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2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중 일부를 구독자분들과 나눕니다.
4월 글감은 “일상의 기술”입니다. 여러분은 진부하고 시시한 기분에 갇히지 않기 위해, 피로와 엉망진창에도 진이 빠지지 않기 위해, 혹은 그 속에서 즐겁게 지내기 위해, 그리하여 또다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나요? 만약 충실했던 일상의 기술이 여지없이 패배해버린다면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 하자글방 죽돌 청신
삶에는 너무 많은 비공식적인 패배가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비공식적인 패배다. 설명할 수 없다는 건, 부끄럽거나 초라해서 비밀로 남겨야 하는 게 아니라 그 일이 무슨 일인지 해석할 수 있는 언어가 나에게 없다는 의미다. 내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맥락을 이루는 사건도 남에게는 그것이 왜 그런지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이해시킬 수 없다. 말할 수 없다. 가끔은 내 안에 나만을 위해 상영되는 지옥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오물 신을 씻겨야 하는 임무를 받은 치히로처럼 벌여놓은 실수를 수습해야 한다. 방안은 목욕탕이 되고 당신 손에는 청소용 솔이 들려있다. 구정물과 진흙으로 똘똘 뭉친 코끼리만 한 오물 신을 씻겨야 한다. 악취와 역겨움은 계속해서 흘러내린다. 몇 시간이나 참고 닦고 또 닦아도 끝없이…. 그러다 문득 이 일이 그렇게 큰일인가? 내가 정말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오물을 닦고 있는 게 맞나? 다 내 착각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모든 상황이 사라진다. 방금까지 지독한 악취를 풍겼던, 닦고 닦아도 진흙과 구정물을 뿜어내던, 오물 신은 사라지고 없다. 그렇다고 그 영화처럼 모든 오물을 뿌리 뽑을 수 있는 하나의 키를 발견했고, 오물 신이 강의 신의 모습을 되찾아 후련히 사라졌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스스로 발견한 구덩이에서 쫓겨난 것일 뿐이다. 몇 시간 동안 불안에 떨며 발을 동동 굴렀던 일을 대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악몽? 모든 악몽이 그랬듯 깨어나게 되지만 그건 정말로 악몽에 불과했는가? 그 구덩이는 정말 없었는가?
소모나 상실을 감당해야 하는 일을 나는 실패라고 부른다. 내가 나로 살면서 끊임없이 외부 혹은 내부에서 마찰하며 발생하는 모든 일을 실패의 한 종류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일상을 이어가게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연마해야 할 기술은 실패를 소화하는 일이다. 켄 윌버의 <무경계>에는 이런 예시가 있다.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자는 그 대상을 본질로써 지닐 수 없다. 만일 눈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다면, 그 눈은 붉은색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괴로움을 관찰하거나 주시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는 괴로움이 없음을, 주시된 혼란에서 자유로운 상태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패배는 여전히 내 본질로 남아있다.
그러나 말로는 할 수 없는 일을 글로는 쓸 수 있게 되는 날이 온다. 내가 아니라 글 속에서 말하는 다른 서술자의 입을 빌리면 때때로 그것은 가능해진다. 그 일이 뭐길래 나를 절망하게 만드는지 글로 쓰는 동안에는 주시할 수 있다. 나를 습격하러 오는 나의 적을 마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적어도 무엇으로부터 패배하는지 알게 되는 일이다. 시선 안으로 완벽히 잡아넣는 데에 실패하더라도 상관없다. 내가 상상하는 데에 성공한 딱 그만큼을 내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가게 만드는 일이 글쓰기일 수 있다. 내가 쓰는 것은 결국 나를 똑같은 이유로 패배하지는 않도록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