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처음 달린 악플은 2018년, 페이스북에 올라간 한 인터뷰 영상의 댓글창에서였다.
‘못생긴 것들이 피해의식에 쩔어있다’
작성자 이름은 ‘혜남근’이었는데, 기본 프로필 사진에 피드에도 아무것도 없는 가계정이었다. 지금에야 귀여운 수준의 “피해의식 쩔은” 악플이지만 당시엔 심장이 쿵쾅거렸다. 역시 인터뷰를 거절할 걸 그랬나? 심지어는, 내가 못생기게 나왔나?
띠링, 또 댓글이 달렸다.
‘남근이 모욕죄로 신고해버린다~’
함께 영상에 출연했던 분이 가소롭다는 듯 경고했다. 본인 등판에 이어 관리자까지 법적 조치를 알리자 찌질한 남근이는 ‘댓삭’ 후 튀어버렸다. 다행히 그 뒤로 악플은 달리지 않았지만, 난 그날 내내 속도 좋지 않았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핸드폰만 보면 악랄하고 유치한, ‘빻은’ 댓글이 언제 어디에나 있다. 애써 무시하는 척 해놓고 자기 전 곱씹으면서 우울해하고, 가끔은 열불나서 댓글로 싸우다가 힘만 빠지기도 한다. 악플러는 당당하고 우리는 답답하다. 지금 필요한 건, ‘악플 대처 매뉴얼’이다. 좀 더 단단하게 마음을 다지고, 보다 유연하게 스스로를 혐오로부터 구할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악플로부터 상처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없는 잘못을 찾으려 애쓰지 않기
“일부러 너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이야. 기분 나쁜 말이 기억에 더 잘 남거든.”
전 남친이 했던 이 말은 악플을 이해하는 데 쓸데없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놀랍게도, 그 자식과 수많은 악플러는 남을 상처 주고 욕하는 데 ‘정당한’ 의도와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옳다고 우기려고, 꼴 보기 싫어서, 다른 사람들이 욕하니까. 정작 상처받은 나는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불필요한) 자기검열은 없는 잘못도 만들어 낸다. 애초에 내가 상처받아야 할 그 어떤 이유도, 그들의 의도를 이해할 필요도 없다. 아니, 그게 내 알 바냐? 기분 나쁜 말은 가시처럼 기억에 박혀 내 마음 가장 여린 부분을 후벼판다. 그 상처에 약을 바를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스스로를 탓하지 않는 의연함과 다정함일테다. 물론, 혐오에는 ‘빨간 약’*을 먹는 게 최고다.
* 영화 <매트리스>에서 가져온 말로 ‘여성혐오의 존재를 인정한 시점 또는 그 계기’ 즉, 페미니즘을 뜻한다 (출처: 페미위키)
당당하게 피하기(무시하기)
습관적으로 뉴스나 유튜브를 볼 때면 ‘싫어요’나 화난 이모티콘을 보고 여론을 짐작해보곤 했다. 괜히 마음이 불편해질 것 같으면 굳이 댓글창을 보지 않고 나왔다. 방심한 사이에 마주치는 악플까지 막지는 못하지만, 일단 보지 않으면 피곤해질 일도 없으니 쉽고 효과적이었다. 이때 중요한 건 내가 약해서,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도망쳤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모든 악플에 일일이 비공감을 누르면서 댓글을 단다면 결국 지치는 건 내 몫이었다. 그러니 피하는 건, 나를 적극적으로 지키기 위한 의지이자 용기였다. 가만히 내 몸과 마음을 다치게 두지 않을 거라는 의지와, 일상이 혐오에 흔들리지 않도록 나에게 집중하는 용기. 그건 분명 강했다.
뼈 있는 경고하기
한 번은 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채식주의자인 이유에 대한 해석을 팬카페에 쓴 적이 있었다. 열심히 비거니즘을 전파한 후 마지막에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단순 증오심을 바탕으로 욕설, 비방, 명예훼손 시 실시간으로 PDF를 따 댁 내 우편함에 고소장을 꽂아드리겠습니다. :)”
콧방귀 뀌고 악플을 다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경고에 멈칫하고 자체 필터링을 거쳤다. 경고는 공손한 태도를 만들고, 태도가 공손해진다면 서로 거리를 두며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전 키 167에 목표 85키로인데 채소로 절때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이런 댓글에는 뭐라고 말해주면 좋을까? 나의 방법은 식물성 단백질과 비건 트레이너를 알려주면서 그런 개인 정보를 막 알려주다간 보이스피싱 당한다고 걱정해주는 것이었다.
웃으며 당황시키기
내가 본 악플 중 최고봉은 단연 이게 아닐까?
“길거리에 여친한테 무릎 꿇은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뭔 데이트 폭력이 있냐!”
예전엔 어떻게 살인과 폭행을 무릎에 비교하냐며 씩씩댔는데 지금은 참 그저 웃음만 나온다. 으이구, 치사하게 그런 걸 혼자 보다니. 나도 구경 좀 하자! 불편한 상황에서 ‘드립’으로 받아치는 건 고난도 기술이다. 물론 억지로 웃을 필요도 없다. 나는 악플이 가진 불쾌한 힘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텐션을 올리는 데 유머가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분위기를 바꿈으로써 상황의 주도권을 내 쪽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상대방은 당황하고,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예를 들면 내게 처음 악플을 달았던 분의 이름을 따 악플러를 ‘남근이’로 친근하게 불러보면 어떨까? 남근이가 말로 똥을 싸는구나, 내가 굳이 뒤처리 한다고 손을 더럽힐 이유는 없지.
아이디는 이름, 프로필 사진은 얼굴, 피드는 자기소개, 팔로우는 친구가 되고 ‘좋아요’와 댓글은 소통이자 평판이 되는 스마트폰 세상. 누군가는 인생이 화가 나거나 심심해서, 남의 치욕을 소화제인 양 씹어 삼켜야 속이 후련해진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스스로 몸과 마음을 돌보며 혐오로부터 자신을 구한다. 그 단단하고 유연한 힘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래, 너네가 나를 소화제 취급한다면 나는 나의 자양강장제가 되리라.
르네가 출연한 인터뷰 영상중에서
:: 글_르네(2021 하자 뉴스레터 청소년 에디터) 이제는 하자 고인물(?)이 되어버린 학교 밖 경력 5년 차 르네. 학생도, 취준생도, 직장인도 아닌 사람이 있다? (상상도 못한 정체 ㄴOㄱ) 비대학 청년 유튜브 ‘진진팟’, 하자 sns 에디터 ‘하디에’ 등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서 여기 뿅 저기 뿅 등장합니다. 햇빛을 받으면 렌즈가 선글라스가 되는 멋찐 금테 안경을 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