맞다 가을이구나. 근데 왜 이렇게 덥지. 이렇게 더워도 되는 것일까.
진한 가을 맛의 구황작물 퓨레를 조금 떠서 살얼음과 함께 입에 넣어봅니다. 얼음이 순식간에 녹고 단맛만 헛헛하게 남습니다. 입에 남은 단맛을 되새김질하며 조금 살벌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가지 않는 여름과 오지 않은 가을의 사이에서. 이 살벌한 기후 위기 속에서. 계절이 변하는 감각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각자의 마음을 적어보았습니다. 시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어도 미적지근은 하고 싶은 저희와 가을 맛 빙수 한입을 나누어 보아요.
- 하자글방 죽돌 퍼핀
시도 때도 없이 욕하는 사람의 여름 회고
역대 가장 늦은 폭염경보라 했다. 까만 팔뚝이 드러나는 민소매 차림의 아빠는 추석이 이렇게 더웠던 적은 없다며 에어컨을 틀었다 끄기를 반복했다. 다다다다 다다- 에어컨이 요란스럽게 몸을 떨었다. 에어컨 진동을 느낄 때면 순식간에 너무 많은 생각이 스친다. 전기세 기후위기 개저씨들 그럼에도 에어컨 없인 못사는 나... 주렁주렁 늘어지는 생각은 대부분 한음절의 욕설로 끝난다. “☆”. 여름이 끝자락을 끝도 없이 늘어트린다.
겨울이 봄이 되었을 때부터 이렇게 욕을 했다. “☆! (나는 아직 보들보들한 마음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이맘때쯤엔 자꾸 화가 나서 슬프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 슬퍼” 여름이 가을이 되지 않는 지금도 나는 욕을 하고 있다. “아 ☆!(도망가고 싶어!)” 변했다 변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구는 계절 덕에 욕이 많이 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욕을 달고 살면 많은 순간 불리해진다는 점이다. 욕을 뱉은 즉시 다음의 수식어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1. 지나치게 감정적 2. 지나치게 공격적 3. 일단 욕을 한 것은 잘못 4. 그러므로 이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은 정당하지 않음
봄과 여름. 지난 두 계절을 보낸 학교에서 나는 말하자면... 욕쟁이였다. 내가 했던 말 중에 그나마 중요한 말은 대부분 욕이어서 위의 수식어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내 욕(말)을 들은 상대의 당황스러운 표정은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 네 말은 너무 감정적이고 공격적이야. 네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네 손해야. 네가 말하는 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하잖아.” 유감스럽게도 나는 욕 없이 중요한 것을 말하는 법을 알지 못했고, 어느 순간에는 차라리 말하지 않기를 택했다.
자연스럽게 글도 쓰지 않았다. 뭐라고 쓸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약 없는 한순간을 기다리다 정말로 중요한 말은 끝내 쓰지 못했다. 사실 나를 말하고 쓰게 만드는 모든 종류의 뜨거움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 뜨거움에서 벗어나 숨 좀 고르려 한다는 내 말에 그 교수는 나이스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너는 끝내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미성숙한 인간이 될 거라고. 도망치는 건 옳지 않다고.
요 여름 내내 나의 밥 친구가 되어주었던 드라마 ‘수박’은 네 여자가 셰어하우스에서 함께 사는 이야기를 그린다. 네 여자는 돌아가며 저마다의 문제에 당면하는데, 그때마다 특별한 의식을 치른다. 셰어하우스 앞마당에 마련된 화단에 문제와 관련된 물건을 깊게 묻는 의식이다. 실패한 짝사랑,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같이 많은 마음을 가져갔던 기억이 땅에 묻힌다. 마음이 컸던 만큼 더 깊숙이 땅을 파는 게 한가지 규칙이다. 의식을 치른 뒤 주인공들은 다 함께 둘러앉아 든든한 식사를 한다.
무언가를 땅에 묻는 행위는 잊지 않겠다는 의미보다는 안심하고 잊으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도망치는 건 정말 미성숙한 일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욕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 깊이 땅을 파서 뜨거움을 묻어버리기로 했다. 안심하고 잊어버리기 위하여. 이번에는 땅을 아주 깊게 파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가을이 얼른 왔으면.
추신: 이 글은 끝자락을 끝도 없이 늘어트린 여름 덕에 쓸 수 있었다. 여름이 제멋대로 굴지 않았다면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한 음절의 욕은 ☆으로 대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