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야, 가끔 그럴 때 있지 않아? 뭐든 멈출 수가 없을 때, 정해진 일정들이 싫어질 때, 약속 시각에 맞춰 집을 나서야 하는데 누워만 있을 때. 나는 그런 적이 있어. 주로 봄이나 초여름 즈음에. 어떤 사람들이 여름이나 겨울에 유독 약한 것처럼, 나는 그때쯤 최대치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지곤 해. 하지만 단순히 계절 때문은 아니야. 사실 계절은 별 상관이 없지.
최근에 ‘회의주의자’란 말을 들었어. 원래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하루에 몇 개씩 온라인회의를 하는 나를 두고 동료가 한 말이었어. “또 회의해요? 완전 회의주의자네요.” 말장난이 웃겼지만 조금 뼈아팠지. 여러 개의 내가 있는데, 그중 아무도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지 않는 거 같았거든. 모든 게 붕 떠 있는 느낌. 좋은 건 아니지.
친구와 얘기하다가 ‘일과 맥시멀리스트’란 말을 지어내기도 했어. 약간 자조하는 투로. “최근에 너무 심각하다고 느꼈던 건 주위 모든 사람이 나를 바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거야.” 친구가 하는 말이 내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비슷해서 깜짝 놀랐어. 우리는 줄여서 일맥이라고 부르면서 깔깔 웃었지. 한편으로는 한숨도 나왔어. 일이 많다, 적다를 떠나 내 생활에 있어 지금은 과하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좀 더 여유롭게 살고 싶고, 그럴 필요도 많이 느끼고 있지. 숨 가쁘게 살고 싶지 않았어. 단지 하고 싶은 걸 하려고 살고 있고, 하기 싫은 걸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건데. 어쩌다 나는 이렇게 여유 없는 사람이 되었지?
'회의주의자' 나무
내가 번아웃이 올까 걱정돼. 실은 지금도 번아웃인데 모르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이러다간 언젠가 번아웃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지.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흔하게 있는 거 같아. ‘일맥’들의 사회에 ‘번아웃’은 당연한 걸까?
‘번아웃’이란 무엇일까. 탈진 증후군이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지나치게 일한 나머지(과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치고 의욕이 없는 상태(소진)를 말해. 번아웃이라고 하면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이 겪는 증상이라고 생각하기 쉬워. 하지만 청소년에게도 번아웃은 더 낯선 단어가 아니야. 번아웃이란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건 3~4년 전부터 인 것 같은데, 벌써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되었어.
책 <번아웃 키즈>에 따르면, 번아웃은 주어진 일과 요구를 더 감당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심리 현상이야. 자신을 매섭게 몰아세워도 극복할 수 없고, 이겨낼 힘도 의욕도 없어진 거지. 청소년에게 오는 번아웃은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 학습능력과 상관없이, 꼭 학업과 관련된 일이 아니어도 번아웃이 올 수 있어. 별 이상이 없어 보이는 환경에 있는 사람도 무수한 압박과 성과주의 사회의 요구 속에서 번아웃이 찾아올 수 있지. 무수한 압박과 요구. 여기서 시선이 멈췄어.
난 이제 학교에 가지도 않고, 어딘가에 가라고 하는 압박도... 없지는 않지만, 훨씬 덜한데. 부단히 나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벅찰까? 나의 자리를 찾으려면 당연한 과정인 건가? 나도 모르는 어떤 압박과 요구가 나를 누르고 있는 걸까? 그게 대체 뭘까. 생각해봤더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 남의 시선에 맞춰야 할 거 같은 불안함, 매번 나를 힘 빠지고 화나게 만드는 사회 곳곳의 풍경... 이런 게 떠오르더라. 그래, 지칠 수야 있지만 회복하는 기간이 너무 부족해. 충전하는 시간 말이야. 생각해보면 탈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 예를 들면 공들여 준비한 중요한 프로젝트가 끝났다거나 집중해서 운동하고 난 뒤 우리는 기분 좋은 지침과 탈진을 느끼잖아. 후련한 느낌마저 드는 그런 탈진. 똑같은 압박과 요구를 받아도 어느 때엔 기꺼이 할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매번 그 선을 넘기는 거 같아. 그에 비해 재충전의 시간은 제대로 보내지 못하는 거 같고. 선을 많이 넘은 나머지 지난 몇 달간은 신경 써야 할 것들 속에 파묻혀 버리기 직전이었어. 열심히 저글링을 하는 데 하나하나씩 공을 빠뜨리는 거 같았지. 결국에 철퍼덕 쓰러지겠다 싶을 때 즈음, 뭔가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
내 욕심이 과했을 수도 있어. 시간 관리가 서툴러서 망쳐버린 걸 수도 있고. 하지만 모든 상황이 내가 그 선을 넘도록 하는 거 같다는 생각도 들어. 이를테면 내 안에 내재 되어 있는 무언가가 나를 계속 무리하게 만든 거지. 청소년기 때부터 우린, 한계로 밀어붙여라, 모든 건 엉덩이 싸움이니 버텨야 이긴다, 힘들어도 참아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듣잖아.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 한 가지만 해서는 안 돼. 모든 것을 잘 해내야 해. 열심히만 해서도 안 돼. 대학은 어떻게 가려고 그래,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런 말들. 주위를 둘러보아도 마찬가지야. 휴가 한 번, 자유로이 쉬고 노는 시간도 마음껏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넘쳐나. 휴가에서 돌아오면 일과 공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누가 휴가를 쓰고, 방학을 즐기겠어? 쉬면 마음만 불안할 뿐이지. 빛 재촉이 들이 밀어지거나.
그뿐이겠어, 학교에선 매일 1부터 9까지 등급을 매기며 평가하고, 도대체가 시험 기간이 아닌 날이 없었어. 날마다 진도를 나가고 공부하고 학원가고 진도 나가고... 이 살인적인 환경에 충실히 따라가면 다른 걸 할 틈이라곤 잠들기 전밖에 없을 거야. 맞다, 생각났어. 이런 환경에 있었지! 고대했던 휴가를 떠나고 처음 며칠 동안 힘이 빠지고 앓아눕는 걸 ‘탈긴장 증후군’이라고 한다던데, 지금 내 상황도 학교를 졸업하고 맞은 이 자유를 어쩌지 못해 겪는 일종의 탈긴장 증후군 인걸까? 차라리 그 정도면 다행인 거 같아.
번아웃을 겪는다고 우울증을 앓는 건 아니지만, 견디기 힘든 탈진이 지속하면 탈진 우울증이 생길 가능성이 커지게 돼. 우울증은 질환이기 때문에 처방이 필요해. 약물치료나 상담 같은 치료를 받아야 하지. 뻔한 말 같지만, 번아웃엔 휴식이 필요해. 내 안으로 천천히 재미와 즐거움, 행복을 채워 넣어야 번아웃을 예방할 수 있어. 몸의 긴장을 풀고, 몇 가지는 그만두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을 하나씩 해보는 거야. 나도 뭔가를 해보려고 해.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어도 그게 스스로에 대한 압박이고 요구라는 생각이 이제야 조금씩 들기 시작했거든. 더 나아가 나를 착취하고 있다는 생각도. 심리상담을 받거나, 요가를 하거나, 깨끗하게 방 정리를 하거나. 짧은 시간이라도 스마트폰을 하지 않고 쉬어보려고. 나의 달력에 더 다양한 감정과 흥미들로 채워보고 싶어.
Z야, 너의 달력은 지금 어때? 거기엔 어떤 의미, 목표가 있니? 놓치고 있는 것들은 없고? 무엇이든 꽉 채워져 있는 것보단 조금 널찍한 게 좋은 거 같아. 심심함이나 외로움, 작은 흥미와 관심이 들어갈 틈이 있어야 인생이 더 즐겁지 않을까. 너를 갉아먹는 좋지 않은 생각과 감정이 배출될 출구도 있어야 하고. 네가 자주 쉬어가길 바라. 부디 너의 달력이 너를 살리는 방향이길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