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2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중 일부를 구독자분들과 나눕니다.
8월의 글감은 ‘나만의 유별난 구석’ 입니다. 주변 인물의 유별남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일요일 오전에는 무조건 만화책을 읽으러 가야하는 제 친구 A가 생각이 납니다. A는 일요일 오전에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그 어떤 변수도 생기지 않게 토요일 저녁까지 해야하는 모든 일을 다 끝내고 경건하게 일요일을 맞이합니다. 만두피를 하나하나 밀어 직접 만두를 쪄먹는 친구 B도 생각나네요. 유별난 구석들이 모여서 하나의 존재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흥미로워요. 언제 어디서나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일관적인 성질은 곧 차이라는 책 속의 문장도 떠오릅니다. 유별남에 대해 자유롭게 해석해주세요. 그 유별남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건지 고민하는 글, 유별났기 때문에 생긴 웃지 못할 에피소드, 혹은 유별나다는 말에 대해 재정의해보는 것도 재밌겠어요.
- 하자글방 죽돌 단
잠, 죽음
검지와 엄지에 긴장을 유지한 채로 다른 손가락들을 천천히 말아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제법 총 모양이 되었다고 느껴지면 손을 들어 올려 관자놀이에 갖다 댄다. 총구의 서늘함을 느껴 본다. 얕은 들숨, 그리고 정지. 긴장이 풀리기 직전에 상상 속의 총을 발사한다. (탕) 두개골을 가볍게 뚫고 나가는 총알의 힘을 상상하며 머리를 살짝 튕겼다가 스르륵, 힘없이 떨군다. 슬로우 모션이 걸린 장면처럼, 천천히. 끝. 이제 잠들 시간이다.
혼자 무언가에 열중하다 잠에 드는 늦은 밤이면 나는 죽음을 상연한다. 때로는 관자놀이를 관통하는 권총. 때로는 가슴 복판을 깊숙이 찔러 드는 칼. 때로는 이마를 내리찍는 거대한 망치. 날마다 차이는 있지만,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죽음들뿐이다. 30초 내외의 짧은 극이 막을 내리면 너털웃음과 함께 뒤척이다 잠에 든다. 꼭 이걸 거쳐야만 잠에 들 수 있는, 강박적인 습관이나 루틴은 아니다. 어떤 목적이나 기능이 있는 의식도 아니다. 그저 캄캄한 밤, 때로는 푸르스름하게 밝아져 가는 새벽에, 침대에 누운 채 몸에 힘을 빼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날 상연해야 할 죽음의 이미지가.
끝내고 보면 참 유치한 짓이 아닐 수가 없다. 그저 혼자 소리 없이 핏, 웃어버리고야 만다. 하지만 언제든 죽음의 이미지가 떠오르면, 나는 저항할 새도 없이 그것을 상연하게 된다. 위협받는 몸의 긴장감, 나를 꿰뚫고 부수어 죽여버리는 무언가의 힘, 그리고 그것에 생명이 굴복하는 감각으로, 짧은 순간을 가득 채운다.
어느날에는 상연을 끝내고도 찝찝함이 오래 남았다. 왜 나는 잠을 맞이하면서 죽음을 묘사하는가.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마음으로, 서늘하거나 포근한 이불에 만족해하며 잠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휴식도 아니고, 하루의 마침표도 아니고, 어째서 죽음인가. 하물며 어떤 이유나 서사가 있는 죽음도 아니다. 죽음 전의 사연도, 죽음 후의 의미도 허용되지 않는, 오직 숨이 끊어지는 짧은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내가 잠을 그런 순간처럼 느끼는 것은 아닌가. 역사도 의미도 전망도 없는, 말 그대로 생명이 빠져나가 버릴 뿐인 순간으로. 그렇다면 왜? 그날 떠올린 가설은 이것이었다: 잠은 의식적인 활동을 멈추는 일이고, 나는 의식적인 활동이 있을 때만 살아있다고 느낀다는 것. 그게 아무리 하찮은 홛동일지라도 – 왜냐하면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유튜브 쇼츠만 1시간 30분쯤 보다가 ‘에휴, 자야지’ 했었던 밤에도 죽음을 상연했으므로 – 내가 내 몸과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만, 살아있다고 느낀다고.
께름칙하다. 살아가는 데에 가장 필요한 활동 중 하나인 잠을 살아 있지 않은 순간으로 여긴다니? 자면서 회복도 하고, 기억도 되새겨지고, 의식도 정돈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나는 잠을 삶이 아닌 것, 삶이 단절되어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이장욱의 소설 「절반 이상의 하루오」에서도 비슷한 단절이 묘사된다. 다만 여기서는 잠이 아니라 여행을 두고 삶과 죽음이 나뉜다. 홈페이지에 여행담을 연재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하루오는, 여행하지 않고 일본에 머물 때는 “죽은 듯이” 시간을 보낸다. 대신 여행할 때는 “‘살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여행자가 아닌 생활인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낸다. 인도에서 여행하며 알게 된 사람에게서 물품을 받아 노상 판매를 한다던가, 지저분한 열차 안에서 문득 몸을 일으켜 바닥의 오물들을 치우곤 하는 것이다.
하루오는 자신이 오키나와에서 나고 자라 도쿄로 이사한 뒤로, 부모님이 이혼한 데다가 학교에도 적응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도 떨어진 마당에 삶에 의욕을 잃은 채 부산으로 일종의 ‘자살 여행’을 떠났다고. 그렇지만 그곳에서 기이한 경험을 하며 죽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져 버린다. 낯선 방에서 깨어났을 때 세계가 새롭게 보이고, “나라는 존재가 5센티미터쯤 다른 세계로 옮겨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하루오가 여행할 때는 사는 듯이, 여행하지 않을 때는 죽은 듯이 지내게 된 것은 그때부터다.
이 소설을 읽고 한 친구는 살아 있는 듯한 순간과 그렇지 못한 순간, 나다운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이 분명한 하루오의 모습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대개 그 둘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채로 살아가지 않냐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떤 순간을 온전히 살아낸다, 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에게는 눈길을 사로잡히고야 마니까. 그 순간의 전과 후로 그 사람의 삶이 어떻게 펼쳐지는지와는 무관하게.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 줄기 고민이 떠올랐다. 하루오에게 여행하지 않는 시간은 삶에서 추방된 시간이 아니었을까. 마치 나에게 잠에 든 시간이 그렇듯이. 그런데 그건 건강한 걸까. 그건 정확한 걸까. ‘살아 있다’는 느낌과 살아 있다는 사실은 다르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없거나 약한 순간도 분명 살아 있는 순간이다. 살아 있기 위해 꼭 필요한 순간일 수도 있다 – 마치 잠처럼. 그러니까 어떤 시간을 살아 있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면, 그렇게 삶에서 추방해 버린다면, 내가 보고 싶은 것들만 나의 삶으로 보겠다는 것이 아닌가. 실은 그렇게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시간들이 내 삶을 가능하게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죽음을 연상시킬수록 잠을 미루게 되는 것 같다. 내 삶이 아닌 것만 같아서. 정말 다급한 일이 있어서든, 괜히 유튜브라도 봐야겠다 싶어서든, 그렇게 미루다 미루다 ‘에휴, 자야지’ 하는 날이면 죽음을 상연하는 것 같다. 어쩌면 삶이 늘 활동적이지 않아도 된다는, 뭔가를 하고 뭔가를 채우지 않는 게 좋을 때도 있다는 지혜를 나는 아직 익히지 못했나 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그게 아직 내 삶의 윤리다. 그게 나를 피곤하게 하더라도, 그게 순식간에 하기 싫어질 수 있더라도. 어쩌면 그런 태도를 젊음이라 부르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