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말, 하자작업장학교를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시골 산골짜기의 우리 집에는 고양이, 개, 꿩과 맷돼지는 있어도 엄마아빠 말고는 사람이 없었다. 방의 이불속에서 뒹굴고 고양이를 귀찮게 하는 생활 아닌 생활도 네 달이 넘어가니 무료해졌다. 집에서 지내고 있지만 나는 무중력상태였다. 한참을 자다가 눈 떠지면 일어나서 밥만 먹고 숨 쉬고 고양이 밥 주러 나가는 게 전부고 가끔 산책을 가면 다행인 살아만 있다고 그게 정말 사는 건가?
나는 다시 학교에 가고 싶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고, 더 배우고 싶었고, 이야기가 나눌 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집을 구하고, 하자에서 책모임을 함께 하고, 아르바이트도 구해서 일도 하게 됐다. 나는 비건베이커리에서 일을 했는데 ‘비건‘이라는 말에 기대를 하고 하게 된 일이었지만 그곳은 빵만 비건인 곳이었다. 돈을 벌려고 한 일인 만큼 돈만 생각하면 됐는데 다른 기대도 많았었던지 실망이 컸다. 매장 안의 낮은 젠더감수성이나 일회용 플라스틱 쓰레기, 사람 사이에서 지치게 됐고 무엇보다 삶이 아르바이트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서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일을 그만뒀다. 주 5회 8시간씩 하는 일이 없어졌으니 나는 시간이 많이 남았고, 하자를 더 자주 오갔다. 직조작업단도 했고, 채식한권, 채식한접시 등 하자에서 다양한 비거니즘 모임도 생겨나서 즐거웠다.
노는 게 제일 좋았지만 그래도 서울에서의 생활을 지속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또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왕 일을 한다면 적어도 내 신념과 충돌하지 않고 배울 수 있는 일을 바라던 차, 거인이 ‘살림집 살리기 프로젝트’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절대 하겠다고 못하는 제안인데, 처음에 거인이 살림집 PM 활동을 제안하면서 활동비로 1년에 30만원 가량을 준다고 했다. (그 금액은 소통의 오해였다.) 1년에 30만원… 일 할 때 한 달 월급이 최저로 160만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쥐꼬리 만한 돈이었다. 그런데 그걸 한다고 했다. 그때의 난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나는 그만큼 기회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자센터'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나보다. 그렇지만 1년에 30만원을 받고도 하겠다고 한 그때의 나도 이런 확실치 않은 금액을 듣고 한다고 한 자야도 웃기는 사람들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이렇게 나는 살림집 살리기 프로젝트 매니저(이하 PM)로 활동하게 됐다.
살림집 PM활동을 시작하며 자야와 나는 공통적으로 하자가 비거니즘을 존중해주는 공간에서 나아가 비거니즘을 지지해주고 함께 실천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처음 채식을 하게 된 것은 황윤 감독님의 ‘잡식가족의 딜레마‘ 영화를 본 날이었다. 그 날 저녁으로 제육볶음이 나왔고 영화에서 나온 돼지와 밥상의 고기가 이어져 보였다. 차마 그걸 먹을 자신이 없어서 그 날부터 채식을 하기로 했다. 그를 가능하게 한 학교 환경과 주변인들의 덕이 커서 지금도 감사한다. 그러면서 내가 GMO를 반대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모순된 것임을 알았다. 공장식 축산에서 이용되는 사료는 대부분 GMO작물이고, 기후변화에 축산업은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를 알고부터는 자연스럽게 비건으로 살았다. 하지만 혼자 일상에서 하는 실천은 쉽게 딜레마에 빠졌다. 다행히도 시대의 흐름 덕일까? 아니면 타이밍이 잘 맞았던 걸까, 내 주변 친구들 중에 비건을 시작한 이들이 늘었고, 하자에 비건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여러 모임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나는 혼자만의 실천에서 놓치고 있던 얼굴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고기 뒤에 보이지 않던 동물들의 얼굴들. 내가 비건이어서 그런 걸까, 실천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비건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으로 동물도 살리고 지구도 살릴 수 있었다. 하자는 서울시에서 운영되는 기관이니, 이런 곳에서 비건을 실천한다면 영향이 클 것이다. 특히나 청소년들이 많이 오가는 공간이니 청소년들에게 앞으로의 사회를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제안도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하자는 내가 안전하게 느끼는 공간이고, 서울에서 내가 있을 곳이 되어준 마을이다. 그런 곳에서 내가 불편하게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 가장 컸다.
그렇게 살림집 PM으로 활동하며 살림집 대청소도 하고, 옷을 기증받아 살림옷장도 운영하고, 기후위기 기사 읽기모임, 자야의 바느질 워크숍을 열거나, 영화한접시에서 맛있는 간식들을 먹으며 영화 상영을 하기도 했다. 창의서밋에서는 되살림장도 진행했고, 비전화공방에서 여는 ‘손잇는 날’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약 1년간 활동하면서 살림집은 세컨핸드샵으로 하자에 자리 잡은 듯 보였다. 필요 없는 옷, 안 입는 옷을 기증하기도 버리기도 하고 새로운 옷을 찾아가기도 하며 가끔 뭐가 있을까 구경 오는 공간. 공간이 자리 잡자 게으른 나는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게으름도 부렸다.
자야와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이걸 하면 어떨까? 의견을 나누며 활동했지만 사실 자야에게 얹혀간 일이 많았다. 나는 낯선 사람들과의 교류를 잘 하지 못했다. 새로운 사람들이 여럿 오갈 때마다 어색함과 낯가림 속에서 자리를 피하고 싶었고 많이 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영부영 넘어간 일들도 많았다.
지금도 기억에 나는 일들은 동물성 제품에 대해 논의했던 것들과 동물 대상화에 대한 고민을 했던 것이다. 살림집은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공간이다 보니 동물성제품(오리털파카 가죽신발 등)이 기증 들어오면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았다.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일어나는 동물들에 대한 비윤리적 과정을 지우고 되팔 수는 없어서 이런 폭력들을 적고, 동물성제품은 중고로만 구입을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 옷을 기증해준 사람들의 마음을 고려하지 못했다. 기증해준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서로 불편해지는 상황도 일어났다. 사실 옷을 살 때 옷이 어떤 것으로 만들어졌는지까지 신경 쓰고 구입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 옷을 살 때 어떤 성분으로 만들어졌는지 관심을 갖고 덜 폭력적인 옷을 사면 어떨까?'라는 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너무 과격했을지도 모른다. 살림집에 같이 한 사람들끼리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한 번도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거나 같이 나눈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아쉽다.
그리고 막상 하자가 비거니즘을 지향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살림집 활동을 하면서 어떻게 살림집이 하자에 있는지 잘 살펴보지는 못한 것 같다. 동물대상화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물캐릭터를 로고로 쓰고 있는 다른 팀들을 고려하지 못했다거나, 같은 공간에서 활동하는 다른 팀들을 설득하거나 대화할 시도를 하지 못한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뭐 마무리하기 전에 한 번쯤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 하자를 오간 사람들과 판돌들에게 이 공간은 어떻게 보였을까? 후기청소년들이 활동하는 공간 정도?
올해로 살림집PM 활동은 끝이 난다. 덕분에 쏠쏠하게 용돈벌이도 하고, 모여서 맛있는 걸 먹기도, 제일 먼저 기증 들어온 옷들을 얻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년에 살림집은 어떻게 될까? 누가 살림집을 이어받아 운영할지는 몰라도 나와 자야가 활동할 때 지향했던 비거니즘과 제로웨이스트 키워드를 계속 가져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내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내 이야기로 마무리하자면 내년에 나는 어떻게 살까? 아직까지 계획이 없다. 어떡하지. 좋은 의견이 있거나 나와 맞을 것 같은 일거리가 있으면 언제든 연락주면 좋겠다. 나는 나대로 어떻게든 잘 살 거다.
:: 글_ 산하(살림집 PM)
작년 말 딱 이맘 때쯤, 채식한권을 같이 하는 산하한테서 연락이 왔다. 2019년 1년 동안 살림집 프로젝트 매니저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1년에 30만원 정도 받으면서 일할 수 있다고. (아니었음. 월 금액이었다.)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곧장 네! 하고 대답했다. 그 즈음 플라스틱 프리와 제로 웨이스트, 생태 하우스 등에 푹 빠져있던 나였다. 귀농을 꿈꾸며 살림집을 통해 에너지 자립도 익히고 하자 내에서 좀 더 비거니즘의 논의를 확장시키고 싶었다.
거인, 풍뎅, 산하를 만나서 첫 만남을 가졌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앞으로 어떻게 살림집을 바꾸어나갈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살림집의 미래는 무궁무진했다. 처음 우리에게 내어진 가장 큰 숙제는 살림집의 1년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내 생에 1년 계획이라는 걸 세워본 적이 없는데 1년이라는 긴 시간을 짐작해서 계획을 세우는 일은 내게 참 어색했다. 과연 1년 계획을 우리가 지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걱정이 되고, 내가 1년이나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지도 갑자기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니 아득해졌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무슨 일이던 잘 그만둔다..;)
연초에는 살림옷장을 통해서 패스트패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중반엔 여름이니 물을 마실 것이고 그러니 텀블러를 이야기하며 함께 플라스틱 프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가을엔 동물 관련 기념일이 많으니 동물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겨울엔 채식 한 접시와 함께 콜라보 해서 채식하는 요리 모임을 진행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3월, 살림집을 대청소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장난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이 도와주었는데 그래도 참 물건이 많고 더러웠다. 살림집 안에 있던 많은 물건들을 다 꺼내고 새롭게 배치를 구상하고 청소하는 데에만 거의 한 달이 걸렸다. 우리는 이전부터 있었던 중고 옷 판매를 좀 더 살려서 ‘살림옷장’이라 이름 짓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살림집이 처음부터 무인은 아니었다. 산하와 내가 돌아가며 살림집에 열심히 나왔고,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5월부턴 미세먼지와 함께 기후위기 기사 읽기모임을 진행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줬다. 좁은 살림집에 옹기종기 모여 기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쭉 진행할 계획으로 시작했었는데 아차, 7월부터는 살림집에 있으면 녹아내릴 정도로 더워서 잠깐 있는 것 말고는 활동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기후위기 읽기모임은 무산되고 살림집은 무인 카페가 되었다. 돈통에서 돈을 빼가는 사람은 없었다.(아마 그렇다) 무인이기에 사람들은 더 자유롭게 자신이 가지고 싶은 물건이나 옷을 자신이 내고 싶은 만큼 돈을 내고 가져갈 수 있었다. 우리가 원하던 순환이 살림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흘러갔다.
기후위기의 시대에서 여름의 무더위는 참 가혹했다. 살림집에 있는 물건들이 녹을 것만 같았다. 살림집은 최고 40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고민 끝에 살림집을 가을이 되기 전까지 신관 2층으로 이사해놓기로 결정했다. 살림집 밖에 있는 살림집이 탄생했다! 아무래도 접근성이 낮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살림집은 쓸쓸한 여름을 나고.. 그 사이에 바느질 워크숍을 진행하고 영화상영도 했다. 영화를 보고 비건 간식을 먹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살림집 덕분에 재미있는 경험을 참 많이 했구나!
되살림장과 창의서밋을 끝으로 살림집은 다시 원래있던 자리로 옮겼다. 근데 이번엔 혹한의 추위가 우리를 반겼다. 살림집에는 1분 이상 있을 수 없다. 너무 춥다. 그래서 지금 이 글도 신관 공유카페에서 쓰고 있다. 1년간 살림집을 통해서 기후위기 실감하기 체험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휴-.
살림집이 추워서 자주 못 들르다보니, 얼마나 사람들이 오가는지 얼마나 관심을 보이는 지도 잘 모르겠다. 과연 살림집이 얼마나 하자 마을 사람들에게 영향을 줬을까? 정확히 하고 싶었던 말은, '비건 실천하는 사람을 존중해줘라'가 아니라 그것보다도 '동물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달라'였는데. 잘 전달이 되었을까? 지금 같은 기후 위기 시대에 왜 모든 사람이 비건을 실천해야만 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잘 되었을까. 하자에 좀 더 열심히 나오고 더 열심히 진득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많이 아쉽다.
내년엔 살림집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올해 내내 비거니즘과 제로 웨이스트를 건네는 공간이었음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비거니즘과 제로 웨이스트는 우리에게 영원한 숙제다. 놓지 말고 쭉 관심을 기울이기를..