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감정에도 끝이 있다면 그 끝에 다다른 적이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일이 안 풀릴까 싶을 정도로 일이 안 풀리던 나날들이었다. 힘든 이유는 다양했다. 성적, 친구 관계, 돈 그리고 가족. 한 친구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친구는 내 이야기를 듣다가 이렇게 말을 했다. 너의 가족보다 내 가족이 더 복잡하다고. 너보다 내가 더 힘들다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한때 나는 내 가족이 특별하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나는 지속적인 학교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세상에서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은 가족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갈수록 가족의 응원이 나를 위한 게 아니라고 느꼈다. 가족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었다. 그런데도 내가 가족을 너무 아낀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했다. 그리고 그 아픔은 나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친구의 가족은 심하게 가부장적이었다. 친구에게 취직과 결혼을 강요하였다. 그 친구 외에도 가족으로부터 언어폭력과 신체적 폭력을 당한 친구들이 많았다. 가족을 특별하게 생각하던 시절의 나는 그런 폭력과 내가 분리되어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진심으로 위로해주지 못했다.
또, 살기를 그만두겠다는 친구를 위로해주지 못한 날도 있었다. 형식적인 위로는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 공들여서 할 말을 골랐지만, 끝내 제대로 된 위로는 하나도 건네지 못했다. 마음에서 미끄러져서 나간 말들은 제 주인을 찾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사라졌다.
나보다 자신이 더 힘들다는 친구의 말이 너무 미웠다. 나의 아픔을 폄하시키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한 상대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친구가 그 말을 하게 만든 세상이 더 미웠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를 제대로 위로해주지 못한 적이 있었으니까. 이제라도 그때의 친구들을 만난다면 그 시절의 언행을 사과하고 싶었다. 그런 시기를 견뎌낸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말해주고 싶었다. 살기를 그만두고 싶어 한 친구에게는 살아남아주어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허나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었다. 인제 와서 할 수 있는 건 후회밖에 없었다.
친구들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일종의 도돌이표처럼 느껴졌다. 가족이 주는 아픔이 사라질 수 있을까. 가족이 아닌 이들에게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어리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황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까. 내가 나와 같은 소수자에게 차별을 가하진 않을까. 이 거대한 아픔의 세계 속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이미 다 느낀 것 같아. 그럼 새로운 느낌 없이 덤덤하게 사는 거지. 그냥 이미 다 느껴봐서 그런지 시큰둥해.' 'Sometimes I think I’ve felt everything I’m ever gonna feel and from here on out I’m not going to feel anything new - just lesser versions of what I’ve already felt.'
영화 <Her>에서 주인공이 하는 대사처럼 평생 느껴야 할 감정을 다 느낀 것 같았다.
멀쩡하게 사람을 잘 만나놓고도 혼자가 되면 엉엉 울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어쩌다가 잠이 들면 자꾸 안 좋은 기억들이 꿈으로 재생되었다. 심장이 중력을 받지 않고 저 멀리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병원에 가고 싶었는데 돈과 시간이 부족했다. 당시 나는 용돈을 받고 있었고 조별 과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에 가려면 조원과 가족에게 내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그 과정을 견딜 자신이 없는 나는 나를 포기해버렸다.
한 끼도 안 먹고 온종일 누워있었는데, 한 친구가 냉면을 사 들고 찾아온 날이 있었다. 입이 짧아 냉면을 잘 먹지 않는데 그 냉면 그릇은 싹 비웠었다. 그 뒤로 나는 냉면을 먹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다른 친구는 먼 도시에서 틈나는 대로 전화를 해주었고, 또 다른 친구는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친구들은 나를 위로해주었다. 아직도 나는 그들이 내게 해준 위로를 두고두고 읽는다. 내가 받은 상처가 여전하다면 상처를 준 이를 쉽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어떤 관계는 혼자만의 잘못으로 꼬이는 게 아니라는 말들을.
그리고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굳이 그 사람에게 뭔가 해주지 않아도 너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될 수 있어.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잖아. 살아있을 때 더 감정을 많이 표현하고 싶어. 사랑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이 긴 고통의 시간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나를 위로해준 이들 덕분에 나는 위로가 되는 존재가 되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모두 살아있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고.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도 괜찮다고. 그 아픔에 천착되지만 말라고. 함께 오래오래 나아가보자고.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어디에 있든 늘 응원하겠다고. 늘 당신을 사랑해주겠다고 말하고 싶다.
다이어리에 기록해둔 친구의 말
:: 글_신이영(2021 하자 뉴스레터 청소년 에디터) 넓게 살기 위해 많이 보고 듣고 읽고 씁니다. 어린 시절에 미하일 엔데의 모모를 읽고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가가 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쓰면서 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모모처럼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