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지친 퇴근 시간, 엘리베이터에서 한 의사가 같이 타고 있던 동료에게 갑자기 입을 맞춰. 뺨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키스해. 상대가 멍해져 있는 사이 문이 슥 열리고, 그녀는 눈썹을 으쓱하며 또각또각 경쾌하게 걸어나가지.
그 장면을 보는 몇 초 동안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어. 두근거리는 심장 언저리에 가만히 손을 얹어보면서도 시선은 화면에서 뗄 수가 없었지. 두 사람 모두 여자였거든. 나를 닮은 사람들을 스크린 위에서 마주한 그 순간. 설명할 수 없었던 갈증이 회오리 치듯 빠져나가던 그 순간. 누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면 발그레한 얼굴,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았을 거야.
그렇게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를 보기 시작했어. 작품의 배경인 시애틀 그레이스 병원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일하는 곳이야. 레즈비언 커플이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리고 게이 의사가 수술실에서 커밍아웃하는가 하면, 바이섹슈얼인 한 의사는 천천히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나가지. 그리고 그들 곁에는 늘 지지해주는 동료들이 있었어. 신부보다 더 들떠서 결혼식 파티를 준비하고, 함께 춤을 추며 스트레스를 털어내고, 울음을 터뜨리면 꽉 껴안아주는 사람들 말이야.
그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다독임이었고, 소수자로 사는 것도 멋지다고 일러주는 목소리였어. 늘 필요했으나 필요한 줄도 몰랐던 이야기... 너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으려나.
돌이켜보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늘 무채색이었어. 내가 자라면서 본 영화나 드라마엔 퀴어 인물들이 나온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 <보헤미안 랩소디>나 <아가씨>처럼 대중적으로 히트를 친 퀴어 영화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극소수고, 그마저도 청소년관람불가 마크가 쾅 박혀있곤 하잖아.
유명한 감독들의 카메라 앵글 속엔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처럼 말들 하지만, 거기서도 배제된 존재들이 있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다양성 보고서라는 걸 발간했어. 자사 콘텐츠 영화·시리즈 306건(2018~2019년)을 분석해 등장인물과 제작진 구성 면에서 얼마나 다양한지 연구를 한 거야.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성소수자가 주연으로 나오는 작품은 2.3% 밖에 안 되는데 그 중에 트랜스젠더는 한 명도 없었대. 외국 작품의 비율이 높은 넷플릭스도 이렇다면, 국내 일반 영화·드라마에서의 성소수자 대표성은 어떤 수준인지 짐작해볼 수 있어.
절대적인 작품의 수가 부족하다 보니, 성소수자를 표현하는 방식도 제한적이야. 올해 초에 방영한 <빈센조>라는 드라마 혹시 알아? 거기 황민성이라는 게이 인물이 나오는데, 빈센조에게 반해 다짜고짜 스킨십을 하는 모습으로 등장해. 또 몇 년 전에 방영했던 <힘쎈여자 도봉순>에서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진한 화장을 한 게이 캐릭터가 나오지. 틀에 박힌 하나의 상을 재현하는 걸 보면서 정말 '이게 최선인가' 싶은 생각 밖에 안 들더라.
어떤 영화들은 내게 또 다른 종류의 아쉬움을 안겨줬어. 주인공이 퀴어로서 겪는 어려움만을 집중적으로 비추다 보니 그가 걸치고 있는 여러 겹의 옷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거야. 성소수자들이 차별과 편견에 부딪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삶의 전부인가? 때로는 주인공이 퀴어라는 사실이 줄거리와 무관한 영화를 보고 싶었어. 퀴어가 하나의 ‘소재’가 아닌 그저 수많은 설정 중의 하나로 다뤄지는 작품 말이야.
사실 꼭 성소수자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야. 우리에게는 여러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이유 없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서사가 더 많이 필요하니까. 화면 속에서 정치를 좋아하는 청소년을, 활기찬 삶을 사는 장애인을,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여성을 흔하게 접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 변화의 시작은 결국 우리의 질문이라고 생각해. ‘왜 나를 닮은 사람들은 화면 속에 등장하지 않지?’ ‘저런 표현은 고정관념을 강화하지 않을까?’ ‘약자의 관점은 빠져 있네?’ 익숙하게 느껴지던 주변을 둘러보고 내내 도사리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낼 때, 비로소 틈이 생기고 빛이 들어올 거야. 그러니 계속 목소리 높이자. 우리가 원하는 게 뭔지 이야기하자. 나와 함께 새로운 틈을 만들어갈 너에게, 연대의 마음을 한아름 전하고 싶어.
+) 미디어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지만 큰 일들을 몇 개 생각해봤어. 도움이 되기를 바라!
다양성에 기반한 컨텐츠를 만드는 창작자들에게 힘 보태기 퍼플레이라는 플랫폼에서는 여성/퀴어 단편영화를 편리하게 구매할 수 있어. 퀴어 웹드라마를 만드는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거나, 텀블벅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퀴어영화 프로젝트를 후원하는 것도 방법이야.
관련 기관에 변화 촉구하기
방송통신위원회에서 2016년부터 매년 성별·연령·직업·장애를 기준으로 ‘미디어다양성 조사’를 하는데, 성소수자 대표성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아. 중요한 통계이니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별도의 항목으로 포함하라고 민원을 넣어보는 건 어떨까? 또, 방송사에서 퀴어 영화 일부분을 삭제하거나 모자이크 처리하는 등 부당한 일이 일어나면 힘을 합쳐 항의하는 것도 중요해.
직접 창작활동 하기
혹시 네가 영상을 만들거나 소설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작업을 할 때 다양성을 꼭 고려해줘. 차별적인 시선이 들어가 있지는 않은지 여러 번 체크하고, 기성 작품에서 보기 힘든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다뤄보는 거야.
:: 글_자몽(2021 하자 뉴스레터 객원 에디터)
학교 안팎을 넘나들며 배움을 찾는 사람.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동안 혼자 써내린 일기가 한 가득인데요, 이젠 더 많은 이들에게 가닿는 글을 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