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야, ‘코로나 블루’라는 말 들어봤어? 사회적 거리두기가 계속되면서 우울을 느끼는 마음 상태를 뜻한대. 처음에는 낯선 단어였는데 금방 익숙해질 만큼 많은 곳에서 사용하고 있더라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단어인 것 같아. 단절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우울은 도대체 뭘까? 나는 이 우울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우울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들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끊이지 않는 질문들을 가득 안고, 나미짱이 우울, 기후우울증, 청소년과 우울증, 정신과, 살아있음에 대해 짤막한 이야기를 나눴어. 6가지 질문에 대한 Z의 답변은 어때?
Q1. ‘우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나무 미역을 쓰다듬기
미운 애증의 존재!
짱소 슬픔이
Z의 답변은?
‣ 나무 나에게 우울은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쓰다듬으려고 노력하는 것. 우울함을 느낀다고 그런 나를 못 견디기까지 하면 너무하잖아. 쓰다 듬긴 하는데 부드러운 털이나 보송보송한 무언가가 아니라 물속에서 중구난방으로 퍼지는 미역을 만지는 느낌이야. 아이고 너 어디 가니, 이리 와 이리 와 쓰다듬어 줄게, 하는 것.
‣ 미운 ‘우울'이라는 감정은 분명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해. 하지만 얘가 나의 일부인 것, 내 여러 모습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잖아. 우울감이 극심했을 때는 당장 떼어내고 싶을 만큼 밉지만 한참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 우울을 바라보면 왠지 고마운 마음이 들어. 내가 나의 마음과 몸을 꼼꼼히 살피고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셈이니까. 떼려야 뗄 수 없고 쉽게 미워하거나 예뻐할 수 없는, 그런 존재지.
‣ 짱소 나는 ‘우울’하면 ‘슬픔이’가 가장 먼저 떠올라. ‘인사이드아웃’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인데 친구들과 사이가 좋지 않던 슬픔이가 결국 기쁨이와 화해하고 존재 그대로를 인정받는 장면이 나오거든. (이거 스포인가…?) 내 슬픔과 우울을 덮으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우울을 마주하는 시작이지 않을까 싶어.
내가 우울을 견뎌냈던 방법 이건 얼마 전에 봤던 영상인데 ‘우울에도 자격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나도 우울할 때마다 인터넷에 있는 우울증 테스트를 해보거든. 근데 지금 규정되어 있는 우울증에 속하지 않으면, 그냥 내 스스로가 나약한 사람으로 느껴져. 이 정도의 어려움은 다들 잘 이겨내는데 나만 징징거리는 거 아닌가 싶은 거야. ‘우울’, ‘우울증’에 대한 정의를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 속의 슬픔이를 지우지 않고 어떻게 하면 같이 잘 살아갈 수 있을까?
Q2. 기후우울증 겪어본 적 있어?
나무 애매하게
미운 요즘은 뉴스나 sns를 볼 때마다 겪어.
짱소 YES (바로 지금)
Z의 답변은?
‣ 나무 가끔 어안이 벙벙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10년 밖에 안 남았다는데, 사람들은 왜 이리 태평한지. 나는 뭘 더 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워. 우리 집에 불이 났는데, 손을 놓고 바라보는 것 같아서 무기력해져. 지구 곳곳에서 기후위기의 징조를 마주칠 때마다 큰 슬픔과 허무함을 느끼기도 해. 그러다 그냥 일상을 유지하는 데에 힘을 쏟기도 해. 앞으로의 미래가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Q3. 청소년 우울증에 대한 사회의 시선
나무 청소년에게 약값와 상담비를 지원해줘. 그게 사회가 해야할 것.
미운 사춘기라니.. 중2병이라니..!
짱소 아프니까 청춘이다? 아프면 병원을 가야지..
Z의 답변은?
‣ 미운 내가 지금 우울한데, 속이 너무 답답한데. 사춘기라서 그래? 중2병인 거야? 정말? 그렇게 단정 짓기엔 좀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란 말이야. 많은 청소년들이 ‘사춘기라서 그래.’라는 말로 치부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상황에 처해있고 힘든 마음들을 겪고 있어.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우울하고, 가족이 없는 노인들이 우울한 것처럼 말이야. 이건 그들의 나이가 아닌 그들이 살아온 세월과 환경이 만들어낸 거잖아. 모두가 신경 쓰고 생각해야 할 문제를 나이 탓으로 돌려선 안돼.
‣짱소 학교라는 곳이 나에게 버거웠던 적이 되게 많아. 그래서 자퇴를 했는데, 한편으로는 고립감도 많이 느꼈거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친구들이랑 보내다가 갑자기 혼자가 된 느낌이었어. 이제는 무언가를 같이 할 수 있는 동료들을 찾기가 너무 어려워졌다고 생각했거든. 커뮤니티에 대한 갈망이 있어서 결국 다시 학교를 갔어. 학교에서 좋은 커뮤니티를 찾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거든. 그런데 그 안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그 반대였어. 교수의 위계, 토론이나 생각의 확장 없이 오로지 테크닉만을 강화하는 수업, 그 속에서의 경쟁… 효율적으로 취업 인재들을 만들어내는 시스템 속의 부품이 된 기분이었어.
특히 대학이라는 게 커뮤니티보다는 일종의 카르텔처럼 작동하면서 서로를 구분 짓고 자신들의 특권을 더 견고히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 그 뒤로 다시 많은 커뮤니티들을 찾아다녔는데, 지금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 관련 단체 한 곳과 하자에서 연결의 감각들을 많이 느끼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커뮤니티는 각자의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이것들을 말해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 아닐까 싶어. 잘라내고 깎아버리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커뮤니티에서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겠어.
그런데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그것들은 별것 아닌 것, 그 시절만 지나면 다 해결되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아. ‘미숙하다’는 프레임을 씌우고 너네가 아픈 건 다~ 청춘이라 그래~ 라고 하면서 개인에게 책임을 묻잖아. 누구나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를 뒷받침하는 제도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해.
Q4. 정신과는 언덕 위의 하얀 집이다?
나무 아픈 몸을 차별하지 마
미운 미성년자에겐 구름 위의 하얀 집이다!
짱소 잘! 아프고 싶다
Z의 답변은?
‣ 나무 정신과는 치과랑 비슷한 거 같아. 치과에 이가 아파서 가기도 하지만, 굳이 아프지 않아도 치아 상태를 점검하려고 갈 수도 있잖아. 정신과와 심리상담센터도 정신질환을 치료받기 위해 혹은 내 상태를 전문가와 이야기 나눠보고 싶어서 갈 수 있어. 아픈 몸은 누구나 될 수 있고, 어디에나 있고, 이상한 게 아니야. 그냥 똑같은 사람. 내 옆에 있는 사람들.
‣ 짱소 최근에 들었던 2020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컨퍼런스에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님의 ‘질병권’ 이야기를 들었는데 굉장히 흥미로웠어. 말 그대로 잘 아플 권리를 의미해. 질병이 개인의 노력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건가? 라는 의문 속에서 나오게 된 단어래. 예를 들어 병에 걸린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이 짜게 먹더니 병 걸릴 줄 알았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생계나 직장 속의 스트레스로 식습관이 변화했을 수도 있는 거지. 개인이 열심히 노력만 하면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 걸까? 그런데 건강은 개인의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아.
그러다 보니 나는 병원에 가거나 병에 걸린 것을 숨기게 되기도 해. 학교에서 단체 건강검진을 하고 난 뒤에 요로결석 판정을 받은 적이 있거든. 근데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내 검진에 문제가 있으니 나오라고 해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적이 있어. 내가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그 시선이 무섭게 느껴지더라. 한국은 정신과를 찾는 비율이 외국의 1/4도 안 된대. OECD 자살률 1위인 나라인데도 말이야. 병원에서, 정신과에서 치료받는 게 단순히 개인 노력 부족으로 치부되지 않아야 할 것 같아. 누구나 잘 아프고 잘 치유받을 수 있어야 해.
Q5. ‘아 나 살아있구나!’ 를 느끼는 때는 언제야?
나무 방 청소 끝나고 깨끗하고 시원한 바닥에 누워있을 때
미운 침대에 누워 두 팔로 춤을 출 때.
짱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밑에서
Z의 답변은?
‣ 미운 침대에 누워서 팔을 높이 번쩍 들어. 해가 잘 드는 밝은 날이면 더 좋아. 두 팔을 멋대로 움직이는 거야. 춤엔 재능이 하나도 없지만, 마치 무용수가 된 것처럼. 내 노래나 남의 노래나 주인 없는 노래나 막 흥얼거리면서 팔을 흔들면 마디마디 움직이는 손가락, 손등, 손목, 팔이 진짜 살아있는 것 같아. 정말 살아있어. 갑자기 숨을 꾹 참았다가 한 번에 몰아쉬는 것도 자주 해. 그럼 심장이 뛰는 게 쿵, 쿵 하고 느껴지는데 ‘아, 살아있어서 그래. 살고 있다.’ 하는 생각이 들어.
‣ 짱소 새로운 자극이나 흥미가 있을 때 활기가 생겨. 그런데 그런 자극이나 흥미가 전혀 통하지 않을 때도 있잖아. 계속해서 무기력할 때. 내가 이걸 하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은데, 그것조차 할 에너지가 생기지 않는 상태 말이야. 그때 중요한 게 지속성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하루에 스트레칭, 5분 명상, 산책, 딱 이 세 가지를 지속적으로 하는 시도를 하고 있어. 전엔 아침 8시에 명상하고, 10시에 산책하고…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나눠서 ‘잘 해내고 말겠다’라고 다짐하고 시작했는데 정말 하기가 싫더라… 그래서 그냥 하루 중 언제든, 10초라도 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어. 부담을 덜어내니까 거짓말처럼 쉬워지더라! 작은 성취와 보람이지만 계속해서 쌓아가는 시간들에서 다음 일도 할 수 있겠다는 에너지가 생긴달까? 그중에서도 산책이 제일 좋아. 요즘엔 계속 집에 있다 보니까 밖에서 나무와 바람을 느끼는 시간이 제일 편안해. 잡생각도 안 들고,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와 나는 연결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
Q6.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무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도 남들도 곧 적응한다!
미운 사랑해!
짱소 그랬구나.
Z의 답변은?
‣ 나무 내 세상이 와르르 무너질까 봐, 누군가에게 짐이 될까 봐 힘들게 할까 봐 무서워서 시도할 때 망설인 적이 많았거든? 지금 하고 싶은 말은, 무너져도 남들도 나도 언젠가는 적응하게 돼. 좋은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어. 생각보다 별일 없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무 겁먹지 않아도 돼.
‣ 짱소 ‘정상성’이라는 게 나를 숨막히게 할 때마다, 내 감정들이 계속해서 무시될 때마다, 나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느낌이었어. 그때 도움이 되었던 게 비폭력대화야. 연결, 존중, 욕구, 느낌을 중요시하는 대화인데,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어. 나는 스스로와 비폭력적으로 대화하면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 같아. 우리는 항상 된다/안 된다, 옳다/그르다 라고 배워왔잖아. 그 판단이 상대를 향할 때 분노가 되고, 나를 향할 때 자책이 되곤 해.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 그때의 나를 어떠한 판단의 잣대 없이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싶어. 나와 연결되고 싶어. 그냥, 그렇구나. 그랬구나.
우울을 바라보는 좁은 시선들이야말로 단절을 더 두텁게 쌓았던 것은 아닐까? 나의 우울과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간들이 우리에게 필요해.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도록 우울의 경계가 넓어지는 것 말이야. 서로를 향하는 존중 속에서, 비로소 우리의 연결에서의 안전함을, 끈끈함을 느낄 수 있을 거야. Z야 오늘 하루는 어땠어? 아니면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고 있어? 어떤 하루든 그 순간순간 너의 감정을 존중해. 언제든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누고 싶을 때 놀러 와. 우리는 여기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